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이라고 해봐야 올해 2월까지는 고등학생이었다.

여하튼 과거형인지라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전교생을 다 합쳐도 여자가 30명이 안되는 알아주는 꼴통 공고에 다니고 있었고,
그 학교에서 나름대로 재밌게 학교 생활을 했다.

워낙 정신 세계가 독특한 친구들인지라 학교에서 재밌게 놀았는데, 문제는 지하철 타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하철로 집에 귀가할때 혼자가면 무척 심심하고
뻘줌해서 여러명이서 같이 가기 마련이다. 특히 나 혼자 집에 가다가 단체로 움직이는 다른 학교
애들을 보면 뭔가 뻘줌하고 이상한 느낌이 있다. 이건 학생들은 거의 안다.

여하튼 나는 친구 7~8명과 함께 2호선 라인을 타는 2호선파였다.
참고로 우리 학교가 "내신 100% 모여라" 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멀리서도 왔던 친구들도
제법 됐고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 긴긴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나 하다가 애들이 생각한게 지하철에서 내기하는 거였다.

처음엔 간단히 노래 부르기 정도였다가 강도는 점점 쌔져서, 여자한체 수작걸기,
멀쩡히 있다가 기절한척하기, 젊은 사람한테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하기 등등
고난이도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난 아직도 각 미션들의 특징과 해법을 똑똑히 기억한다.

여자한테 수작걸기 : 여자한테 살짝 가서 만원 짜리를 쥐어주고 "저 내기 중이니까 저한테 연락처 알려주는 척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 끝이다. 의외로 쉽다. 어쩔땐 웃으면서 공짜로 해주는 대학생 누나들 있다. 진짜 이런 님하들은 조낸 이쁘다. 어차피 내기하면 최소 5처넌빵이었으니까 돈 줘도 적자는 아닌데 돈 굳으면 좋은거 아닌가?

멀쩡히 있다가 기절한척하기 : 개인적으로 난 이게 제일 쉬웠다. 연기만 잘해서 안 들키고 진짜 기절한것처럼만 보이면 쪽팔릴게 하나도 없다.

젊은 사람한테 할아버지 앉으세요하기 : 이건 대상을 잘 골라야 된다. "고딩 한명이 나한테 할아버지 앉으세요, 하고 옆에 있는 단체 무리들이 비웃듯 키득거린다." 나 같아도 시비로 생각하고 죽빵이 날라간다. 그러니까 순해 보이는 사람으로 고르고 나중에 내기였으니 죄송하다고 꼭 해야 된다.

갑자기 핸드폰으로 음악 틀고 믿힌 춤추기 : 이건 차라리 "여러분 제가 웃겨 드리겠습니다." 하고 열심히 봉산탈춤 추는게 낫다. 그러면 의외로 평신 보는 눈초리로 안 보고 재미있어 한다.

전방수류탄 : 이건 그냥 쪽팔림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수류탄 던지는 모션을 취하며 전방 수류탄! 하는 건데, 한번은 어떤 중학생 새퀴들이 "아군이 사살 됐다."라고 맞대답해서 개 쪽팔린적이 있었다 ㅡㅡ

겨울털귀마개를 헤드셋처럼 귀에 끼고 음악듣는척 흥얼거리기 : 이건 본인이 헤드셋을 착용했다고 착각하는척 하는게 무난했던것 같다.

아무튼 미션들과 그에 대한 해법들은 이 정도가 있었는데, 졸업하는날, 우리는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대박 미션을 준비했다.

이게 마지막이고 졸업식 하는 날이 학교에서 일찍 끝나니사람도 적으니 강도가 쌘 미션으로 해서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합일되고, 9명에서 개인당 무려 2만원의 내깃돈이 걸렸다. 그리고 그만큼 미션은 쌨다.

그것은 바로!!

지하철에서 아무 여자나 잡고, 어깨를 앞뒤로 마구 흔들며 "도대체 왜 이러니? 날 떠나서 행복하니?" 따위의
믿힌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긴장했다. 우리가 아무리 쪽팔림에 내공이 쌓였다고 하지만 이건 쌔도
너무 썠다. 게다가 "꼭 대학생 정도의 젊은 여자에게 할 것"이라는 부수적인 조건까지 걸렸으니…….
아는가 모르겠지만 여자에게 수작걸기류 내기는 대상의 연령이내 나이와 비슷할수록 쪽팔림이 곱하기로
늘어간다.

결국 개나소나 다하고 몇십년째하고 앞으로도 계속할 문제의 그 게임 가위바위보로 그 믿힌 짓거리를
할 불쌍한 희생양을 구했고, 다행히 나는 안 걸렸다. 난 상황대처능력이 꽤 뛰어나고 돈을 어지간히
밝혀서 웬만한건 했는데 이건 정말 자신이 없었다. 여자한테 귀빵맹이를 클락션으로 2만대 맞을것 같았다.


어쨌든 내기에 걸린 한 친구（줄여서 내기남이라 부름）는 똥 씹은 표정을 했지만 "내기 안 지키면 나머지 인원한테 졸라 맞기"라는 규칙이 있었으므로 어쩔수가 없었다. 우린 정말 얼굴과 머리만 빼고 야무지게 때렸으니까.

결국 그 불쌍한 친구, 미션을 시작했다.

대상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아! 이렇게 웃길수가……. 대상을 찾기만하는데도 웃기다.
아마 나라면 조금이라도 덜 예쁜 여자를 찾았을 것이다. 여자한테 저런 질알을 할때 여자가
얼굴이 이쁘면 정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구 역시 이 생활 한두번하는게 아니라는듯 비교적 얼굴이 겸손하신 분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너 삼순이 맞지?"

순간 쏠리는 승객들의 시선! 내 친구는 긴장한듯 한동안 말을 안하다가! 양 손으로 어깨를 잡으며!

"너 요즘 어떻게 지내? 나 버리고 가니까 행복하냐?" （시비조인것 빼고 이 쪽팔린 대사를 완벽하게!!）

우린 내기남이 정말 대단했고 불쌍해보였다. 더불어 여자가 쪽팔려서 말을 못할지 아니면 귀싸닥션을 후려
갈길지에도 눈과 귀가 집중됐다.

여자는 순간 얼었다. 그리고 5초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 나도 많이 힘들었어."

이건 또 무슨…….

"그렇지만 나 이제 너 다 잊었어!"

정말 식스센스 이후로 최고의 반전이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거라는 것을 우린 느꼈다.
내기남은 역으로 얼어버렸고,

"나쁜놈! 당장 꺼져버려!"

결국 나와 나쁜친구 여덟은 진짜 다음역에서 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린 졸업 마지막날에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어떤 분야이건 은둔고수가 많다는 것을.


추신 : 내가 생각해도 믿힌 이야기지만 진짜 설정따윈 하나도 없다. 우릴 욕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나름대로 젊은 날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말고도 하루하루 전쟁 같은 생활에 스트레스 쌓이는 학생들과 직장인들도 유쾌하게 웄었노라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근데 기회가 되면 또 할꺼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나이 먹어서 이 짓은 정말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