자퇴하는 매화꽃잎 [0]

닥터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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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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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블랑

자퇴를 하기로 결심했었다. 매화꽃이 환장하게 핀 이른 봄이었다. 나는 교학과에 가서 자퇴서의 모든 란에 글자를 채워 넣고 교수 서명란만을 남겨둔 채 예술관 학과장실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은 안에 계셨다. 내 시나리오는 이거였다.

“교수님. 도저히 못 해먹겠네요. 이제 때려치우려고요. 다른 학교로 가려 합니다. 그러니 절 붙잡지 마세요.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으니까요. 어서 이 자퇴서 교수 서명란에 싸인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뭐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튼 저에 준하는 사무적이고도 냉철한 어법을 구사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교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긴 후 내가 입을 열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시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왜 왔는지 궁금해 하시는 교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에서 나와야 할 건 나오지 않고 엉뚱하게 눈에서만 뭐가 자꾸만 나오는 거였다. 교수님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계시는 건지, 아니면 시를 하도 많이 쓰느라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건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그래. 네가 그런 결정을 한 덴 다 이유가 있겠지. 교학과 가면 자퇴서 있다. 사내 자식이 질질 짜지 말고 가서 그거나 떼 와라. 내가 싸인 해 줘야 하니까.”

나는 울면서도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거라면 이미 다 준비되어 내가 들고 온 가방 안에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울다 말고 가방을 열고 자퇴서를 꺼내 내밀며 “교수님 제가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를 해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교수님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실 문을 나섰다. 예술관 건물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교 본관 건물까지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봄이었고 학교 곳곳에는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때마침 가지 끝에 달려 있던 꽃잎 몇이 자퇴서도 없이 일찌감치 자퇴를 하는 중이었다.

* 컨텐츠 출처 : 창작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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