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 깊은 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저택이 하나 있다. 마을에서는 그 집을 “검은 저택”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곳을 멀리했다. 저택을 지나면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든다며, 심지어 낮에도 섣불리 다가서지 않았다.


그곳에 사는 이는 검은 저택의 신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늘 검은 정장을 입고, 손에는 흑단으로 만들어진 우아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의 본명은 아무도 몰랐다. 저택 현관의 오래된 명패에는 한 단어만이 새겨져 있었다.
"Red.“


검은 저택의 신사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미스터리의 화신으로 통했다. 그는 한 번씩 마을에서 물건을 주문하거나 음식을 배달받는 것으로 생필품을 해결했다. 그의 요청은 언제나 철저히 서면으로 이루어졌고, 배달원은 물건을 저택 문 앞에 두고 떠나야 했다. 만약 대면하려 한다면, 문 너머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과 만날 일은 없습니다."





저택은 대대로 그의 가족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오래 그곳에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몇몇 마을 노인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도 그가 같은 모습으로 저택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허풍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이방인이 찾아왔다. 그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였고, 마을 사람들은 검은 저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렸지만, 에드윈은 오히려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마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안개 숲으로 들어섰을 때,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그렇게 에드윈은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어느새 주변의 나무조차 흐릿해질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땅은 축축했고, 공기는 차가웠다. 결국 그는 저택 앞에 도착했다. 오래된 철제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그를 맞이했다.


저택은 거대한 고딕 건축 양식으로, 넝쿨이 무성한 담장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에드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문 뒤에서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돌아가시오.”


“저는 단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더군요. 만약 당신이 허락한다면, 저는 그저... 신사로서의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문 뒤에서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약속이라. 당신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알겠소.”


에드윈이 놀라며 대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검은 저택의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로 이야기대로였다. 매끈한 검은 정장, 흑단 지팡이,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깊고 무한한 검은빛으로 빛났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에드윈이 물었다.

“편하게 '레드' 이라고 불러주시오.” 검은 저택의 신사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당신은 마을 사람들과 다르군요. 왜 여기에 온 겁니까?”

“저는 그저... 오래된 이야기를 모으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삶과 이 저택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허락된 선에서만요.”

검은 저택의 신사는 그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기억하세요. 이곳의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에드윈을 안으로 초대했다. 저택 내부는 거대한 서재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 벽을 따라 꽉 차 있었고, 곳곳에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먼지가 쌓인 골동품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재 한가운데 놓인 유리로 덮인 커다란 상자였다.


에드윈이 상자에 손을 뻗는 순간, 검은 저택의 신사는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유리 상자가 열리며 안에서 검은색 금속 용기 같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기 위에는 붉은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생물학적 위험 - 절대 열지 마시오]


상자가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방 안을 휘감았고, 금속 용기에서 어두운 기운이 방안 가득 퍼졌다. 신사는 즉시 다가와 소리쳤다. '그만두시오! 이것은 단순한 실험체가 아니라 인류를 끝장낼 수도 있는 실패작이오!'”


에드윈은 당황하며 물었다.
“실패작? 그렇다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리고 왜 당신이 그것을 숨기고 있었죠?”


검은 저택의 신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오래전, 정부의 실패한 생화학 프로젝트의 산물이오. 이 바이러스는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재앙이오. 정부는 이 실패작을 은폐하기 위해 이곳 숲에 봉인했소. 우리 가족은 대대로 이것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일을 맡았소. 하지만 문제는…”

그는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봉인이 오래되면서 약해지고 있었고 나는 후임자를 지정하거나 이 일을 맡길 사람을 찾을 권한도 없었소. 정부는 이 모든 것을 ‘잊힌 비밀’로 만들었소.”


에드윈은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후회에 휩싸였다.
“그러면 지금... 이 바이러스가 퍼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검은 저택의 신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이러스는 극도로 전염성이 강하며, 치명적인 증상을 유발합니다. 그것은 공기를 통해 퍼질 수 있고, 초기 감염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지요. 우리가 여기에 남아 관리한 이유는 이것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소.”


에드윈은 금속 용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바로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나요?”


검은 저택의 신사는 냉정히 대답했다.
“이 바이러스를 활성화시키지 않는 이상 당장은 괜찮을 거요. 하지만, 용기가 손상되거나 안전한 장소에서 옮겨지지 않는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 순간, 금속 용기에서 약간의 증기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경악하며 물었다.
“이게 지금 새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멈출 수 있죠?”


검은 저택의 신사는 황급히 용기를 조사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용기가 오래된 탓인지 밀폐 기능이 약해졌소. 지금 이걸 완벽히 밀폐하지 못한다면, 바이러스는 곧 공기 중으로 퍼질 것이오.”


에드윈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상자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제 실수로 봉인이 약해졌다면, 그것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검은 저택의 신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임무는 단순히 봉인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감시하고, 시스템을 점검하며,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삶이지요.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남는다는 것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뜻합니다.”


에드윈은 깊은 숨을 내쉬고 결심했다.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세상에 나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그 책임을 감당하는 게 옳습니다.”




