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다음 날 응아 잘 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먹은 양도 많은데 응아를 못했다. 수술이 목요일, 첫응아 두번째 응아가 금요일. 일요일 밤까지 소식이 없었다. 안 먹으면 변비가 온다길래 미친듯이 먹어댄 이틀동안 방구 한번이 나오지 않았다. 배가 빵빵하게 음식으로 부풀어 뱃속의 아기도 좁아하고 배의 주인인 나도 불편한데 소식이 없으니 치질 수술 후 가장 위험한 증상이라는 변비가 온 것인가 싶어 불안했다. （사실 수술 끝났다고 아기 핑계로 명륜진사갈비를 간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일요일 자정 무렵 드디어 소식이 왔다.

남편과 친정엄마에게 자랑을 하고 룰루랄라 신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두번째 변이 안아팠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와~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까 구렁이 보겠다~~ ㅎㅎ’ 라고 생각하며 변기에 앉아서 힘을 주는 데 억!!! 엄청나게 아프다. 아픔을 참고 간신히 힘을 줘보니 토끼똥만한 똥이 피에 젖어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직장과 괄약근 사이를 누가 마개로 막아놓은 것 같다. 이틀 넘게 응아를 못해서 변이 굳은걸까. 힘을 많이 준다면 나올 것도 같은데 응꼬가 찢어질 것 같다. 아프고 무섭다. 근데 변의는 없어지지 않는다. 변을 묽게 해준다고 처방받은 마그밀 계속 먹었는데 왜 이러지..

일단 찢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힘을 줄 의지도, 이유도 없어졌기 때문에 변기에서 일어나서 일단 따뜻한 물로 씻고 좌욕을 해서 괄약근의 긴장을 풀어본다. 괄약근이 촉촉하게 젖고 나른해지면 덜 아프지 않을까 싶었다. 충분히 좌욕을 하고 다시 시도해본다.

아프다...

피는 안나오는 것 같다. 조금 묻어나는 정도로 미미하다. 그러나 힘을 주는 순간 찢어질 것 같이 아파온다. 병원에서 당직중인 남편에게 전화로 말하자 남편이 관장을 하는 것을 권한다. 집에 관장약이 없다. 변비 때문에 고생해본 적은 있어도 그냥 힘주다가 똥꼬 한번 찢어지고 말지 관장 해본 적도 없고 병원에서 수술할 때 받은 것이 첫 관장이었다.. 그치만 지금은 관장에 대한 어색함보다 변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더 크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변을 못봐서 장에 변이 차 죽은 여자’에 대한 글이 떠오른다. 절대.. 그렇게 돼서는 안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약국에서 관장약을 사다 해보기로 마음먹고 쓰라린 똥꼬를 잊기 위해 잠을 자본다.

이미 생겨버린 변의와 공포로 인해 두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관장약을 사러 온 동네 약국을 헤매는 꿈을 꾸다가 월요일 정오쯤 눈을 뜨자마자 동생에게 부탁해 관장약을 사왔다. 걸어다녀오는 동안 변의가 폭발할까봐 부득이하게 동생에게 신세를 졌다. 밥 먹고 해보라는 친정부모님의 말이 들려왔지만 들어올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닌 내 장 상태로 인해 아무것도 먹기 싫은 더부룩함을 안고 묵묵히 관장을 하러 방에 들어갔다. 손에 든 관장약을 보고 관장 경험이 없는 친정 식구들이 응원을 해준다..

관장약은 귀여운 전구 모양이다. 약액이 40ml 들어있다. 전구 꼬랑지 부분인 약 입구를 응꼬에 잘 맞춰서 넣어야 하는데 수술 부위를 건드릴까, 들어가다 변과 어색하게 조우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관장하는 법이나 관장 후기는 어제부터 이미 충분히 읽었다. 긴장된다고 더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부룩함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에서 본대로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관장약 뚜껑을 열고 최대한 응꼬에 힘을 푼 다음 도킹했다.. 아 아프진 않네. 근데 잘 들어간건가..?? 조심스럽게 관장약 몸통을 눌러 액을 주입해본다. 주르륵 흐르는 느낌은 없는 게 일단은 뱃속으로 잘 들어가는 것 같다. 빨리 주입하면 변의를 오래 못참는다길래 천천히 주입해보니 반쯤 들어갔을 때 부터 아랫배에 느낌이 온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아 다행이다.. 잘 들어갔구나..

