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캔은 한동안 바다 위를 둥 둥 떠다니다 이내 가라앉았다. 맥주가 가득 들어있는 맥주캔은 가라앉지 않는데 저건 왜 가라앉을까. 그는 그 차이가 문득 궁금해졌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그런 걸 고민해봐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만에 하나 변하는 게 있다고 해도 그건 커다란 백지 위에 떨어진 작은 잉크만큼 작은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작은 변화로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해쳐 나가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 마신 맥 캔은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 사이에서 파도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뚜껑을 완전히 꺾어 캔 안에 넣어놨기 때문에 이따금씩 찰칵 거리는 소리가 여름날의 풍경처럼 들려왔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의 무인도와 여름날의 풍경소리는 아무래도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지만, 그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것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저기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본 채였다.
“응?”
“우리, 섹스하지 않을래?”
그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재대로 들은 건지 재대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앞전의 대화와는 그 본질부터 달랐다. 몇 광년만큼의 온도차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냥,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일단 할 일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극한의 상황에서는 보통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에 못 이겨 옆에 있는 사람과 입을 맞추고,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인 섹스를 하는 거지. 흔한 클리셰야.”
“지금이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인가?”
“그건 아니지.”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그냥 섹스를 하고 싶은 거야?”
“조금 흥미는 있어.”
“그건 나에 대한 흥미야 아니면 행위 그 자체에 대한 흥미야?”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럼 안 돼.” 그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할 수 없어.”
“어째서?” 그녀가 놀라며 되물었다. “분명히 예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야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걸. 그리고 이런 곳에서 굳이 섹스를 할 이유도 없잖아.”
“흐음……”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10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생각보다 고지식한 면이 있구나.”
“이건 고지식한 게 아니라 이성적인거야. 엄연히 다른 거라고.”
“만약에 말이야.”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가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는 과연 할까?”
“그거야 모르지. 그런 건 그 상황에 가 봐야 알 수 있는 거야.”
“그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뭐야?” 그녀가 조금 화를 내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지.” 그가 답했다.
“선문답 같은 말이네. 전혀 모르겠어.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 넌 지극히 정상이야.” 그는 머리를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것도 전혀 못 알아듣겠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바다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놀란 듯 머리를 앞으로 쭉 빼고, 시선을 한 지점에 고정시켰다. 무언가가 천천히 무인도를 항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거대한 해초더미 같기도 했고 한 무리의 물고기 떼 같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선을 더욱 집중시켰다. 그러고는 자신만의 귀납법을 사용해 머릿속에 떠오른 용의선상을 하나씩 하나씩 줄여나갔다. 일단 생명체는 아닐 것이다. 그 무리는 파도를 타고 위아래로 움직이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다. 그리고 은색의 번득이는 몸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몸체가 달빛을 받아 요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연말행사공연을 하고 있는 브로드웨이 무대의 미러볼처럼.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도저히 모르겠어.’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더니, 이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게 뭐야?”
그녀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그 무리를 한동안 집중해서 쳐다보더니, 이내 관두고는 다시 하늘을 보며 누웠다.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물었다.
“궁금해.”
“그런데?”
“별 수 없으니까. 수영을 해서 저기까지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긴 하지.”
“그냥 무인도로 올 때까지 기다리자. 하늘의 별이나 보면서.”
“물고기 떼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그를 따라 누우며 말했다.
“물고기도 여기 육지로 올라오면 아무것도 못할걸?”
“그건 모르는 거지. 육지에서 생활하는 물고기도 있다고 하잖아.”
“너, 정말 물고기를 싫어하는구나.” 그는 감탄하며 말했다.
“원래는 아니었는데, 바다 위에서 삼일쯤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 정말 질릴 정도로 물고기를 생각했거든.”
“알 것 같아.”
“정말로?”
“사실은, 전혀 모르겠어.”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앞으로도 보이는 건 바다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은데.” 그가 말했다.
“별 수 없는 거야.” 그녀가 답했다.

10분쯤 뒤, 그와 그녀는 거대한 무리의 정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맥주 캔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맥주 캔. 평생을 바쳐 마신다고 해도 다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 맥주 캔의 무리 사이에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세포의 핵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이 많은 맥주 캔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 마냥.
그와 그녀는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건 아마 침몰한 크루즈선에서 흘러나온 맥주캔일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많은 맥주캔이 갑작스럽게 무인도 인근에 나타날 이유는 없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맥주캔의 무리가 그와 그녀의 앞에 나타날 확률은 거의 희박했다. 그것도 거의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체로, 플라스틱 조각까지 함께. 어떤 종류의 특별한 기적이 작용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천천히 해변가로 나아가 맥주캔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서늘했다. 그는 그 감각에 감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모르겠어. 애초에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누는 게 옳은 일이기는 할까?”
그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머리를 숙여 발아래 수많은 맥주캔을 바라본 뒤, 손에 들린 캔을 따고 한 모금 들이켰다. 머리가 찡 해질 정도로 시원했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차가운 맥주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이제 어쩔 거야?”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답은 정해져있지 않아?” 그가 맥주를 하나 주워 그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술이나 마시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그런 거지.”
“간간히 대화도 나누고.”
“그렇지. 아까처럼 총알이 떨어질 일도 없어.”
“그거 굉장하네.” 그녀가 캔 뚜껑을 따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