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쿠라는 2007년 1월 k12kb님이 웃대 공포게시판에 쓰신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를 읽고 살을 더 붙여보고 싶어 리메이크를 시도한 이야기입니다. 워낙 괜찮은 소설인데다가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이야기인 만큼 아는 분들도 많겠지만 여러 다른 이야기를 추가하여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자 하는게 제 목표입니다.
부디 재밌게 즐겨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께 - 원작을 읽는 것은 이 이야기의 재미를 저하시킬 수도 있으니 이 이야기를 계속 읽고자 하신다면 원작을 읽는 것은 잠시 뒤로 미뤄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2017년과 2034년,
두 차례에 걸쳐 고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리고
그 문이 닫힌 뒤의 지구는 지옥감옥이 된다.
 
- 마술사, 포머 -
 
 
 
 
 
세상에서 가장 힘든게 뭔지 알아?
사법고시? 대통령?
자살?
아니, 바로 대오각성이야.
다른 말로 득도라고도 하지.
그래, 결정했어! 난 불교를 공부할 거야.
 
 
 "영민씨, 무슨 생각해? 멍하니..."
영민은 문뜩 정신을 차렸다. 뜬금없이 옛날 일이 떠오른 것은 오늘 있을 동창회 때문에 잔뜩 들떠있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매년 있어왔지만 그동안엔 일이 바빠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는 제법 경력이 쌓인 노련한 형사였다. 경찰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마음에 품고있던 꿈이었고 그렇기에 오랫동안 미리 착실하게 준비했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 바로 합격할 수 있었다.
처음엔 어리버리한 순경이었지만 어디든 어리버리하지 않은 신입이 어디 있으랴.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상사와 동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강력계로 발령이 난 뒤로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러 사건들을 신나게 해치우며 다시 한 번 능력을 인증했다. 시험을 봐서 진급하는게 아니라면 보통 순경에서 경장을 거쳐 경사가 되는데까지 7~8년은 걸리고, 능력이나 운과 환경에 따라 10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는 경장이 아니라 경위까지 채 10년도 걸리지 않는 고속진급을 이뤄내 비간부 출신 서장 정도는 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그 여자 생각하는 거야? 너무 신경쓰지 마. 상부 지시인데 어쩌겠어."
그 여자란 요 근래 그를 끊임 없이 괴롭히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물론 만난 적은 커녕 뭔가 직접 연관된 선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니 연애감정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 뭐... 제가 말씀 안드렸나요? 조사 허가 받아왔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을 직접 추려내 보라는데 그 생각중이었죠."
"그래? 영민씨가 직접 움직이니 이젠 붉은 사쿠라도 끝장이구만!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영민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그를 괴롭히고 있는 여자, 붉은 사쿠라에 대한 생각으로...
 
 
그 날 늦은 저녁. 퇴근 후 영민은 곧장 시내의 한 술집으로 향했다.
이미 눈에 익은 사람들이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있었다.
"어째 니들은 변한게 없냐?? 여전히 개념이 없구만..흐흐"
"새끼 졸업하고 처음 나온 놈이 누군데 큰소리야!!"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영민이 큰소리로 떠들었다.
"오늘 먹고 죽자!! 야 다들 잔 채워!!"
"크크.. 이리 좋아할 놈이 왜 코빼기도 안 비췄담.."
"알잖냐.. 내 일이 좀 그렇잖아.."
영민이 원샷을 외치자 모두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어느새 얼큰하게 취한 민수가 영민에게 물었다.
"근데 너 또 진급 했다며?"
"그래... 야! 진급 기념으로 오늘은 내가 다 쏜다! 마음껏 마셔, 마음껏 마셔."
 
한 시간쯤 지났을까.
모두가 기분좋게 취해 있는 그 때 누군가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둘러 본 뒤 곧장 일행쪽으로 걸어왔는데, 수염이 덥수룩 한 것이 예사 풍모가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영민이 가장 빨리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 다가섰다.
"야... 너, 너 기원이지? 반갑다 야."
기원과 영민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절친이었다. 영민은 기원을 한 번 꽉 안았다. 그리고 영민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의 친구들도 기원을 제대로 알아봤다. 수염 때문에 잠시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 기원의 미남형 얼굴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영민도 길에서 마주쳤으면 못 알아볼뻔했다. 아마 가장 빨리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오전에 기원과의 대화가 기억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하...이런 것도 형사의 감이라는 것인가'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영민은 기원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졸업 후 동창회가 아니더라도 친구들 사이의 교류는 있어왔고 오히려 동창회는 한 번도 안나오면서 여러 친구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따로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민도 사실 그런 부류였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 불교를 공부하겠다며 떠난 기원과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 찾아가도 가출을 했다고 하질 않나... 스카이도 노려볼 수 있을 성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겠다고 한 것도 정말 의외였지만 그렇게 사교적이고 활발했던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불교과 갔다더니 그 후로 감감무소식이야. 나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그러게... 짜식이 살았으면 살았다 죽었으면 죽었다 얘기는 하고 살아야할 거 아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기원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햐 이 자식 완전 도사가 다 됐네. 먹고 살만 하냐?"
창수가 물었다.
"굶지는 않아, 내 명대로 사는데 지장은 없지."
"세상 참 재밌구나... 니가 스님이 되다니...."
"그래 기원이 너는 판검사가 어울렸는데 말야.."
기원은 빙긋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자 다들 한잔 하자.. 원샷 안하면 수명 10년 단축이다!!"
"오케이!!"
 