검은 저택의 신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저택 아래 비밀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당신이 본 그 상자와 바이러스는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한 프로젝트와 정부의 어두운 비밀이 담긴 산물이오. 이 숲은 그저 평범한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처음부터 감시와 격리를 위해 설계된 ‘사라진 지역’이었소.”


놀란 표정의 에드윈을 향해 검은 저택의 신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곳은 초창기 격리 시스템으로 설계되었지만, 지금은 현대 기술과 동떨어진 상태요. 그래서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이렇게 비밀 시설의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소"


그는 서재 한쪽 벽을 밀자, 오래된 서류와 설계도가 가득한 비밀 서고가 나타났다. 서류에는 생화학 무기 개발과 관련된 암호화된 내용과 함께 붉은 ‘기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몇십 년 전, 정부는 세계를 지배할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려고 했소. 그들은 치료 목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험은 윤리의 경계를 넘어갔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바이러스였소. 치명적이면서도 인간의 면역 체계를 철저히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을 개발했지요. 그러나 그 위험성은 통제 불능이었소.”

에드윈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왜 이 숲에 봉인했습니까? 왜 파괴하지 않고 이렇게 위험하게 방치한 거죠?”

검은 저택의 신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바이러스는 단순히 파괴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닙니다.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는 바이러스의 구조를 변화시키거나 더 치명적으로 만들었소. 결국, 정부는 이곳처럼 외딴 숲에 밀폐된 시설을 만들어 격리하기로 결정했지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소. 대가로 우리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지요.”



검은 저택의 신사는 에드윈을 비밀 연구 시설로 데려가며 그의 목소리에 무거운 책임감을 담았다.
“문제는 이 시설도 세월 앞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오. 이곳의 기술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소. 상자의 봉인은 점점 약해지고 있으며, 내가 가진 힘으로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유지할 수 없소.”

에드윈은 당황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해 온 겁니까? 왜 후임자를 구하거나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검은 저택의 신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스템의 가장 큰 결함이었소. 이 장소와 이 임무는 철저히 은폐되었고, 나는 내 후임자를 정할 권한도, 외부와 연락할 자유도 없었소. 이 임무는 그저 우리 가족에게 대대로 강요된 유산이었소. 나는 혼자서 수십 년간 이 시스템을 유지하며 살아왔소.”

"당신이 방문하기 직전까지도 난 봉인이 오래되어 유출 위험이 있는 샘플들의 보관 용기를 교체하는 작업 중이었소. 미처 옮기지 못한 하나를 그대가 보게 된 거고."

검은 저택의 신사는 가지고온 유리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허나, 보다시피 난 이제 늙고 병들어 지팡이 없인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잊혀진 건지 버려진 건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거요 난."



에드윈은 입술을 깨물며 결심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제가 남아서 당신을 대신해 봉인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검은 저택의 신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결심은 고맙지만, 이곳의 임무는 단순히 ‘유지’가 아닙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위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시스템을 점검하고 바이러스의 상태를 감시해야 하는 삶이지요.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러나…”


그는 에드윈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이 책임을 짊어질 의지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인정하겠소.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하시오. 당신의 결심은 단순한 속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오.”


그 순간, 시설의 경고음이 울리며 시스템에 약간의 균열이 발생했다. 검은 저택의 신사는 서둘러 장비를 조작하며 말했다.
“보시오. 이 장치조차 오래된 탓에 언제든 고장 날 수 있소. 정부는 더 이상 이곳을 관리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잊은 존재’로 여긴 지 오래오.”


에드윈은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곳에 남아 당신을 돕겠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이 임무를 이어나가겠습니다.”



결국 에드윈은 저택에 남아 봉인의 유지와 감시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정부는 이 저택을 포함한 숲 전체를 격리 구역으로 지정하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차단했다. 세월이 흐르며 "검은 저택"은 점차 잊혀 갔고, 안개 숲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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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1: 마지막 방어선


안개 숲의 고요한 저택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로 서 있었다. 저택 깊은 곳, 오래된 봉인 시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에드윈은 홀로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벽 너머로 울려 퍼지는 미세한 기계음만이 그의 고독을 위로했다.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검은 저택의 신사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지팡이가 남아 있었다. 지팡이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그는 그날 밤 신사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기억하시오. 당신은 인류의 마지막 방어선이란 것을.”

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그 순간부터 에드윈은 홀로 이 임무를 이어가야 했다.

에드윈은 창밖으로 드리워진 안개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는 한, 이 문을 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의 눈빛은 단호했고, 방 안의 공기는 한결 무거워졌다. 그렇게 에드윈은 저택 깊은 곳에서 홀로 세상을 지키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 멀리, 숲의 끝자락에 서 있는 저택은 여전히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듯, 안개 속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 에필로그 2: 후계자의 이야기


몇 년 뒤, 정부의 한 기록 보관소에서 한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격리 구역에서 바이러스의 봉인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 봉인 담당자 교체 요청은 기각됨. 해당 지역은 접근 금지 상태를 유지하며, 자원과 지원은 중단된 상태임."

보고서를 읽던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지키고 있는 걸까?”

그리고 안개 숲의 깊은 곳, 저택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