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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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그녀의 연락.
학원 쉬는 시간에 본 카톡알림은 피곤에 쩔어있던 내 머릿속을 한 번에 싹 다 비워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나도 '끝났다（?）'라는 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당장 카톡을 읽어 봤다.
그녀는
'날이 너무 더운데, 잘 지내고 있어?'
라고 물었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밝은 말투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쌤도 잘 지내시죠?'

그녀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론을 얘기했다.
사인회를 같이 가지 않겠냐고.
그녀와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그 당시 굉장히 잘나가는（지금도 그렇지만） 작가였다.
안 나오는 방송이 없었고 강연도 굉장히 많이 했다.
그녀는 그 작가의 사인회가 열리는 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난 좋다고 했다.
그런 행사를 가본 적 없지만 실제로 그 작가를 볼 수 있다는 것 아니, 오랜만에 그녀를 보고 같이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미 내 정신은 몸을 떠나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그녀는 차로 날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녀가 운전할 수 있다는 것, 차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같이 점심을 먹고 사인회에 가자고 했다.
맛있는 걸 사줄 테니 뭘 먹을지 생각해 두라며.


내 몸은 학원 책상에 갇혀 있었지만, 머릿속은 그날 뭘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재밌는 얘기를 해서 그녀를 웃게 만들지, 상상하며 혼자 영화를 찍고 있었다.
나는 첫 데이트 때 뭘 먹어야 하는지 찾아봤다.
냄새가 심한 음식이나 손으로 먹는 것처럼 까다로운 음식은 피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동선에 맞춰 근처 가게로 잡는 게 센스 있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사인회 근처 파스타집을 찾았고 그녀에게 여기서 먹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알겠다며 며칠 있다 보자고 했다.
난 비상이었다.


'뭘 입어야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옷에 관심 없던 건 아니지만, 내 옷들이 여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익히 판단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찾아봤다.
대학생 남친룩을 참고해서 아이보리 피케니트를 하나 샀다.
바지는 원래 있던 와이드진을 활용했다.
그리고 왁스를 사서 발라봤다.
너무 보기 싫었다.
아무리 거울을 봐도 멋이 안 났다.
너무 우울해졌다.
그렇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옷을 조심스럽게 개어 주말까지 방 한쪽에 모셔 뒀다.


그날이 됐다
그녀가 우리 집 앞까지 차로 와준다고 했다.
파란 귀여운 경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창문이 열리니 그녀가 보였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예뻤다.
얼른 타라고 했다.
조수석에 탔다.
경차 조수석은 처음 타봤다.
생각보다 공간이 좁았고 운전자와 굉장히 가까웠다.
그녀는 파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가슴이 너무 뛰었다.


그녀가 말했다.


"넌 어떻게 선생님한테 연락 한번 안 해! 나 진짜 서운했어"


난, 내가 너무 서운했다.
내 마음도 모르고 저렇게 말하다니.
욱하며 튀어나오는 말들을 삼키고


"선생님 부담스러우실까 봐 안 했어요"


라며 점잖게 말했다.
그녀는


"하나도 안 부담스러우니깐 자주 연락 좀 해.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는 서로 근황을 얘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
차에서는 은은하게 달콤한 안나수이 향이 났다.
재잘재잘 그녀와 얘기하면서 느꼈다.

'행복하다'

무채색이던 나의 일상을 그녀가 예쁘게 색칠해 준 것 같았다.
근황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파스타 가게에 도착했다.
나는 까르보나라를 시켰다.
그녀는 봉골레 파스타를 시켰다.
그녀가 말했다.


"감바스 좋아해?"


처음 들어봤다.
안 먹어봤다는 내 말에 맛있다며 같이 주문해 줬다.
파스타가 나왔다.
맛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먹으면 뭐든 맛있다는 게 뭘 말하는지 처음 느꼈다.
분위기를 말하는 거였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며 이야기하는 지금이 꿈 같았다.


감바스가 나왔다.
'멋있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으로 빵을 집어 새우를 얹고 오일을 발랐다.
그리고 내 앞 접시에 놔줬다.


"먹어봐, 새우랑 오일이 빵이랑 너무 잘 어울릴 거야"


울컥했다.
누군가가 먹으라며 이렇게 챙겨준 게 처음이었다.
손으로 집어 맛봤다.
너무 맛있었다.
맛이 아니더라도 그날의 감바스는 잊질 못한다.


맛있게 먹고 우리는 사인회가 열리는 서점으로 향했다.
일찍 온 덕분에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우린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게 우리가 같이 찍은 첫 사진이었다.
사진이 마음에 들게 나왔다.
그녀는 너무 예뻤고 나의 새로 산 니트도 꽤 괜찮았다.
내가 그녀와 꽤 어울려 보였다.


우린 사인회가 끝나고 서점을 나왔다.
미리 생각했던 플랜을 꺼낼 차례였다.


" 쌤! 카페 가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


그녀는 웃으며 좋다고 했다.
근처 빈티지 찻잔을 쓴다는 카페를 찾아놨었다.
데이트하기 좋은 카페라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인테리어가 따뜻한 느낌을 줬다.
그런 덴 처음이었는데, 공간이 감상을 준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예쁜 잔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를 했다.
그러다 그녀가 물었다.


"넌 여자친구는 없어?"


울컥했다.
오늘 행복했던 내 감정들을 잘 모아 식탁 위에 쌓아놨는데 그녀가 싹 엎는 느낌이었다.

'역시 날 남자로 안 보는구나...'

가슴이 갈가리 찢겨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덤덤하게 답했다.


"여자친구가 어딨어요"


"그래? 왜? 너 좋다는 여자애들 많을 거 같은데"


"없어요"


너무 미웠다.
오늘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싶어졌다.
너무 속상했지만 그녀의 미소와 좋은 분위기에 금방 이전처럼 다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그날 저녁 약속이 있었다.
출발할 시간이 되어 그녀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날 데려다줬다.
내릴 때 그녀가 얘기했다.


"오늘 재밌었어! 카톡하구, 조심히 들어가! "


난 밝은 척 웃으며 오늘 감사했다고, 조심히 들어가시라 인사했다.
지하철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슬펐다.
한계를 명확하게 느꼈달까?

'역시...애 같겠지..."

스크린도어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머리 스타일도 마음에 안 들고 옷도 나한테 안 맞는 옷 같았다.
난 그녀와는 안 어울렸다.


집에 들어와서 음악을 들으며 슬픈 마음을 지우려 애썼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진짜로 통증이 너무 심했다.
그렇게 힘없이 병자처럼 지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녀에게서 카톡이 왔다.

'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