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일 오후,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좁은 방 안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일할 나이, 모두가 한창 일할 시간에 침상에 누운 젊은이라고 하면 병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청년은 평생 감기 한 번 걸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었으며 지금도 딱히 몸 어딘가가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청년은 단순히 일과 사람이 싫어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는 일종의 반백수였다.
나이 든 어른들은 공명심도 향상심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청년의 나태와 안이함을 꾸짖으며 혀를 찼을 것이나, 이미 절박함이나 진취성 따위의 단어는 조금만 일해도 최소 최저한의 의식주가 보장되는 풍족한 세상에선 귀퉁이가 다 헤진 양피지만큼이나 케케묵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청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띵동'
순식간에 7평 남짓한 좁은 원룸을 가득 채운 벨소리에 청년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마주하면 취업이니 안정이니 잔소리를 해대는 친구나 가족과는 이미 이 좁은 원룸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부터 연락을 끊고 살고 있었고, 적당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배달음식을 시켜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배달을 시킬때조차 선결제를 통해 가만히 두고 가라고 요청 사항을 적어왔기에 청년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초인종이 제 일을 한 적도, 이유도 없었다. 두 번째 벨소리가 울릴 때쯤 청년은 집주인일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월세가 밀린 것도 아니었다. 이어 세 번째 벨소리가 울렸을때, 청년은 마음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부모님이나 집주인 아줌마였다면 초인종만 누르지 않고 뭔가 용건을 말했을텐데, 계속해서 초인종만 누르고 있는걸 보니 집을 잘못 찾아온 배달부거나 포교활동을 다니는 신자겠지. 어느 쪽이든 구태여 나갈 이유가 없으니 그냥 모른척하고 있자.' 청년은 그렇게 결론짓고 바로 다시 드러누워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그 시선이 그대로 액정에 고정되는 일은 없었다. 시력 2.0에 가까운 그의 눈이 시선 바깥쪽에 확연히 들어온 낯선 미소를 선명히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청년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릴 정도로 크게 경련을 했고, 그 바람에 떨어진 휴대폰 모서리에 콧등을 직격당했다.
"아으윽..." 청년은 얼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그 손가락 틈으로 흘긋,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방을 확인해보았다.
꿈이나 허깨비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은 청년의 꽁트를 보고 한껏 유쾌해진 미소로 인해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니, 숨길 생각도 없는 듯한 쾌활한 목소리가 청년의 초라한 희망이 있던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왔다.
"누... 누굽니까, 당신. 어떻게 집 안에..." 청년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어떻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초라한 원룸에도 싸구려 도어락 정도는 구비되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방범장치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풀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청년은 이미 이런저런 영상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와 '왜'였다. 이미 아픔은 다 가신 후였지만 그대로 얼굴 전반을 손으로 가린채 청년은 조용히 상대방을 관찰해보았다. 촌스러운 중절모에 몸에 조금 꽉 끼는 듯한 양복, 반신을 지탱하는 지팡이까지 언뜻보면 찰리 채플린을 연상하게 하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 얼굴 사이사이에 길게 패여있는 주름이나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 사이사이에 섞인 하양이 그 내용물은 이미 초로를 훨씬 넘긴 노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노인이 왜 혼자 이런 곳에? 아니, 정말 혼자는 맞을까? 촌스러운 노인은 비둘기와 벤치만 있다면 어느 공원에서든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태연자약하게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와 제집인냥 행동하는 노인은 지극히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노인은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고, 밖에선 건장한 장정들이 노인의 신호에 따라 급습하기 위해 대기중일지도 몰라. 일종의 강도단인거지.' 제정신인 상태라면 듣자마자 웃어넘겼을만큼 터무니 없는 망상이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결과 청년이 도출해낼 수 있는 답은 이것뿐이었다.
"가... 강도짓을 하려는 거라면 번짓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저는 마땅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금도 하지 않아요. 보시다시피 그나마 여기서 돈으로 바꿀만한 거라곤 겉옷 몇 벌 정도가 다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미소를 유지한 채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과연, 말씀대로 별볼일없는 살림살이긴 하군요. 오히려 처분에 웃돈이 더 들어갈 정도입니다." 스스럼없이 공감하는 말에 청년은 조금 울컥했지만, 지금은 이 노인의 비위를 맞춰 어떻게든 상황을 잘 넘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죠?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집을 털어달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말인 것같아 청년은 뒷말을 삼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강도도 아니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패거리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할 수 있죠."
