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무결.’

분필이 칠판 위를 스스로 굴러갔다.

마치 살아 있는 듯 흰 막대가 유령처럼 흔적을 남기며 네 글자를 적었다.

"이 네 글자는 바로 용사, 라루트를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칠판 앞에 선 이는 조그만 책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학생도, 칠판도 보지 않은 채였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글자에 머물러 있었다.

토끼 귀를 지닌 수인 여성.

둥근 안경을 쓴 그녀는 손끝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다음 문장을 훑었다.

정교수가 아닌 부교수인 그녀에겐 이 자리가 아직은 낯설었다.

학생과 칠판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도,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 어색함을 뚫듯,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어떤 점에서 완전무결하다는 겁니까?"

이 강의는 '대륙의 역사' 과목이다. 오늘 주제는 바로 ‘용사’.

원래 담당 교수가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며 대리 수업이 필요했고 부교수인 그녀가 스스로 자원했다.

평소 같았다면 망설였겠지만, 이 주제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용사의 열렬한 팬이었다.

수많은 전공 중에서도 유독 역사에 빠졌고, 그 중에서도 용사 라루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비록 수업 경험은 부족했지만,

그가 남긴 여정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첫걸음이라 믿었다.

"뭐든 다요."

"······뭐든요?"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 되물음은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인맥, 인품, 능력. 그 밖에도 전부 다."

그녀의 말은 점점 빨라졌고, 열정은 목소리를 밀어 올렸다.

"인맥만 해도 그렇죠. 용사 파티의 구성, 그 자체가 전설입니다.

우리 마법학회장이신 대마법사 헬레나님부터 시작해서, 암흑의 대가 카스트로 님,

고대 엘프의 정령왕 시르엘 님, 콜로세움의 권왕 라이카 님까지!"

그녀는 양손으로 책자를 꼭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요, 마왕 토벌에 나섰을 때 검성 듀란 님의 가호까지 받았다고 해요. 뭐 그 정도면, 말 다 한 거죠."

"아, 네···"

학생은 잠시 말을 잃더니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입이 트인 그녀는 되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경배하듯 말을 잇고 있었다.

"인품 또한 훌륭하죠. 불의엔 침묵하지 않고, 고귀한 자만이 들 수 있다는 이지스의 방패를 아무렇지 않게 드셨고··· 그러니까, 괜히 ‘용사의 정석’이라는 칭호가 붙은 게 아니죠!"

"와, 하··· 대단하군요."

라루트는 이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광적인 팬을 상대하다 보면, 괜히 도발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기도 하다.

다른 학생 하나가 그녀의 황홀함을 눌러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 정도로 완벽하면,"

잠깐의 침묵을 틈타, 학생이 턱에 깍지 낀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사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일 지도 모른다는 흠이 있을지도 모르죠."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건, 말 그대로 논외."

그녀는 단호히 잘랐다.

"그분은 강함 하나만큼은 단연 톱이에요. 역대 용사 중에서도, 그분의 실력에 발끝조차 닿는 이가 없다는 게 정설이죠."

그녀는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강하다는 마왕, 라 디에스 카르타의 종말 선언을 종식시킨 자입니다."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

수많은 용사가 있었지만, 마왕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는 단 하나였다.

그 하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전 학생의 말은 명확하게 반박된다.

"그렇죠. 하지만 그건, 현재 용사 파티가 터무니없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이 강하고,

또한 ‘역대 용사’ 기준에서의 강함일 수도 있잖아요?"

열기가 한창 오르던 순간, 학생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용사님과 학회장님이 맞붙는다면요?"

"어··· 어, 학회장님이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잃었다.

‘둘이 붙으면 누가 더 강할까?’라는 흔한 가상 논쟁. 누구든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주제고, 답이 없을지 모르는 유희거리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상대는 바로 현 마법학회장, 헬레나였다.

헬레나는 용사 파티의 일원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

살아 있는 전설이다.

부교수인 그녀 역시 헬레나의 광팬이었고

용사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용사에 대한 찬사와, 학회장에 대한 존경.

