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날, 나는 두 시간만 더 참으면 수업이 끝나는 날이었다. 내리쬐는 햇살이 교실 창을 통해 들어오고, 피곤이 가득한 교실은 방전된 배터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5교시가 끝나고 남은 수업 준비를 위해 나는 책을 정리하러 사물함으로 향했다.

내 자리에서 몇 발자국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사물함이었다. 당시에 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교실 맨 뒤쪽, 출석번호도 앞번호라 사물함 줄의 가장 끝자리였다. 우리 학교는 흔한 철제 사물함 대신 외국에서 수입해온 커다란 사물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길고 높아 마치 작은 옷장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었다.

사물함은 두 줄로 나뉘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제 사물함으로 걸어갔고, 손을 뻗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물함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미친듯이 요동치는 모습이었다. 마치 그 안에 누군가가 갇혀 있고, 안간힘을 써서라도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잠시 멍하니 사물함을 바라보았다. 문이 꽉 잠겨 있는 것도 아니고, 열쇠가 반쯤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내 눈앞에서 쿵쾅거리며 흔들리는 사물함. 나는 누군가가 장난으로 친구를 가둬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그 안에 갇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가 갇혀서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했다. 문득 ‘이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큰 사물함이라도, 사람이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사물함의 흔들림은 상식을 벗어난 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는 이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교실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그 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사물함이 쿵쾅거리는 소리만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사물함을 열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과,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물함 앞에서 뭐해?”

문득 돌아보니 반 친구였다. 그제야 교실의 소음이 다시 귓가를 메웠다. 주변 친구들도 내 이상한 행동을 보고 모여들었다. 당황한 나는 친구들에게 막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친구들은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여겼는지, 웃으며 사물함을 열어보겠다고 나섰다.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 모습을 지켜봤다.

친구가 사물함의 손잡이를 잡고 열쇠를 돌렸다. 나는 그때도 혹시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봐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문이 열린 순간 아무도 없었다. 그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작은 쥐 한 마리도, 낙엽 하나도 없었다. 사물함 내부는 깨끗하고 정리되어 있었고, 좁은 공간에 무엇이 들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친구들은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고요한 빈 공간이 나를 비웃듯 열려 있었다.

사물함 앞에서 겪은 그 경험은 이후로도 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그 사물함을 피해 다녔다. 교실에 있으면 가끔씩 그 사물함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무언가가 그 안에서 절규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몇 주 뒤, 나는 친한 친구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진지하게 내 말을 들으며, 한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너, 혹시 그 사물함이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봤어?”

“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예를 들어, 다른 차원 같은 거 말이야.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이든, 무언가가 갇혀서 나오려고 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이야기에 끌렸다. 어쩌면 그날 내가 본 것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물함은 어딘가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물함을 열었다면, 나는 그 사람과 마주쳤을까? 아니면, 그 사람은 내가 사라진 세계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도 나는 가끔씩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 그때 내가 사물함을 열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어디로 가게 되었을까?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사물함은 지금도 학교의 한 구석에 서 있을 것이다. 언제라도 그 문이 다시 열리고, 다른 세계의 누군가가 그 안에서 손을 내밀어 올지도 모른다. 내가 하지 못한 선택이 지금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