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본문에 들어가기 전, 이 장편 소설은 제가 일전에 올린
글로리 메이든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aboard our glory maiden!）의 비하인드 스토리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씀으로서 여러분이 재밌게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소설은 노골적이고 잔인한 묘사가 있기 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들은 감상을 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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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24일.

알래스카.

백색의 고원 위로 펼쳐진 짙은 칠흑빛의 양탄자,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과 대자연의 오페라, 알래스카 오로라!

이 모든 것이 있는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티켓을 얻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했던 물품을 적어본다.

1. 예술에 안목은 없지만 있는 체 하고 싶은, 바가지 씌우기 딱 좋은 졸부.
2. 예술가로선 성공해 본 적 없는 비참한 인생의 재능 없는 화가.
3. 술. 아주 많이.

이 세 가지가 하늘의 도움과 함께, 판단을 흐리게 해줄 줄담배 연기와 연신 깜빡이는 전등이 있는 항구의 술집에서 만나면, 짜잔! 알래스카 행 크루즈 여행 티켓이 완성된다!
전날의 과음으로 깨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어젯밤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드디어 그림을 팔았다.
그것도 처음으로 그럴듯한 대가를 지불받음으로써.

예술가로서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비참하고 별 볼 일 없던 나, 제임스 하퍼는, 어제도 항구의 구석 술집에서 파인트 짜리 싸구려 술을 세 번째로 퍼마시면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기에 시작했다.

"화가이신가 봅니다."

중년의, 낮고 작지만 사람의 주의를 끄는 목소리였고,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자부터 왼손의 지팡이까지 강박적으로 흰색과 검은색 조합의 옷차림을 추구하는 남성이 서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반지조차 백금과 검은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이 술집에 술값 대신 그려준 그림들을 보고 말한 게 분명했다. 대단한 그림은 없었다. 그저 흰색, 흑색을 이용한 흑백 그림이 전부였다.

"그러는 그쪽은 인간 체스판이신가 보지?"

나는 킬킬대며 그렇게 대꾸했다. 물론 맨정신이었다면 이 자의 비위를 맞춰대며 어떻게 한 푼이라도 받아낼지 고민했겠지만, 난 술과 담배, 그리고 나 자신의 우울에 너무 취해있었다. 나는 다시 캔버스로 고개를 돌리며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남자는 내 말에 기분이 나쁠만도 했지만 짐짓 미소를 지으며 내 그림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도 검은색과 흰색을 상당히 좋아하나 봅니다. 이곳의 모든 그림을 흑백으로 그렸지 않습니까."

인정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어제 이 말을 듣자마자 드디어 나의 예술 세계를 알아봐 주는 자를 만났다고 느꼈었다.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두 검은 눈동자 안에는 술 취한 나를 마주 보는 또 다른나뿐이었다. 나는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두 눈의 이질감에 시선을 피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오. 형씨, 난 이 세상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 두 가지 색이 전부라고 생각하거든."

주변의 식탁에서는 날 보며 '또 시작이군' 등의 말을 지껄였지만, 중년의 남자는 계속 얘기하라며 꽤 비싼 술을 주문해 주었고, 나는 공짜 술을 마시며 한참을 내 그림과 철학에 대해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며 주절거렸지만, 그는 인내심 있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 . .이리하여 난 오직 그림에 두 색깔만 사용한다고!"

한참의 주정 끝에 내가 막을 내리자, 남자는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술을 대접해주었으니 공짜로 그림을 그려주겠다 했으나 그는 한 시코 거절했다. 너무 독한 술 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의 나머지는 뚜렷이 떠올릴 수 없는 엉킨 실타래였다.

얼핏 기억이 나는 것은 내가 그에게 그림을 그려주었고, 그는 내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다며 꽤 많은 돈과 이 알래스카 여행 티켓을 주었다.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대가로 얻은 것에 비하면 티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오늘 나는 아침 술집 바닥에 뺨을 맞대며 내 기억은 시작되었다. 내 그림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모두에게 한 잔씩 돌렸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주점 주인과 함께 말이다.




1921년 7월 3일.

칠흑 같은 어둠, 그 중심에는 나체의 내가 서 있다. 어둠이란 것은 기묘한 그것만의 생명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한 줌의 빛조차 없었지만 나는 내 주위의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허물없이 벌거벗은 맨피부에 다가오는 차가움과 형용할 수 없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불현듯, 이것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나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뱀처럼 그것은 내 몸을 옥죄기 시작했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시리도록 차가운 공포감이 느껴졌다. 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열자 마치 사냥감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는 이리떼처럼 그것은 내 벌어진 입에 자신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울컥거림과 함께 그것은 하수도를 따라 움직이는 시궁쥐처럼 내 몸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역한 털 짐승과 비릿한 물비린내와 같은 악취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점점 숨쉬기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코와 눈, 귀, 입 등 내 몸 모든 구멍으로 검은 구정물이 다시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얇은 초승달처럼 벌어지는 어둠이었다. 

