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스리슬쩍 펌질해놓고 튀기 신공!（r-_-）r

흐흣 TREMOR님의 새 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파일북 출간 이후 새로 쓰신 글들에 대해서는

펌질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기에 웃대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닷.

눈치빠른 분들껜 공포나 반전의 미학은 좀 덜할지도 몰겠으나

TREMOR님 특유의 흡인력 있는 어조로 여러분을 쪽*-_-*쪽 빨아들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마지막에 가선 왠지모를 찡한 감동마저 주시는군요.

百問而不如一讀!!!!!

직접 읽어보시지용...*-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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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의 문（cafe.daum.net/blacknovel）

작가 : TREMOR



불펌금지









'방금 뭐라고 했니?'


선미는 내 등 뒤에 서서, 화장대 거울 속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겨우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아무 말도.'



선미는 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거울 속에는 다시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분명히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정말 선미는 알 수 없는 아이다. 태어나서부터

여태까지, 16년 동안 함께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처음 선미를 낳아서 얼굴을 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보통 갓난 아기들은 정말로 징그럽게 생겼다. 마치 핏물에 젖은 듯

붉은 색이 번져나는 축축한 피부는 온통 주름 투성이에다가, 부어오른

눈을 뜨지도 못한다.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된 몇 몇 친구들의 아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갓난 아기가 얼마나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친구들 앞에서는 '너무 예뻐'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해주었지만 그건 그냥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아기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예상보다 심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을 정도다. 그런데 간호사의 팔에 안겨 선미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미는 예뻤다!



선미의 피부는 보송보송했고, 검붉은 색이 아니라 흰색에 가까운 연한

핑크색이었다. 나는 갓난 아기가 그런 색깔의 피부를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 통통한 얼굴에는 주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선미의 눈이었다. 선미도

다른 아기들처럼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눈두덩은 전혀 부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곤히 잠든 것처럼 평화롭게 감긴 눈이었다.



나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선미의 얼굴에 놀라서, 팔을 내밀고 있는

간호사로부터 아기를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까지 잊고 있었다.

그러자, 그 순간 선미가 눈을 떴다. 내 인생에 그토록 경이로운 순간은

없었다. 선미의 눈동자는 정말로 새까만 색이었고,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나는 가장 깊숙하고 순수한 우주와 마주 보고 있었다.



선미는 얌전한 아이였다. 때로 울기도 했지만, 나나 남편이 짜증스러울

만큼 울어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은 아프기도 했지만, 내 가슴이

타들어 가도록 심하게 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기를 키우는

일이 이토록 수월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랐다. 말했지만, 몇 몇 친구들

은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되었었고 나는 그들이 아기를 키우는 모습을 봐

왔으며 그래서 그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운지 잘 알고 있었다. 심

지어 전부터 심약했던 한 친구는 산후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정신과를

찾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선미는 그런 과정들이 마치 전혀 다른 종족들

의 일인 양 착하고 편하게 자라주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선미는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속상한 일이 없는 만큼, 왁자지껄한 에피소드들도 없었다.

가끔은 우리 집에 어린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이는 낯을 많이 가렸다. 한창 낯가림이 심한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그랬다. 선미는 사람을 겁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선미가 네 살 무렵

인가, 시어머니의 사촌언니 되시는 분께서 시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인상도 좋으시고, 연세에 비해 기력도 좋으셨다. 호

탕하게 웃으시며 결혼식 이후 처음 보는 내게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셨

다.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으신 푸성귀와 과일들이었다.




당연한 순서로, 아이를 인사시키기 위해 불렀다. 그런데 선미는 그

할머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답지 않게 손발을 휘저으며

한사코 곁에 가기를 꺼렸다. 할머니는 물론이고, 어미인 내게 너무

난감한 상황이었다. 성격 좋으신 할머니는 '싫다는데 그만 되었다.'

고 웃어 넘기셨다. 나중에 아이에게 물었다.

너 아까 왜 그랬니? 그러자 선미는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할머니 얼굴, 무서워.



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할머니는 그래, 무섭게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평생 시골에서 흙과

햇빛을 벗삼아 살아오신 순박한 분이었고 그 착한 삶이 그대로 묻어

있는 평화로운 얼굴을 갖고 계셨다.




-그래도 그러면 안돼. 우리 딸은 착한 아이잖아. 어른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거야.



선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처음처럼 심하게 울고불고

발버둥을 치지는 않았지만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었다.

