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 지금 뭐라 했냐?”
평온한 목소리였다. 터질 듯한 분노도, 고통스런 배신감도 담기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
친구는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너 씨발 지금 뭐라 했냐고.”
떨리는 입가를 타고 욕설이 흘러나온다. 머릿속에서는 이 모든 게 끔직한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이 친구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미쳤냐?”
소주병을 던지지 않기 위해 입술 안쪽을 꽉 깨물어야 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듯이 바닥으로 시선을 모습에 더욱 더 화가 났다.
왜 그렇게 미안한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죄책감이란 게 있는 것처럼 그러고 있는 건데.
모든 비난을 감수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미친 새끼들.”
유독 이전과는 달리 깔끔해 보이는 방과 디퓨저.
조금씩 아귀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제발, 그냥 옛날부터 내 뒤에서 붙어먹었다고 말해.
그냥 둘이서 발정난지 오래 되어서, 아주 옛날부터 날 보면서 깔깔 거렸다고 말해.
차라리 그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으니까.
“네가….”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유정이랑 싸웠을 때부터.”
그의 말에, 순식간에 온 몸의 맥이 풀렸다. 손이 하얘지도록 쥐고 있던 소주병을 힘겹게 상 위에 올려놓았다.
결국, 모든 건 내 말실수 때문이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
원인은 내게 있었다.
아냐.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발단은 나였을지 몰라도, 그 후에는 니들끼리 붙어먹은 거잖아.
아니 최소한 아무리 니들이 불나방들처럼 영화같은 일생일대의 로맨스를 찍었다고 해도.
-야.
나를 조금만 배려해서라도, 내가 조금 정신을 추스른 뒤에 할 수 있는 거잖아.
-야!
쓰레기 새끼들. 금수 같은 새끼들.
죽여버릴거야.
“야!”
계속되는 부름에 나는 핏발 선 눈으로 증오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나를 부르는 건데.
난 지금,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식칼이라도 가져오고 싶은 심정인데.
네 새끼의 목에 칼을 박고, 그 년의 목에 칼을 박은 다음 내 목에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인데.
“너, 너 눈이….”
날 보는 그 새끼의 눈에 공포가 서린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짝에 생긴 이채에 입가를 이죽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씨발새끼야. 이제야 두렵냐?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셨던 술의 취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몸이 움직였다.
“나 간다.”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다.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새끼 역시 일어나 내 손목을 잡으려 하지만 뿌리친다. 단순히 뿌리쳤을 뿐인데 그의 몸이 휘청이며 바닥으로 넘어진다. 술병과 그릇이 바닥에 부딪혀 조각이 났다.
유리조각이나 밟고 콱 뒈져버렸으면.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의자와 그릇은 조각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옷장과 책상은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다.
서랍의 모든 내용물은 바닥에 쏟아져 있었고, 나는 미친 인간처럼 바닥에 엎드려 부적을 잡고 웃고 있었다.
행운을 가져다 줄 부적.
소원을 이루어줄 물건.
가냘픈 지푸라기 따위가 아닌, 그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원숭이의 손을.
꽤 오랫동안 방치된 먼지에 뒤덮인, 지저분하고 꺼림칙한 물건을 두 손으로 잡고 있을 때.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죽여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잔뜩 쉰 쇳소리로 나는 속삭였다.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은 웃고 있는 채로.
“내 여자친구를, 내 결혼을, 내 멀쩡한 삶을.”
씨발새끼. 옛날부터 끊어냈어야 했는데. 내가 너 유정이 좋아하는 걸 모를 줄 알았어?
“다 뺏어간 그 새끼를 죽여줘.”
옛날부터 유정이 주변을 얼쩡거렸을 때부터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소원을 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뚜, 뚜둑, 뚝-!
마치 뼈를 힘으로 억지로 부러뜨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원숭이의 손가락 중 하나가 기괴하게 움찔거리며,
천천히, 손바닥 안으로 그러모아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상황.
그걸 실제로 본 내 입가에는 광소가 걸렸다.
됐다.
과도한 감정 소모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밀려드는 졸음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어둠 속을 더듬는다. 손에 잡힌 휴대전화를 뒤집자 갑자기 들어온 밝은 빛이 눈을 찌른다.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 겨우겨우 화면에 적힌 글씨를 알아본다.
이제는 연락이 뜸한 대학 동기 중 하나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이내 전화를 받아 스피커폰으로 돌리며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짜냈다.
“…무슨 일이야.”
-….
대답이 들려오는 대신 들린 건 얕게 연기를 내뱉는 소리였다. 머리를 자욱하게 짓누르는 숙취와 어지러움에 짜증이 나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이거 말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는데,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한다.
잠시 침묵, 그리고-
-…유정이 혼수상태란다.
귓가를 통해 들어온 단어가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린다.
“우웁-”
목부터 끓어오르는 따가운 위산, 입안을 훑고 지나가는 역한 알코올의 향과 메스꺼운 토사물 냄새. 찰팍-! 하고 울려퍼지는 기분나쁜 소리.
어느새 떨어진지 모를 전화기 위로, 나는 한참의 구토를 해야 했다.
현기증이 피어오른다.
토사물로 범벅이 된 이불 위에서 한참을 게워내고 나서야,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입을 뚫고 나온다.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귓가에 들끓는 이명에 묻힌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내 눈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여전히 흉측한 몰골을 한, 말라비틀어진 짐승사체의 손가락은 토사물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3
이러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옷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모습으로, 변기에 걸터앉아 왼쪽 손목에 서슬 퍼런 날붙이를 가져다 대고.
체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이 내 눈을 강타했다.
그의 한 쪽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왔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짙게 배어있었다. 똑, 똑, 하고 차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뜨거운 물이 이미 가득 찬 욕조의 위에 가볍게 흔적을 남겼다.
곧 눈앞에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는 굳이 천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넌 뭔가 알고 있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직감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약하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알지, 이제야 이해했어. 지금 일어나는 게 무슨 일인지.“
그는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후련하다는 감정과 동시에 모든 걸 포기한 이의 홀가분한 미소가 너무나 흉측했다,
“숫자 삼, 다, 단순한 소원의 개수가 아니야. 알겠어?”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불규칙한 호흡과 함께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마구잡이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시작했지만, 나,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어. 악마는 영혼을 원해. 그것도 많이.”
그는 덜덜 떨며 검은색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 미안해. 너에게도, 유정이도. 하, 하지만 나도 속은 거야. 믿어줘.”
그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열렸다 닫히기 시작했다. 한 번씩 닫히고 열릴 때마다 눈동자가 계속해서 바뀐다. 짙은 갈색, 노란색 눈에 째진 동공, 다시 갈색, 다시 금수의 것으로.
나는 어딘가 고장나버린, 한 때는 친구였던 것의 얼굴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나, 난 못했어. 못 막았다고. 알아? 하지만 넌, 넌 성공했으면 좋겠어. 꼭 막아줘. 머, 머, 멈춰줘. 난 지옥에 떨어질 거야. 느낄 수 있어. 염소가 보여. 춤을 춰. 추, 춤을 추는 염소가.”
마치 신들린 영매처럼 무언가를 쏟아내던 몸의 떨림이 갑자기 멎더니, 그것은 천천히 변기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나를 지나쳐 지나간다.
내 시선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언제부터 흘러내렸는지 모를 검붉은 그림자만을 눈으로 쫒는다.
뒤에서 풍덩, 하고 무언가가 욕조 속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새빨간 파도의 파편이 내 등을 적시는 걸 느꼈지만,
감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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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