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게 우는 성은을 밴으로 데려갔다. 그동안 많이 참았는지 집에 가는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다가 겨우 좌석에 기대어 잠들었다. 울다 지쳐 잠든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준 후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나를 잠재우려 하지 않았다.
내가 오늘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무엇일까. 3년 만난 여자와 헤어진 지 3일 밖에 되지 않았다. 단 3일로 지워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수연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그녀와 채웠던 3년의 추억은 아직도 내 뼈 마디마디에 스며있었다. 그런데 오늘 성은에게 느꼈던 감정은 내가 수연을 사랑할 때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딱히 성은이 좋다거나, 사랑으로 보였다거나 하는 전조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난 손을 뻗어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의 불을 켰다.
삑.
“후우..” 한숨을 쉬며 양 손을 뒤통수에 가져갔다. 누운 채로 조용히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마치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그 위에 서서히 그려지는 수연과의 추억. 가슴 먹먹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려지는 성은의 웃는 모습. 왜 수연과 성은이 함께 그려지는 걸까.
고개를 양 옆으로 세차게 흔들며 다시 손을 가져가 스탠드를 끈 후 눈을 감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수연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인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나 스스로가 벌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감은 후 펼쳐진 검은 도화지에는 하얀색 펜으로 성은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었다.
“헉!”
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침대에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눈이 번쩍 뜨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말도 안된다, 강진우. 네가 지금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냐?”
도대체 나는 왜 성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왜 내 옆에 있으라는, 연인들 사이에서나 할 법한 말을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꺼낸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나를 왜 제지하지 않은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녀도 민혁과 헤어진 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니, 그녀는 그럴 만 했다. 나에게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술을 마신 상태였으며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사람이 당연히 나였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못하자 그녀가 더 화가 났고, 그 후 내 진심어린 말에 그녀의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쩌면 그녀가 내 품에 안겨 펑펑 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녀에게 사랑과 거의 흡사한, 아니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감정을 느낀 것일까. 나는 아직 수연을 잊지도 못했는데.
“으아! 모르겠다! 차라리 날 죽여라!”
복잡한 머릿속을 부여잡고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비명을 지르며 밤새 뒤척이고 말았다.

오늘도 출근길에 수연에게 전화를 걸 뻔했다. 습관, 참..또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습관조차 수연을 잊지 못한 상태에서 성은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는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밴의 시동을 걸고 5분 정도 예열 후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따라 핸들 돌리기가 힘들다. 오늘 나는 성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성은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는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혹시 그녀도 나처럼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옆으로 지나가는 새벽 가로등을 바라보며 성은의 집으로 향했다.

‘도대체 멍청한 건지 아님 순진한 건지~이렇게 한심한 말만 튀어나와~♪’
성은의 핸드폰 컬러링이 울린다. 맨날 하는 전화인데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딸깍. 마침내 성은이 전화를 받았다.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응, 오빠. 일어났어. 금방 나갈게~”
“어, 그래.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행이다.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 아마 그런 걸 거야.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대하리라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종종거리며 나오는 그녀. 빨간 방울이 달린 스웨터 비니에 하얀색 후드 점퍼, 청색 스키니진과 브라운색 계열의 어그부츠를 신은 성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두 손을 점퍼 호주머니에 단단하게 넣고 나온다. 꽤나 춥나보네.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귀엽고 발랄하다.
나는 얼른 운전석에서 나와서 그녀가 나오는 입구 쪽의 밴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춥다. 얼른 들어가.”
나의 행동에 차 앞에서 멈칫하는 그녀. 그러더니 움츠린 목을 펴고 나를 쏘아본다. 그녀의 눈빛에 움찔하는 나. 어제 일을 기억하는 건가?
“..왜..왜 그래?”
더듬거리는 나의 말투에 그녀의 눈은 점점 더 족제비눈이 되더니 나를 향해 몸을 휙 돌리고 내 앞에 멈춰선다. 어제 사고（?）를 친 터라 그녀의 저런 몸짓 하나에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가 점점 더 숙여진다.
“오빠..”
젠장. 올 것이 왔다. 어떻게 해명하지? 얘도 뭔가 낌새를 알아챈 것이 틀림없다.
“그..그게..어젠..”
“오늘 왜 이래?”
“응?”
그녀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족제비눈이다.
“오늘 왜 이러냐고. 왜 매너있는 척 하는데?”
“응?”
그녀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자꾸 응응대는데?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매너있는 척 하냐고. 말해봐. 말해봐. 오빠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기운이 빠진다. 그거였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왠 한숨? 오빠 죽을 때 됐어? 왜 이래?” 하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성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괜히 부아가 치민다.
“쳇. 잘해줘도 뭐라고 해! 어서 타기나 해!”
짐짓 화를 내며 밴에 그녀를 구겨넣듯 태운 후 문을 닫는다.
쾅.
“엥? 저 오빠가 미쳤나! 왜 잘해줬다 성질냈다 난리야!”
운전석에 타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그녀. 네가 사람 간 떨어지게 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잘해줄 때 그냥 그러려니 해.”
백미러를 바라보니 한껏 좌석에 파묻혀서 나를 향해 계속 족제비 모드를 발동 중이다. 그 눈빛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쳇. 평소랑 다르니까 그렇지, 뭐. 알았어. 이제 나 무조건 공주처럼 모셔야 할 것이야!”
요새 아주 자기가 공주인 줄 알지. 피식 웃음이 났다.
“알았습니다. 공주님. 출발하겠습니다.”
엑셀을 밟자 밴의 엔진소리가 새벽 속으로 퍼졌다.

“오늘은 회사로 들어갈거야. 스케줄은 저녁에 ‘캔버스’ 녹화 한 개 있어.”
당대 내로라하는 가수들만이 출연할 수 있다는, 토요일 새벽 12시 5분에 방영하는 프로그램 이름이다. 난 그녀의 반응을 보기 위해 백미러로 성은을 힐끔 본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다. 뛸 듯이 좋아할 줄 알았더니...자는가보다. 어제 술 마시고 피곤했을 것이다. 버릇처럼 이루마의 CD를 시디플레이어에 넣는다. ‘River flows in you'가 서서히 흐른다. 서서히 그의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긴다.
창밖은 여전히 추운 겨울의 풍경 그대로다. 어제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소와 같은 것이다. 그래. 흐르는 대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어제...”
갑자기 뒷좌석에서 성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라는 단어에 갑자기 식은땀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뒤를 돌아 그녀를 보니 여전히 담요를 덮은 상태다.
“어제는...미안했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 못난 매니저 탓이지.”
정지신호를 보고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지한 밴 안에는 피아노 선율과 엔진 떨림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 고요했다. 더 이상 어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어제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도망가고 싶지만, 이렇게 흘러간다면 나중엔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내 잘못도 있었어. 미안해.”
성은이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단순히 미안함 때문에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표면상으로는 술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내뱉은 술버릇을 사과하는, 아주 지극히도 평범한 대화였다. 그래, 내 마음은 내가 추스르면 되는 거다. 그것은 내 몫인 것이다.
“오빠는 나한테 할 말 없어?”
“나도 미안해. 그리고...”
그 때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켜졌고, 나는 서서히 엑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
“...”
내가 한참을 이야기 안하자 그녀도 이야기를 멈춘다. 잠든 모양이다. 그래.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CD플레이어에서는 ‘너의 마음속엔 강이 흐른다’가 재생되고, 이루마의 피아노 선율에 따라 Ruvin의 목소리가 잔잔한 강처럼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