오래간만에 등장한 영민과 기원 때문인지 술자리는 한껏 달아올랐고 그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 한다며 하나둘 흩어져 이윽고 자리엔 기원과 영민만이 남아있었다.
"너 앞으로 뭐할거야?"
"날이 밝으면 산에 들어갈 거야."
"산이라... 넌 좋겠다. 마음만은 편하겠네."
영민이 부러운 듯 기원을 바라보았다.
"무슨 고민 있나 본데 말해봐."
"고민은 무슨... 됐다, 그보다 대체 그간 어디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나 좀 얘기해봐. 애들 얘기만 들으면서 자기 얘긴 하나도 안하는 건 치사하지 않냐?"
영민은 이런 기분 좋은 날까지 붉은 사쿠라에 대한 생각 따윈 떠올리지 말자고 다짐하며 화제를 돌렸다.
"재밌는 얘깃거리가 될만한 일 같은 건 없었어. 그간 모아뒀던 돈이랑 또 간간히 막노동 같은 알바를 하면서 이곳 저곳 절과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불교에 대해 공부했고 저명한 스님들이 쓰신 책들도 사서 읽고.. 그런 거지."
기원은 그렇게 자신이 처음으로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 기원은 고3을 앞에 두고 마지막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방학 내내 때론 친구들과, 때론 혼자 여행을 다니며 많은 곳을 둘러보고ㅡ 다녀봤지만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갑갑해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진주시에 있을 때, 이젠 슬슬 집에 돌아가야겠다며 터미널로 향해 가던 와중 한 플래카드를 보았다. 진주시 옆에 있는 고성군의 한 절에서 저명한 스님이 설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스님의 설법은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것 만큼이나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옆 도시에 까지 플래카드를 붙여놓을 정도로 유명한 스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왠지 기원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때 친구들중엔 영민도 있었는데 기원은 할 일이 생겼다며 친구들을 모두 보내고 그 절에 한 번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터미널에서 기원의 친구들은 서울행을, 기원은 고성행을 끊고 헤어지게 되었다.
 
역시나랄까. 절은 산중턱에 있었다. 하지만 절 안은 물론 바깥까지 인파가 가득했다. 마치 큰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절 밖에도 의자들이 꽤나 많이 놓여져 있었고 바깥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도 준비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소한 이름의 케이블 방송국들이지만 두세 개 방송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카메라들과 작업복의 사람들도 보였다. 기원의 예상대로 유명해도 여간 유명한게 아닌 것 같았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인파의 반 이상이 20대에서 40대로 보였기에 아직 대한민국의 불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님은 큰 키와 건장한 체격에 강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기원은 어렸을 때 다닌 검도 도장의 사범이 떠올라 실소를 지었다.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스님이 입을 열어 처음 내뱉은 말은 기원의 인생을 바꿔놓을 시발점이 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고.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불법을 만나기는 더 힘들고.
불법을 만나더라도 제대로 된 설법을 듣긴 더 힘들고.
제대로 된 설법을 듣더라도 노력하여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기원은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에 둔탁한 둔기로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고 가슴에 쌓여있던 뭔가가 한 번에 폭발하듯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거였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땅 끝 밑자락 촌동네의 산 위에 있었다!
 
"이렇듯 여러분들께서 지금 이 자리에 오시게 된 것은 천운에 천운이 겹쳐져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인생 이전에 지난 인생, 그 지난 인생, 또 그 지난 인생에서 수없이 쌓아온 선업 덕분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생에서는 끊임 없이 정진하여 진리를 깨우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스님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나누었던 대화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교리를 설파했다. 가능한한 어려운 단어들 대신 일상적으로 잘 쓰이는 어휘들로 풀어서 설명을 했고 딱히 대체할만한 어휘가 없는 경우엔 곧바로 다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해주었다. 스님의 노력 덕에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종교라는 것 밖에 없었던 기원도 이해하는데 별 무리는 없었다. 
 
