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제 끝이야……”

그가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을 부르르 떨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그 늙은이의 모습은 끔찍하다 못해 세상의 모든 재앙을 한 몸에 모아 놓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모습은 사방에 널려있는 사정없이 잘려나간, 혹은 갈려버린 참혹한 몸뚱이들이 나뒹굴고 있는 광경에 비하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어이, 영감. 뭘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야?”

전에는 보이지 않던 혈색이 붉은 녀석의 말이었다. 허세가 가득한 말투였지만 그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 그 누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이봐 젊은이.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나……”
“한 5분 정도 됐수다. 한눈에 봐도 그리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지만, 아직 제대로 접수가 안 돼서 말이야.”

가여운 늙은이의 자조 섞인 물음에 붉은 혈색의 사나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동안 자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그 어떤 곳보다도 절망적인 장소라네.”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고만 영감. 난 지옥 같은 곳을 수도 없이 거쳐온 몸이라고. 좀 더 그럴싸한 말을 해야 내가 움찔거리기라도 하지 않겠어?”

딱 보아도 거친 삶을 살아온 녀석임을 알 수 있었지만, 내뱉은 말에 과장된 면이 있었음은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붉은 혈색이 한층 붉어지는 것으로 보아, 처참한 몰골의 늙은이가 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숨 섞인 대답은 확실히 더 그럴싸했으리라. 아니 실제로 그러했다.

“차라리 지옥이라면 더 좋겠네…….”

실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음을 인정하겠다. 이미 이곳의 실상을 알고 있는 나였음에도 그 말은 새삼 공포스럽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해탈한 듯한 모습을 한 늙은이의 한마디에 주변은 얼어붙었으며 그 누구도 이 침묵을 깰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붉은 혈색의 사나이가 주변을 둘러보곤 호기롭게 소리쳤다.

“뭐야? 여긴 겁쟁이밖에 없는 건가? 지옥보다도 끔찍한 곳에 이런 놈들뿐이라니 이거 영 실망스럽네!”

그러나 그 공허한 외침은 분위기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었을 뿐 그 이상의 효과는 내지 못한 듯 했다. 이내 그는 나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여기가 도대체 어디길래 다들 저 난리야? 주변을 보니 대충 엄청난 곳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사실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자는 여기에 없다. 나도 보이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말을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진 것은 내 대답이 시원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리라.
이곳이 어디인지, 또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른다. 다만 매번 큰 종소리가 나면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괴수가 들어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피의 향연을 시작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우리를 집어 들어 몸을 갈아버리고 잘라버린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날리는 시체를 그저 온 몸으로 뒤집어 쓰고 있을 뿐이다. 괴수의 종류는 다양하며 그들의 목소리 역시 제 각각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그것을 언어로 본다면 말이다）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늘 변함이 없다. 괴수들의 잔혹한 시간（우리는 이렇게 부른다）은 매우 길며 다시 종이 울리면 그들은 이내 유유히 사라진다. 그 다음 종이 울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의 움직임은 변칙적이어서 잔혹한 시간이 아닌 그나마 평온한,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럿의 괴수들이 몰려와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다행히도 지금은 아닌 듯 하다.
내가 말을 마쳤을 때 붉은 혈색을 한 사나이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불쌍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곧 종이 울릴 거요. 그냥……”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큰 종소리가 울리며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칠 정도로 사무적인 표정의,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모습의 괴수가.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별안간 정적을 깨며 괴수는 선택 받은 불쌍한 몸뚱이 하나를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 곧 일어날 참혹한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지긋이 눈을 감았다. 괴수가 내는 괴이한 소리와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소리만이 지금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괴수가 낸 괴이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마 칠판에 글을 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진도 나가자”




-이미지 :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