"네...? 그게 무슨..."
"당신의 눈에 제가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악마, 정령, 요정... 예전엔 산신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한 그런 존재지요.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청년은 눈을 끔뻑거리며 최대한 그 말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고, 상황이 돌아가는 맥락 전반이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려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그 산신령인지 요정인지 하는 대단한 분이 왜 여기에 나타난 겁니까?" 그 말에 노인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원입니다."
"소원?" 의외의 단어에 청년은 귀를 쫑긋했다.
"저는 본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진지하게 소원을 고민하고, 그 소원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것을 유흥으로 삼지요. 사람으로 치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취미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허어... 전부 이해는 못 하겠지만 대충 알아듣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인 건가요?"
"저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거기서 기쁨을 얻는 존재지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몇 십년에 한 번 정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딱히 소원에 엄격히 제한을 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단순히 우리와 같은 존재 본연의 규칙이라고 할까요. 그런만큼 그 기회를 더 값지게 쓰기 위해 인간 세상에 녹아들어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며 까다롭게 선별을 하는 부류도 있습니다만, 저같은 경우엔 어떤 인간이든 나름의 드라마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당신이 선택된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 청년은 아직까지 얼떨떨하긴 했지만, 노인의 눈빛에 웃음이 서려있긴 해도 농담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고, 단순히 치매가 든 노인이 도어락을 뚫고 순식간에 방 한가운데로 이동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어쩐지 전형적이고 청년의 사정에 맞게 술술 풀리는 이야기긴 했지만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청년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던 욕망의 뻘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이런저런 욕망의 찌꺼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여... 어떤 소원이 좋으십니까? 당연히 지구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거나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등 인지를 훨씬 벗어난 소원같은 경우엔 들어줄 수가 없지만, 웬만한 수준의 소원이라면 뭐든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쉬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돈에 대한 소원은 어떠신지요? 지금까지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것만한 소원이 없었지요. 금을 달라, 지폐를 달라, 등등 세부사항은 이래저래 다르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라... 확실히, 그것만한 소원이 없기는 하지. 나는 여자나 명예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능하면 돈 많은 백수로 사는게 한 평생 꿈이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청년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원래도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평소에도 이런 저런 고민에 많은 시간을 쏟는 편이었지만 이번 건은 스파게티냐 짜장면이냐 따위의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두 번 오지 않을 기회기에 제대로 생각을 해야 했다.
'돈을 받는 것은 좋지만 지폐는 안 돼. 악마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일련번호가 같은 지폐만 왕창 나와 허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하지. 만약 다르다고 하더라도 화폐 가치가 10년, 20년 후에도 동일할지는 알 수 없어. 특히 요즘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이래저래 경제적으로 많이 불안하니까... 한순간에 10억이 100원만도 못한 휴짓조각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야. 비슷한 이유로 동전도 NG겠지.' 하여 다음으로 청년은 지폐보다는 조금 더 실용성이 있을 것같은 물건들에 의식을 옮겼다.
'금이나 보석은 어떨까? 아무리 작은 크기라도 상당한 고가에 지폐보다는 훨씬 안정적이니까. ...아니야, 화폐 가치에 대한 생각을 하면 금이나 보석 역시 같은 문제를 공유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기술이 발달하면 그런 보석도 왕창 만들어낼 수 있게 될지 모르지. 최근에는 단돈 몇천원으로 진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냈다는 뉴스도 봤으니 분명 시간문제일거야. 거기에 보관이나 처분도 상당히 큰 문제다. 동전도 대량으로 환전하면 의심을 사기 마련인데 보석이나 금은 말할 것도 없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청년은 별안간 아주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를 가득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소원을 말씀드리기 전에, 혹여 소원의 대가로 영혼을 가져간다든가 하는 일은 없겠죠?"
"물론입니다. 저는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고 그 소원으로 일어나는 이런저런 해프닝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노인은 빙그레 웃었고, 청년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애초에 여기에 대해서는 진위여부의 판단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단순한 거짓말이라며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한 청년을 실컷 조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소원을 말하자마자 영혼이 뽑혀나갈 수도 있었다. 하여, 상식이 제대로 박힌 성실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국 노인의 꺼림칙한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나, 청년은 그 나이에 걸맞는 자만심과 경솔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만약 상대방이 비슷한 소재를 다룬 창작물에 주로 등장하곤 하는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를 뛰어넘을 똑똑한 소원을 빌 자신이 있었다. 청년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듯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소원은 역시 돈으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거기에 조금 조건을 붙여서요."