그 둘을 저울질한다는 건, 그녀로선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현 마법학회장 헬레나 님은,"

학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영창 없이도 9서클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 앞에서라면, 아무리 용사라 해도··· 허울뿐일지도 모르죠?"

강하다는 점엔 동의했다.

다만 용사와 학회장은,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다른 결의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 둘의 강함을 논하는 데서 회피하기엔 그녀는 교수였고, 학생의 질문을 받았다면 응당 대답하는 것이 맞다. 그래도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 방금까지 용사를 찬양한 것은 맞으나 헬레나와의 강함 논란에선 사뭇 대답하기 꺼려졌다.

그녀는 학회의 몸이다.

학회장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용사의 손을 들어주는 건, 마치 마법학회를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 이야기엔, 제가 대신 대답해도 될까요?"

허공에서 잠깐의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줄기를 뚫고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대형 강의실이 술렁였다.

밝게 인사하는 여성.

두터운 의복 사이로도 감춰지지 않는 미모가 강단을 압도했다.

"하, 학회장님?"

"반갑습니다, 여러분. 헬레나입니다."

헬레나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 손짓 하나에 칠판 위에 있던 분필이 떠올랐다.

당황한 부교수는 물론, 강의실 전체가 그 순간 숨을 멈췄다.

"용사님과 제가 맞붙는 문제라··· 흥미롭네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순간, 분필이 섬뜩하게 움직였다.

벌처럼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날던 분필이 갑자기 헬레나가 손을 뻗는 순간, 질문을 던졌던 학생의 눈앞으로 직선으로 튀어갔다.

휘익!

공기를 찢으며 날아든 분필.

학생은 기겁해 고개를 숙였고, 분필은 그의 코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후···"

헬레나는 주문 하나 없이 손짓만으로 모든 걸 통제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살기를 품고 있었다면, 그 학생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펼치자

분필은 강하게 튕겨 오르며 칠판으로 날아갔다.

목표는 단 하나. ‘완전무결’이란 글자다.

콰앙!

강의실을 뒤흔드는 굉음.

흰 분필 가루가 공중을 메웠다.

그럼에도 칠판 위의 ‘완전무결’ 네 글자는,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헬레나는 침묵한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같은 마법사 수십 명이 달려든다 해도, 용사님께 상처 하나 낼 수 없어요."

긴 정적 끝,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채웠다.

"하지만 용사님은 착하신 분이라, 제가 싸우자고 해도 아마 도망가실 걸요?"

헬레나는 다시 웃었다.

방금 전까지 압도적 살기를 내뿜던 그녀의 미소는,

한순간에 강의실의 공기를 바꿨다.

*　　　　　　　*　　　　　　　*　　　　　　　*

수업이 끝나고, 도발을 했던 학생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부교수에게 사과했다.

부교수는 난처한 웃음으로 그 사과를 받아냈고, 헬레나는 그 상황을 가볍게 웃으며 정리해 주었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하군요."

"아, 아닙니다. 학회장님."

여학생 세 명이 헬레나에게 사인을 받으며 연신 비명을 질렀다. 꾸벅 인사하는 소녀들을 뒤로한 채, 헬레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마법학회에서 ‘우상’이라 불리는 그녀답게,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기 마련이었다.

부교수 역시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굳은 인내심으로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첫 수업이라 많이 긴장됐는데······."

"드미트리 교수가 오늘 펑크 낼 것 같다고 해서요. 혹시 몰라 잠깐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재미 삼아 와봤죠."

"하, 하··· 그런가요?"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 보이더군요. 수업, 꽤 인상적이었어요."

"과찬의 말씀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헬레나와 부교수는 회랑을 따라 걸었다.

한때 헬레나도,

용사의 이야기라면 지금의 부교수만큼이나 열렬한 관심을 가졌었다.

이제는 용사가 자취를 감췄고,

시간이 흘러 기억조차 흐릿해질 정도가 되었지만

밤마다 그를 떠올리지 않은 적은 없다.