어린 것이 고집이 대단했다. 평소에는 고분고분하고 별로 말도 없는

아이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언제나 같은 대답뿐이었다. 얼굴이 무섭게 생겨서 싫다는

것이었다. 보기에 정말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 때로는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아이의 별스런 '미적 취향'에 대해 두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 벨소리에 내 회상은 끊어졌다. 액정화면에 '연주'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아직 집이야.'




-뭐야, 아직 집이야?


'이제 나갈거야.'




-아유, 기집애. 보나마나 너 꽃 단장 하느라고 여태 집이지?


'사돈 남말 하시네.'




연주야말로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안 봐도 뻔했다.

연주는 학교 다닐 때부터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 연주가 20년 만에 하는 동창회에 나갈 준비를 대충 했을 리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며칠 전부터 피부 관리실까지 다니며 각별히

준비를 했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 동창회 때문에 지금까지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암튼, 늦지 말구 와.


'지금 나갈거야. 준비 다 했어.'




-알았어, 그럼 이따 봐.


전화를 끊고 다시 화장대 거울을 쳐다보았다. 정성 들여 화장을 한

보람이 있어 피부상태며 색조의 표현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들 신경 써서 나올 자리에서 내 화장이며 옷차림이 얼마나

돋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모임의 주인공이 되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화장대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화장품들을 모두 제 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핸드백 속에 휴대폰을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선미가 제 방 문앞에 서 있었다.


'엄마.'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응, 왜?'




'오늘 되게 예쁘네.'


'어, 그래?'




'응. 정말 예뻐요.'


'오늘 동창회잖니. 엄마가 신경 좀 썼다. 우리 딸이 예쁘다고 해주니까



기분 좋으네.'




나는 선미에게 웃어주었다. 정말로 선미가 예쁘다고 말해줘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럼, 엄마 다녀올게. 혹시 늦을지도 모르니까 저녁 챙겨 먹구.'




현관에 미리 꺼내놓은 구두 속으로 발을 넣으려는데 선미가 말했다.




'사랑해요, 엄마.'


나는 놀라서 선미를 쳐다보았다.




선미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들은 게 언제였지?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나? 너무 놀라서 '왜 그래, 어디 아프니?' 라고 대답할

뻔 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고 선미에게 다가가 아이처럼

코를 살짝 쥐었다.


'나도 사랑해, 우리 딸!'


나는 아이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서 나왔다. 나는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열고 나온 현관문을 다시 닫고, 손에 들고있던

열쇠로 잠근 다음 열쇠를 핸드백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

이 있는 지하 1층의 버튼을 눌렀다.


선미도 사춘기인가 보다. 다른 집 아이들은 오히려 부모에게 짜증을

부린다던데, 우리 선미는 정말이지 사춘기도 착하게 보내려는 게

틀림없다. 조금만 더 밝고 활달한 아이가 되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이것도 엄마의 욕심인걸까.


날씨가 무척 좋았다.

도로 위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넉넉했다. 오늘따라 길이 막히지

않아 운전이 즐거웠다.

약속 장소는 우리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다. 좀 멀긴 했지만,

맛있는 생갈비와 넉넉한 공간으로 이런 종류의 모임에는 이름난

집이었다.


20년만의 동창회...... 다들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 중 너댓

명과는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대부분 연락을 한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 모두들 바쁘게 자신들의 삶을 꾸려왔을 것이다.



행복한 친구들도 있을 거고, 또 더러는 인생의 풍파에 지친 친구들도

있겠지. 중소기업 부장으로 착실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과,

큰 말썽 부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준 열 여섯 살의 딸을 가진 나의

인생은, 그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소형이라도

이렇게 자동차도 한 대 있고, 25평형 아파트도 한 채 있다.

만약을 대비해 가족들의 이름으로 된 보험도 필요한 만큼 들어있고,



내년이면 또 5천만원 짜리 적금을 탄다. 이만하면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잘한 사건들은 나의 인생에도 있었다. 5년쯤 전에 남편이

거래처 여직원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했고,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2년 전에는 시어머니가 유방암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이 성공적이라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신다.

그리고 내 딸 선미. 선미의 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남들에게 공부 잘한다고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그저 선미가 지금처럼 착하게만 자라주면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교통 방송 라디오 채널을 끄고 CD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슨 CD를 넣어뒀는지 확인도 안하고 그냥 눌렀는데 최근에 나온

재즈 음반이었다. 우리 나라 가수들의 노래를 영어 가사와 재즈

리듬으로 편곡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으로 만들어낸 것인데,

신선하기도 하거니와 그 분위기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선미에게

이야기했더니 소리바다인지 하는 것으로 다운을 받아 CD를 구워주었다.



지난 주에 시댁에 갈 때 들으려고 차에 가져다 둔 기억이 났다.