놈은 웃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 그 좆 같은 꿈이다.
눈을 떴을 때의 나는 흠뻑 젖은 침대보를 부여잡은 채로 눈을 떴다. 알래스카로 향하는 크루즈에 오른 지 사흘이 지났고 공교롭게도 이 배를 탄 후부터 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난장판이다. 바닥에는 내 미술 기재들, 잉크, 물감에 잠식당한 듯 보이는 종이, 냅킨, 캔버스 심지어 어제부로 종이가 떨어져 찢어다 쓴 객실 커튼이 마치 사나운 알래스카 바다의 파도들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왜 안 되는 거지."

꿈에서 겪은 감정들은 소름 끼치게 강렬한 느낌이어서, 며칠째 그림으로 표현해보려 했지만 모두 수포가 되었다.

나는 내 답답함에 진절머리가 나 땀에 전 옷들을 허물 벗듯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 거울 속의 나는 마치 궁지에 몰린 야생동물의 그것이었다. 움푹 꺼져가는 두 눈, 푸석푸석해진 검은 머리, 그와 반대로 창백해진 피부와 점점 드러나는 늑골, 늘어진 뱃가죽과 흉측하게 늘어진 아랫부위를 가진 이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광인이 따로 없군."

나는 변기에 오줌을 눈 후 다시 탁자 앞으로가 이미 미적지근해진 진이 담긴 잔을 입으로 옮겼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자 나는 붓을 들고 찢어진 커튼 앞에 엎드렸다. 나는 천천히 붓을 움직였고 느낌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한참 후 내가 붓을 멈추고 나서야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부끄러운 듯 나체의 상반신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어깨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기묘하게도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이면서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지내온 여자들을 닮기도 했다. 베스? 제니? 아니면 에밀리아?

오, 에밀리아. 그녀를 생각하자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 다시금 솟아났다. 사랑? 애정? 슬픔, 아니면 배신감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주위의 사람들을 빛으로 가려버릴 듯한 사람이었다. 그녀 특유의 웃음이 생각났다. 덧니가 살짝 보이는, 화사한 빛과도 같은 웃음. 
해가 밝게 뜬 토요일 아침 먼지 쌓인 매트리스 위에서 나체의 자신이 그녀를 감싸 안은 채로 잠을 깨면 품 안에서 보여주던 미소가 떠올랐지만, 이내 그리웠던 감정은 비참함이 되었다. 그 비참함을 더욱 극대화했던 것은 더러운 짐승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어낸 다리 사이의 물건이었다.

"...씨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탁자에 놓인 검은 색 물감을 집어 들고는, 두 손으로 마구 비틀어버리기 시작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속의 물감들을 모두 커튼 위로 게워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잡아 커튼 위로 들이 붙기 시작했다. 비참함이 사라진 공허한 심장에는 분노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씨발 씨발 씨발!"

그림 속의 그녀는 점점 검정에 물들어갔지만, 뇌리에는 반대로 점차 선명해졌고, 선명해질수록 에밀리아를 닮아가자 나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를 내 머릿속에서 떨쳐내야 했다. 물감, 잉크 심지어 재떨이까지 커튼 위에 엎은 후 나는 붓으로 거칠게 난도질했다. 이미 그녀는 하나의 큰 어둠 덩어리가 되었으나, 나는 넘치는 분을 풀 물건이 필요했다. 이내 떨리는 손을 붓을 놓쳤지만 아귀를 벌린 사냥개처럼 또 다른 것을 붙잡았다.

"..씨발... 헉, 씨...발...헉.. 좆같은 년.."

나는 마치 광견처럼 숨을 몰아쉬며 용두질을 하기 시작했다.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찢어진 하얀 커튼 위로 무릎을 꿇은 체, 분노와 광기, 그리움과 배신감,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들끓어 오르는 성욕이 섞인, 인간 본질에 대한 환멸감을 일으킬 것 같은 행위였다.

ㅡ지미.

머릿속 한구석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애정이 어린 따뜻한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햇살 같은 목소리 아래, 마치 봄날의 바람같이 기분 좋은 웃음을 숨긴 목소리.

ㅡ지미?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어딘가 불안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내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배신자. 나를 버리고 떠나간 년.

ㅡ지미, 지금 뭐 하는ㅡ!

그녀의 목소리를 뒤따른 건, 뇌리를 강하게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 찰나의 순간이지만 에밀리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때린 것은 그가 들고 있던 빈 술병. 그녀의 머리에서는 때아닌 붉은 장미들이 피어나 창백한 눈밭을 물들였다.

"개 같은 년!"

내뱉은 저주의 말과 동시에, 온몸에 비릿한 쾌감과 피로가 몰려왔다. 하얀 백탁액을 남김없이 쏟아내고 나서야 만족한 듯 모든 분노와 감정이 가라앉았다. 곧 남은 것은 혐오감, 비참함,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그리움이었다. 곧 밀려오는 피로감에 나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나 자신을 혐오하면서.





ㅡ다음에 계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