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은 어느 날 갑자기 집 뒤뜰에서 낡고 오래된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그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것을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작은 조각상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각상은 놀랍도록 그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첫 단서가 될 줄은 몰랐다.
그 후로 유준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매일 밤 꿈속에서 그는 끝없이 이어진 거대한 도서관을 헤매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책장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고, 그 책장에는 제목도 없는 하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유준은 그 책들 중 하나를 펼쳐봤지만, 그 안에는 단어 대신 기묘한 상징들만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징들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상징들은 마치 그가 잊어버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꿈속에서 그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려갔다.
현실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물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낡은 열쇠, 이상하게 구부러진 안경, 어디선가 뜯어온 것 같은 종이 조각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점점 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화를 할 때마다 그들의 눈빛은 점점 비어 가고, 그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꿈속의 도서관에서 유준은 드디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책을 발견했다. 책을 열자 그 안에는 그의 모든 기억과 과거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그곳엔 공백이 있었다. 그 순간, 유준은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의 삶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저 이야기의 일부였고, 그 이야기는 지금 지워져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았지만, 손가락 끝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존재 자체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책을 다시 닫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모든 기억이, 모든 과거가 흩어져버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꿈속에서 마주쳤던 생명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점점 지워져가고 있었고, 이 도서관은 그들의 무덤이었다. 도서관의 끝없는 책장 속에,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하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이제 유준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하나의 빈 페이지로 남겨졌고, 그 책은 다시 도서관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의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었고, 또 다른 삶이 지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