조용한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들떴던 기분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휘어지는 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이제 3년째 접어드는 우리 차는 길이 잘 들어있었다. 여태껏 사소한

접촉 사고 한 번 난 적이 없었다.

그 때, 음악이 중간에 뚝 끊어졌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오디오

쪽으로 내렸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주 오던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내게로 돌진하는 모습을.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눈 앞이 새까매졌다. 암흑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빛 이라는 것이 아예 사라져

버린 듯이 어둠 뿐이었다.

나는 사고를 당했다. 이건 교통사고다. 그것도 심각한 교통사고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아까, 집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화장을 거의 다 했을 무렵에,

눈두덩에 돋은 눈썹 한 올이 보였었다..... 분명 화장을 시작하기 전에

정리를 했는데 미처 한 올이 면도기의 칼날을 비껴간 모양이었다.



나는 족집게를 들어 그 눈썹을 뽑았다. 그리고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또 무언가 내가 놓친 것이 있는가 하고.

아무리 화장을 잘 했더라도, 때로는 작은 흐트러짐 하나가 얼굴 전체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 오늘만큼은 나는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20년만의 동창회니까...... 선미가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아이는 등 뒤로 다가왔고, 나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선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잔뜩 신경을 집중해서 얼굴에 있을지도

모를 '티'를 찾느라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고, 그리고

이마를 조금 찡그렸다. 그래, 분명히 이마를 조금 찡그렸다.

누군가 본다면, 그 표정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자연 반사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만한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저 화장이 완벽하게 되었는가 점검해보려는 것 뿐이었지만,

방금 방에 들어온 선미가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거꾸로 치솟아온다. 나는 컥, 하고 기침을 했다.

보통 때 하는 기침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로 기침을 하자, 속에서

치솟아온 끈적한 것이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난다.

끈적하고, 그리고 뜨겁다. 그런데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선미는 내 등 뒤에 있는 안방의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었다.

선미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학교가 일찍 끝났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때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교복을 입은 선미는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선미가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볼 때, 그래, 같은 순간이었다......

내가 이마를 조금 찡그렸던 것과 선미가 내 얼굴에 시선을 두었던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같은,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래, 그랬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갑자기

커졌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어서 나는 아이의 눈동자가 커진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거기다 나는 다른 것을 보느라 바빴으니까

말이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천천히, 천천히

떠오른다. 오늘 오후의 일들이, 발 끝에서부터 번져오는 차가운 느낌과

함께 천천히, 천천히 떠오른다. 뱃속은 타는 것처럼 뜨거운데, 발끝은

마치 얼음물에 담그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기침을 하자, 목구멍이

뒤틀린다.


나는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오늘 오후의 내 모습을 본다.



나는 화장대에 앉아있고, 선미는, 내 딸은 내 등뒤에 서 있다.

아이의 눈동자가 커진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보인다.

아이가 입을 열어 말한다.


-봤어?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내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아이의 눈동자에 물기가 돈다.

아이는 주먹을 꼭 쥔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앉은 내게는 아이의 꼭

쥔 손이 보이지 않는다.


-응? 방금 뭐라고 했니?


나는 아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묻는다. 아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겨우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아무 말도.


아이는 돌아서 방을 나가버린다. 아이는 엄마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다. 아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이가 그것을

말해준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아이는 제 방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이제 온 몸이 얼음물 속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든다.



얼음물이 머릿속까지 들어찼다. 타는 듯, 또는 헤집는 듯하던 뱃속의

통증도 이제 어렴풋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사고를

당했다.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나는 죽어가고 있다. 아마 곧

숨이 끊어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떠나기엔 내 생에는 아쉬운 것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능한 한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다만, 선미. 내 딸 선미.

그 애는 내게 '봤어?' 라고 물었다.

나는 못 봤다.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그저 화장을 마친

내 얼굴 뿐이었다. 설령, 내가 아이의 '봤어?'라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나는 '뭘?'하고 역시 무심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죽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죽어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게 죽음이 다가온 지금, 내가

궁금해했던 모든 일들의 해답이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중에......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진실이 있다.



아주 조그만 선미의 모습이 보인다. 아장아장 걷다가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흉내낸다. 젊은 나의 모습도 보인다. 산후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처녀 때처럼 날씬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다. 잘생긴 남편의 모습도

보인다. 일요일인가 보다. 우리는 가족 나들이를 나선다. 아직 차가

없을 때다. 우리는 아기를 안고 버스에 탄다. 호기심 많은 아기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세상의 풍경을 담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버스에

이상한 사람이 타고 있다. 입은 옷과 머리모양으로 봐선 마흔 안팎정도

되어보이는 아주머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이상하다. 마치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같다. 검은 색도 보통 검은 색이 아니라 아주

불길해 보이는 새까만 색이다. 마치 장례식에나 어울릴, 그런 검은 색

가면을 쓰고 있다. 아기의 눈동자가 커진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아기가

타자마자 버스에서 내린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려다 겨우 그만둔다.