변비가 심한 사람들은 약통의 액을 전부 다 주입하는게 좋다고 한다. （40ml 중 40ml） 실제로 관장약 겉포장에는 끝까지 약액을 넣을 수 있도록 삽입 시 용기를 효율적으로 누르는 방법이 그려져 있다. 나도 전부 다 넣기 위해 실리콘으로 된 관장용기를 누르는 연습을 여러번 했다. 그러나 나는 입구를 삽입하는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어리숙하게 통을 집고 시작해버려서 끝까지 눌러봐도 1/4 정도가 채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버렸다. 아무렴 어쩌랴~ 일단 뭐라도 들어갔으니 이 약액이 굳어버린 내 변을 달래주길 바라는 수 밖에...

처음에는 그다지 변의가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수술 전 간호사가 해줬을 때는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엄청나게 마려웠는데 이번에는 긴장이 안된 탓인가 왠지 권장 시간인 10분을 채워서 대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워서 별 생각을 다 하는 동안 최대한 많은 양의 변이 약액을 만나 부드러워지기를 바라본다. 그러나 10분 참아보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2분 정도 지나자 배가 뒤틀리듯 변의가 밀려오며 방구가 엄청 나오기 시작한다. 슬쩍슬쩍 방구를 뀌어보지만 이 방구가 가스로 위장한 응아일 위험을 생각하니 땀이 비질비질 나온다.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지리기라도 하면 방 밖에서 ‘식구들 중 첫번째로 셀프 관장을 시도한 개척자’인 나를 응원하고 있을 친정 식구들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가스인 줄 알고 허락해준 통로로 액체가 흐르면 어떡하지? 방구를 참아보려 했지만 참을 수 없는 부피의 가스가 생성되고 있었다. 고체가 액체로 바뀌면서 가스가 생기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고체 사이에 숨어있던 뱃속의 가스들이 일방통행 반대 방향으로 쳐들어온 침입자에 놀라 뛰쳐나오고 있는 것일까..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 화장실의 변기 가까이로 가서 어정쩡하게 응꼬를 틀어막고 버텨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패착이었다. 29년간 훈련되어온 조건반사로 인해 ‘변기가 가깝다’는 시각정보가 안구를 거쳐 뇌에 전달되자마자 괄약근이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곧이다... 급히 시간을 보니 3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안돼! 이러다 도루묵 돼버리면 이 짓을 또 해야돼! 오분은 버텨야 응아가 녹아나올 수 있을거야. 난 지금 자동차 운전중이다... 나는 지금 지하철이다..!!’

암시를 걸어본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활화산의 간헐천처럼 가스가 피식피식 나오는 가운데 드디어 본토의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갈게^^’ 가스가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그들은 이미 분출되기 시작한다.

이미 벗어놓은 속옷 덕분에 변기에 바로 주저앉아 그들을 갈 길로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다.

푸드드ㅓ더더거거ㅓㄲ

아... 아... 아나스타샤

4분 남짓한 짧은 시간으로 인해 약액만 나올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굳어져 있던 그들이 함께 나온다. 약액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응아들을 설득한 것일까. 뱃속에 주입한 약 30ml의 약액은 그 다섯배는 되는 동료들을 이끌고 나왔다. 부드러워진 응아들은 아직 여린 응꼬의 상처들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그래도 깨끗하지 않은 오물이 지나가서 그런지 응꼬가 조금 쓰라리다. 입술 위로 비릿한 웃음이 지나간다.

‘항문아. 너는 원래 오물이 지나는 통로야. 고상한 척 하면서 오물에 의해 상처받은 얼굴 하지 마;; 넌 원래도 그게 역할이었어’

한차례 스콜같은 분출이 지나자 상한 걸 먹어서 급하게 설사할 때 처럼 배에 잔여물이 남은 것이 느껴진다. 배가 쥐어짜지는 느낌이 난다. 그럼 그렇지, 내가 먹은 게 얼만데 이것만 나오겠어 싶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아직 굳은 상태인 것 같다. 평소같으면 허리을 굽히며 안간힘을 써서라도 다 내뱉었을 잔변이었다. 그러나 힘을 거세게 주다간 수술 부위가 벌어질까봐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씻었다. 어차피 관장약은 5개나 더 남아있다구 후후

관장을 하고 변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좋다고는 한다. 그래도 아직 수술 전처럼 항문에 힘을 주는 게 익숙하지 않은 회복기에는 신세를 질 생각이다. （임신 9개월이기도 하니깐ㅎㅎ） 변비가 심하게 올 때라도 언제든 묽은 변을 볼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겨서 오늘은 잠시 끊었던 철분제를 다시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유산균과 요거트도 먹었다. 역시 먹고 싸는 게 삶의 질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니깐 ㅎㅎ

이제 수술 후기는 그만 쓰고 싶다.. 만약 치질 수술에 대한 글이 더 올라오지 않는다면 몇번의 관장 끝에 평범한 항문의 소유자로 돌아왔다는 것이라 생각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