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은 많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연령이 높거나 어린 애들이여서




교복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그 나이 때가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진녀는 당시에 머리카락을 레드와인색으로 염색했는데 교복 위에 하얀 후드티를 입고 있어서




더 눈에 띠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워낙 치마가 짧아서 후드티에서 한뼘만 내려오면 치마가 끝났다




하필이면 스타킹도 속이 비치는 검정색이라서 나 스스로도 쳐다보기 부끄럽기에 시선이 고생했다






진붉게 물이든 단풍나무 아래로 일진녀와 손을 잡고 걸으니 온 세상이 우리 주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풍 없는 선선한 오후 하늘아래 일진녀와 나는 어쩌면 앞으로 우리에게 놓여진




평탄치만은 않은 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마치 연인과도 같은 지금의 우리를 추억이라는




소망 한 켠에 고이 간직해두려는 것 일지도 모른다 내 곁에서 나의 발걸음과 같이 맞춰 걷고




함께 숨 쉬고 함께 웃는 이토록 고운 일진녀는 이제 서서히 서로의 마음 속에 흔적만을




남긴 채 조금씩 천천히 흐릿해져가겠지만 설령 그리 되더라도 훗날 오늘을 되돌아 볼 때




그때는 참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길 바라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나와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기에..







일진녀는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면 멍하니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




내가 손을 내밀고 나서야 내 손을 잡고 같이 걷는다 앞으로는 내가 손을 내밀어주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 때면 누가 그 손을 잡아줄까 지금도 길을 걷다말고 멈추어 서서 얌전히 숨을 쉰다




나는 손을 내밀지 않고 함께 멈추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이여, 그 사람 곁에 빈자리 하나만 두어 주라





두 그루의 붉고 보란나무가 한 자리의 벤치 옆에 심어져있다 그 두 나무는 서로를 지켜주듯 벤치




쪽으로 가지를 펼쳐 벤치가 포근해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아무 말도 않은 채 그곳에 앉았다




외진곳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갱군아 기억나?



어떤거..?




네가 담벼락에 거미 그림 그린거..



아, 생각난다. 그거 때문에 우리 학교에
몰래 들어가서 교실에서 뽀뽀했잖아




그랬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




난 네가 창가에 입김 불어서 글 쓰던것도 기억하는데




잠탱이?




잠탱이.. 그때 너 조금 귀여웠다?




하하...



...





있잖아 갱군아, 나 전학가면 자주 못 만나겠다 그치?




아무래도 그렇겠지..?




너 공부도 열심히해서 좋은 대학가면
예쁜 여자애들 많이 사귀겠다?




너는 전학가면 멋진 남자애들이 졸졸 따라다니겠네?




.....


.......




야! 갱군!



응?




너는 어쩜 남자애가 계절이 일곱번이나 바뀔 동안
여자한테 고백도 안해봤냐..? 여자친구도 안 만들고..




.. 고백했었는데 ..




어..? 정말... ? 누구한테? 내가 아는 애야?




응..




왜 말 안했어?




안 사겼거든..




.... 그래..






일진녀는 모른다 일진녀가 내 어깨에 기대 잘 때 귓가에 대고 사귀자는 말을 속삭였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말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사귀었다가 혹시라도 시간이 지나 헤어진다면




영영 만날 수 없게 될테니..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런 감정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그저 이대로, 이대로만.. 영원했으면 한다는 것을








너는 일진남이랑 왜 안 사귄거야?




뭐... 나랑 안 맞아 걔는.. 그리 좋지도 않고..




그래? ... 그럼 너도 남자친구 한명 없었네




그렇게 되네? 히히.. ...




... 좋다




응? 뭐가?




그냥 날씨도 서늘하고 풍경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일진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눈썹에서 콧대를 따라 입술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눈을 바라본다 일진녀의 눈망울에서 내 모습이 비추어진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일진녀도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 머리속에 각인이라도




시킬 듯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일진녀는 다른 학교에 복학생으로 들어갔고 나와는 한달에 한 번 정도 만났었다




만날 시간도 없고 정작 만나더라도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고 일진녀도 나와 같이 일과 공부를 함께 했다






세월이 흐르고 일진녀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운명인지 모르게 여학생과 같은 대학교에서 만났다





중딩녀는 고등학생이 되어 고딩녀가 되었고 일탈은 그만두고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어느 겨울, 오래간만에 일진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시간은 꼭두새벽이었다 평소라면은


벨이 울리는 것도 몰랐겠지만 그때는 눈이 떠졌다 일진녀의 실명 세글자가 적힌 번호였다





여보세요..?




...하, 나야. 오래간만이야





그러게.. 안 자고 뭐하냐..?





이제 자려고 히..




술 마셨구나..




쪼끔! 히히... 뭐해?



아..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거든..




음.. 그렇구나! 흐..



왜 그래?





아니 그냥.. 안부나 물어 보려고...히히




잘 지내지...





다행이다... 있지..



응..






여자친구는 만들었냐 쨔샤?!




....아 ... 응




....그래...?




응.. 지금 옆에 누워있어...



..........



.....



.... 히 짜식 다컸네..?



.... 아.. 으응...







그게 일진녀와의 마지막 전화였다







공부에 매진하지 않는 대학생 시절.. 일진녀와 나는 더 이상 멀어질 이유가 없었다





사귀었다면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고등학생 때는 공부와 진학, 주위의 이목으로 인해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면 서로를 위해서 서로를 멀리해야 했다





수년을 기다려서 그벽이 허물어진 지금에서야 우리는 마음을 놓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나에게는 짝이 있었다... 여학생은 나의 목소리 때문인지 잠에서 깨었다





나는 여학생의 볼을 보듬어주고 다시 재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나갔다




창문을 여니 시린 바람이 와닿았다 유리병에 얼음을 담고 양주를 부었다




그리고는 여학생이 일어날 때까지 찬바람을 느끼며 술을 마셔보았다...











마지막 화인 일진녀와 사귄 썰 [30]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