그 날 기원은 영적 충만감을 느꼈다. 진리에 아주 조금 다가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좀 더 알고싶다! 좀 더 깨우치고 싶다!
 
이후 기원은 닥치는 대로 불교 관련 서적들을 사들였다. 그의 부모님은 불교에 대해선 무지했지만 『무소유』나 『산은 산 물은 물』처럼 불교 서적중에서도 높은 평판을 받는 베스트셀러들이 제법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처음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빈도가 점점 짧아지고 양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자 한 번은 그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고 그 날 기원이 한 말에 그의 부모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 절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아니,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남 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남 부럽지 않게 키워온 아들-그것도 독남이 스님이라니. 그의 부모님은 둘 모두 세계를 호령하는 반도체 기업의 임원이었고 원래대로라면 그들의 아들은 이제 일류 명문대에 진학하고 엘리트코스를 밟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스님이라니?
한동안 이 문제로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들의 싸움은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으며 결국 그 갈등은 고교 졸업을 앞둔 기원의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끝맺어졌다.
 
 
이후의 생활은 기원에게 있어온 그 1년의 반복이었다. 그야말로 별거 없었다. 유명한 스님들이 설법을 한다면 어김없이 찾아갔고, 그렇기에 지역을 오가며 단기 일자리를 구할 수 밖에 없었으며 단기간으로 일자리를 내주는 곳은 막노동 일 뿐이었다. 그리고 돈이 조금이라도 남는 경우엔 어김 없이 책을 샀다. 그렇게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여 지내온 시간이 10년이라는 것이었다.
 
"햐..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네. 그럼 그동안 부모님은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거야?"
영민의 물음에 기원은 씁쓸한 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너 산에 올라가는 건 좀 미뤄두고 부모님 좀 찾아뵈라. 아니다, 이 짜식 가만 놔두면 그냥 산으로 들어가버릴 것 같으니까 나랑 같이 가자."
"지금? 넌 출근 안해도 돼?"
"괜찮아 괜찮아 휴가 내고 왔다!"
"아니... 오늘은 너무 늦었고."
영민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카운터에 가 계산을 끝마친 뒤 기원의 팔을 붙잡고 끌고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기원의 발걸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웠다. 지난 세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땐 불교에 매료되어 있었고 영적인 지식에 목말라 있었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고, 다시 그 상황이 닥친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단 한 번의 연락조차 하지 않아야만 했는가 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 왜 찾아왔냐고, 당신들에겐 아들같은 건 없다고 화를 내며 쫓아내시지는 않을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까. 아마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리 속이 하얗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되고 눈물부터 나올 것 같았다.
 
일단 기원은 미래의 일은 미래에 하고 지금은 당장 자신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기로 했다.
"너 음주운전 하다가 사고 내는 거 아냐? 민중의 지팡이라는 애가 음주운전이라니 세상 말세다, 말세."
 
 
 
저 멀리 기원의 집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그 집이 아니라 한 여성에게 향했다. 160? 165?정도 되는 키에 붉게 염색한 단발 머리의 여성이 새빨간 색의 정통 기모노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이 모은 채 느리게 걷고 있었고 그 뒤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보이는 꼬마가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가장 독특한 점은 둘 모두 놀이용으로 보이는 여우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오직 편의점의 불빛만 밝혀져 있고 차도, 사람도 없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그 여우가면을 쓴 두 사람의 모습이 더해지자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영민과 기원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기원의 집으로 향했다.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사회에선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기원의 집에 도착한 뒤에도 영민은 기원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겠다며 고집을 피웠기에 다 도착한 뒤에도 고민하던 기원은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하긴, 새벽이니까. 주무시는 거겠지.
문이 열려있었다.
잠그는 것을 깜빡 잊은 것인가.
 
집안에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불쾌한 느낌이 든다. 불안하다. 기원은 재빨리 불을 켜고 부모님을 찾는다.
그의 부모님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전엔 없던 잔주름이 조금 보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단 한 가지의 상황만 없었다면 기원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은 그럴 수 없다.
식탁에 앉아있는 부모님들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려 이미 바닥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기원은 그제서야 피냄새를 느낀다. 불안함의 정체를 마주한 기원은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기원은 재빨리 전화로 달려가 119와 112에 신고를 하고 멍하니 서있다가 다시 식탁으로 향한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
 
현장보존 같은 것은 머리 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다가간다. 그러자 아까는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식탁 위의 종이와 칼... 칼은 그렇다 치고 종이는? 기원은 서서히 그 종이를 쥐어 들어 적힌 것을 읽어본다.
 
아마 유서 같은 거겠지....
 
 
붉은 사쿠라에게 구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