선미는 자랐다. 이제 네 살이다. 제법 말도 할 수 있다.

할머니가 놀러 오셨다. 선미는 할머니를 좋아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처음 보는 낯선 할머니와 함께 오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도 언젠가

버스에서 보았던 아주머니가 쓰고 있던 것과 똑같은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 똑같은 가면이다. 똑같은 불길함을 간직한 똑같은 검은 색의 가

면이다. 선미는 이제 그것에게서 풍겨 나오는 싸늘한 기운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엄마가 선미를 그 무서운 가면을 쓰고 있는 할머니에게

자꾸만 민다. 할머니는 선미를 안으려고 벌써 팔까지 활짝 벌리고 있

다. 선미는 울음을 터뜨리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달아나려고 한다. 할

머니의 얼굴이 너무 무섭다. 할머니가 얼굴에 덮어쓰고 있는 가면이 너

무 무섭다. 선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절대로 가까이 가고 싶

지 않다. 선미가 너무 울어대니까 다행히 엄마가 방에 데려다 주었다.


-너 아까 왜 그랬니?


무서운 할머니가 가버린 후에, 엄마가 묻는다. 선미는 울어서 퉁퉁 부

은 눈으로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엄마가 자꾸 물으니까 대답을 해야한

다. 하지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할머니 얼굴, 무서워.


그것이 선미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다.

나는 봤다.

선미가 내게 물었던 그것. '봤어?' 라고 물었던 그것을 나는 봤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선미가 내게 물었던 그것을, 나는 분명하게 보았

다. 다만 집에서가 아니었다. 선미가 내게 그 질문을 했을 때는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내가 그것을 본 것은 조금 전이었다. 중앙선을

넘어 미친 듯이 달려온 트럭이 내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을 때, 충격

으로 떨어진 룸미러에 단 한 순간, 비친 내 얼굴을 나는 보았다. 그리

고 내 얼굴에 덧씌워진 그 무시무시한 것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검은 가면이었다. 선미가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똑같은 검은 가

면이었다. 그것이 내 얼굴 위에 있었다. 선미는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선미가 어떻게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는지는 모르겠

다. 중요한 것은, 선미가 이미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라

면서 자연스럽게, 선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검은 가

면을 쓴 사람들......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 무서운 가면은,

바로 '죽음'이었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가신 지 일주일 만에, 시어머니의 사촌언니였던 그

할머니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꽤나 먼 장

례식장에까지 갔었다. 물론, 며칠 전 선미의 '할머니 얼굴, 무서워' 라

는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이제서야...... 나는, 너무 늦게...... 아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어린 선미에게 그 특별한 능력이 얼마나 무섭고 부담스러웠을까.

단지 그 가면의 기괴한 얼굴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버텨내기 힘들었을

텐데. 혼자서 그 깊은 공포를 감당하다니...... 걸어가는 어린 선미가

보인다. 아이다운 천진함은 공포에 스러지고, 그 자리를 천천히 체념이

메꾸어 간다. 그런데도 엄마란 여자는, 그것이 단지 아이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저 조금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일 뿐이라고, 엄마라는 여자는 그렇게 쉽게 생각해 버린다.




아이는 깨닫는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주어진 이 능력에 저항할 수 없다

는 것을. 그리고 더불어, 예정된 죽음을 바꿀 길 또한 없다는 것도.

불쌍한 선미. 불쌍한 내 딸.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외로

웠을까.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긴 시간을 외롭게 살아가야 할

까...... 이제서야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지만 이제 엄마에

겐 더 이상 함께 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구나.

하지만, 선미야, 엄마는 니가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제 엄마의 얼굴에

서 그것을 보고서도 다만 주먹을 꼭 쥐는 것으로 버텨낸 너의 강인함을

믿는다.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사랑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던

너의 의연함을 믿는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이 너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하지만 너라면,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거라고 엄마는

믿는다. 그리고...... 그리고 무심했던 엄마를, 부족했던 엄마를 용서

해 줄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 모든 일들은 신의 의지일 것이고,

우리가 그 분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을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어떤 옳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보자꾸나.




너무 졸립다. 나는 이제 좀 자야겠다. 이제 잠들 시간이 온 것 같다.


아마도 무척 긴 잠이 되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