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의 이야기인데,
아마도 나는 그때 첫사랑이라는 것을 겪었던 것 같다.

반 아이들이 하나 둘 대입준비를 시작할 시기라 공부에 혼신을 다하고 있었지만 나는 달랐다.（물론 아닌 녀석들도 있겠지만）
당시 나는 미대에 진학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공부에 딱히 열중하지 않았다.
대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항시 스프링노트와 4B연필을 가지고 다니며 좋은 풍경이라던가, 사물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꺼내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생각해보면 인물화를 처음으로 그렸던 것도 아마 이때가 아닌가 싶다.

때는 1교시 수학시간 이었는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선생이 칠판에 이해할 수 없는 문양을 그리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업은 듣지 않고 있었다.
수학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고, 딱히 듣는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수학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는 나름 수학을 잘 했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했었다.
다만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어느 샌가 수학이라는 교과에는 숫자보다 영어 알파벳이 많아졌고,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때부터 나는 수학이라는 과목에 배신감을 느꼈고 수학이라는 단어를 내 뇌속에서 배척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수학시간=수면시간 이라는 식이 성립하는 나였지만,
지난밤에 너무 일찍 잠이 들어서였는지 책상에 팔을 얹고 누워도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해도 되지 않는 수업을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자리는 가운대 줄 맨 끝이었는데 2학년에 올라온 지 얼마되지 않아 주위에 이야기를 나눌만한 녀석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주위를 살피며 무언가 시간을 때울만한 것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주위를 살피는 도중 문득 창가자리에 앉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봉긋 솟은 조끼 가슴팍에는 초록색 명찰로 한세연이라는 세 글자가 박혀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생머리를 귀 옆으로 쓸어올리는 데 당시 나에게는 마치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작지만 오똑한 코와 기다란 속눈썹이 그녀의 이목구비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고,
샤프 끝을 살짝 물고 있는 말랑말랑한 분홍입술이 보기 좋게 매치되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는 자칫 작은 손짓이라도 했다간 흠이 날듯 매끄러웠고, 칠판을 주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잘 닦아놓은 유리마냥 반짝였다.
더군다나 창가에서 비치는 아침햇살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신성하다는 느낌까지 가져다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와 대각선 위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딱히 고개를 돌려 쳐다 볼 필요도 없었고,
내 뒤로 아무 자리도 없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때 나는 그 어느 그림을 그릴 때보다 한 획 한 획 신중하게 그었지 않았나 싶다.

수십 번을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해서 5교시가 끝나 갈쯤에 그녀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녀석이 다가와 뭘 그리고 있냐며 슬쩍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인물의 구도만 잡은 기본 스케치 단계라 딱히 누가 보더라도 콕 집어 그녀, 한세연이라고 알아챌 수는 없었다.
녀석도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1학년 때부터 알고 있는지라
'이 녀석, 언제나처럼 또 무언가를 그리고 있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다행히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그리는 기분 나쁜 녀석으로 몰릴 일은 없었다.

그림은 꽤나 선전했다.
처음 그린 인물화 치고는 꽤나 완성도가 높았다.
비록 상채뿐이지만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린 것 치고는 꽤나 만족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바람이 불면 그림 속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흩날릴 것만 같았고,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대면 왠지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노트를 꺼냈을 때 나는 몇 분이고 그 그림을 펼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노트 속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얕은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 나쁘니까 그만두세요.」

나는 순간 놀라 흠칫했다.
어디선가 들릴 리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평소와 다름없는 내 방 풍경뿐, 한지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내 판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녀의 목소리가 곧 다시 들려왔다.

「허둥대지 마세요. 이쪽이에요.」

믿기지 않겠지만 소리가 들려온 곳은 손에 들려 있는 스프링노트 쪽이었다.
그림 속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원래 내가 그린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지금은 그녀의 새까만 동공이 똑바로 내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 속에 그려져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노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누군가 보면 미친사람 취급할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내 방이고 아무도 없으니까.


「네가 말을 한 거야?」

조금 웃기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손에 들린 노트에게 말을 건네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림 속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 떨어진 노트는 펼쳐져 있는 상태 그대로 떨어져 바닥을 덮었다.
그리고는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무슨 짓인가요? 어서 일으켜 세워주세요.」

바닥에 떨어진 노트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째서 노트 속에 그려진 그림과 회화가 성립하는지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것보다 거실에 있는 엄마가 이 녀석의 목소리를 듣고 덜컥 방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겁이 났다.
나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그 후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트를 주워들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세요.」

청순하고 활기찬 현실의 한세연（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그녀라면 왠지 그런 성격일 것만 같았다.）과는 다르게 그림 속의 한세연은 도도한 녀석이었다.
그림 주제에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그녀의 입에 마스크를 그려 넣을까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그랬다간 모처럼 잘 그린 내 그림이 망쳐질까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너는 뭐야?」라고 나는 노트에 대고 말했다.


「그런 걸 왜 물어보시는 거죠? 저를 그린 건 바로 당신이잖아요?」

그러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생동감 있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펼쳐져 있는 노트를 접어 책상 위에 얹어 놓고（이때 또 그녀가 무어라 말하는 것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침대에 누웠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나는 학교에서 거의 하루 종일 그녀, 한세연의 그림을 그렸고 그림 그리는 것에 너무 몰두해 뇌가 피로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식적인 선에서는 그림이 내게 말을 걸리는 없지 않은가?
아마도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내가 만들어낸 망상이다. 환각인 것이다.
그렇게 머릿속에 수없이 되뇌다보니 나는 어느새 잠에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