"음, 어떤 조건을 붙이고 싶으십니까? 참고로 저는 나름 유도리 있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니 현금을 부탁했는데 일련번호가 모두 같은 지폐를 준다든가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가운 이야기긴 하지만 그에 관한 안건은 이미 처음에 검토가 끝났습니다. 역시 현금은 아무래도 안정성 같은 문제 때문에 평생의 소원으로 고르기에는 좀 무리가 있죠."
"그렇다면 역시 금이나 보석으로? 몇 톤이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농담도 잘 하는군.' 청년은 생각했다. 이미 생각했던 문제기도 하고 이런 조그마한 원룸에 몇톤짜리 금을 그대로 두고 가면 그야말로 처치곤란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게 싫으시다면 주머니에서 항상 돈이 나오게 해 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인플레이션도 고려해서요."
"제가 생각한 것도 그것과 비슷하지만, 역시 '돈'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긴 하지만, 만약 주머니에서 우리 나라의 지폐만 나온다면 당장 현금을 왕창 받는것과 별 다른 차이가 없죠.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르고요. 저는 그보다는 '현물'을 원합니다. 캐비어, 금, 보석 기타 등등 고가로 매매할 수 있는 것들로 말입니다." 노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 그러면 현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래저래 다른 문제가 많이 생길텐데요. 오히려 더 성가실지도 모르고요."
"거기서 조건을 붙이는 겁니다. 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시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현물로 나올 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근처에 그 물건을 비싸게 사줄만한 사람이나 가게가 언제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면 혹여 전쟁이 나서 지폐며 금 따위가 휴짓조각이나 돌멩이가 되더라도 어찌저찌 필요한 물건을 수급하며 살아남을 수 있겠죠. 게다가,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부분에서 마치 선물 상자를 뜯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과연, 말씀대로입니다. 말씀하신 예시는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오지나 외국에 잔류하게 된 경우라도 큰 문제 없이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겠군요. 단순히 돈이나 특정 물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의심이 쏠리는 일도 없겠죠." 노인은 웃으며 말했고 청년은 우쭐함을 감추지 않았다.
"해서, 어떻게, 가능한가요?" 노인은 잠시동안 청년의 의기양양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드러나는 눈을 아주 기쁜 얼굴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물론 긍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앞으로는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 들어 있을 겁니다. 그걸 처분해줄 이나 업체도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고요." 이어 '그럼, 행운을 빕니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노인의 모습이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청년은 놀라 눈을 비비며 확인했지만 마법의 연기나 신묘한 향과 같은 전형적인 동화적 흔적도 남지 않아 한순간 자기가 환각을 본게 아닐까 착각을 할 정도였다.
'들어올 때도 이런 식으로 들어온 걸까, 과연 산신령이나 요정이라는 이름이 붙을만 하군.' 청년은 노인에 대한 감상을 이 한 줄로 일축하며, 조심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마치 지금 있었던 일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음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라도 하듯 손끝에 무언가 물컹하고 동그란 감각이 느껴졌다. 함께 느껴지는 서늘함이나 그걸 덮고 있는 비닐의 질감으로 짐작해보건데 일종의 식재인것 같았다.
'식재라면 근처에 있는 마트나 요리점에서 매입해주려나? 음... 처음부터 다소 애매한 물건을 뽑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든 물건을 꺼내려는데, 별안간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누군지는 몰라도 이 식재를 원하는 사람이 근처에 있었나보군. 하긴, 이 정도의 소량이라면 업체보다는 개인이 사 가는 것이 맞겠지. 이거 하나에 얼마나 받으려나?' 청년은 기대감을 미소의 형태로 한껏 드리운 뒤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지만, 그 미소가 오래 가진 않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과 '눈'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와악!!" 청년은 처음 노인을 봤던 때보다 훨씬 더 질겁하여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팩이 땅에 쳐박혀 완전히 동그란 형태를 하고 있던 물건의 한 부분이 음푹 패이고 말았다. 찌그러진 탁구공과 같은 형상이 된 그 '눈'은 담담히 바닥에서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쿵쿵쿵' 안에서의 소동을 들은 건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
청년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은 산신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로맨틱한 존재가 아닌,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쾅, 쾅쾅' 문을 두드리는 기세가 더욱 더 격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무문처럼 덜걱거리기 시작한 철문과 반쯤 찌그러져 아마 제기능을 하기 힘들어졌을 '물건'을 번갈아보던 청년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