경외, 존경, 그리움.

그리고 어쩌면, 애틋함 같은 감정까지도.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그 복합적인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헬레나라······."

회랑을 따라 걷던 둘은, 낯선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복장으로 온몸을 감춘 그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눈을 덮는 깊은 후드까지 내려쓴 모습이었다. 주변 공기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침묵의 기류.

헬레나는 눈을 살짝 부릅뜨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익숙한 얼굴이네요."

그녀가 부교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 분께서 용건이 있는 것 같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아, 네. 학회장님."

부교수는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걸 숫자로 말하는 순간, 이미 격이 어긋난 거지."

헬레나의 발언을 되짚는 듯한 낮은 음성.

수십 명이든, 백 명이든 용사에게 숫자는 애초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강의실에서의 소동을 이미 처음부터 쭉 관망했다는 소리다.

"오랜만이군요. 카스트로."

"파티가 해체되고 난 뒤로 처음인가."

그는 용사 파티의 일원. 암살자의 신분이었던 카스트로다. 둘의 대화는 담담했지만, 한때 생사를 함께했던 이들 사이의 공기엔 무거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둘은 원래부터 말을 섞을 사이가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파티 안에서도 그림자처럼 움직였고 헬레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보다 그의 침묵을 더 자주 느꼈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마주했지만 감정은 없었다.

다만 늘 그래왔듯 불편함만은 똑같았다.

"암살은 손 떼신 걸로 아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대낮에 다닐 줄은 몰랐네요."

학회장이라는 입장인 그녀로선 자신의 마법학회에 버젓이 암살자가 돌아다닌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용사 파티가 결성된 뒤로 암살자직을 그만둔 카스트로지만 지금도 복장이나 행색은 음침해 보이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그 '암살'이란 것 때문에 왔어."

그의 말에 헬레나가 흠칫 놀랬다. 살짝 뒤로 물러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절 죽이겠다는 건가요?"

"아 오해가 있었군."

카스트로는 한 손을 들며 난색을 보였다.

'하긴, 죽이려고 했다면 이렇게 독대할 필요도 없이 이미 손을 썼겠지.'

암살자는 품속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내밀었다.

봉인된 검은색 서신이었다. 헬레나는 그 표면을 쓰다듬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체불명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 서신의 의미를 안다.

"감정이 필요해서 왔어."

"감정이요?"

암살자가 턱끝으로 서신을 한 번 더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암살 의뢰서야. 손을 뗀 지 오래됐지만······ 내 거처에 직접, 검은 봉투로 이걸 보낸 자가 있어서."

"당신에게 암살 의뢰서라."

헬레나는 마법으로 서신을 손 위에 살짝 띄웠다. 그리곤 서신을 빙그르르 돌려보며 면밀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감정이라는 건 마법으로 인한 조작이 따로 있는 건 아닌지 요청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는 이 검은 의뢰서는 알고 있는 자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암살자가 우려하는 조작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 이미 당신에게 이걸 요청할 정도면 감정 같은 게 필요할까요? 당신이나 나나, 이 서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건데."

"그렇긴 하지만, 의뢰 대상이 너무나도 특이해서 말이지."

"특이하다고요?"

암살자가 주변을 돌아보며 조금 곤란하다는 의미를 내비쳤다. 헬레나는 그의 의중을 단번에 읽었다. 허리 아래에 내린 손에 파란빛을 모으더니 이내 그녀와 암살자가 있는 공간을 마법으로 가득 채웠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 주위로 이상할 만큼 적막한 정적이 깃들었다.

"의뢰 대상이 누구길래 그러죠?"

"······용사."

암살자의 말에, 헬레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그녀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녀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암살자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뢰인이 아니라, 암살 의뢰 대상이··· 용사라고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멈춰 섰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말보다 먼저 앞질러 버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혼란과는 달리 그녀가 걸어둔 감정 마법은, 여전히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차르륵

마치 예정된 순서라도 있는 것처럼 서신이 저절로 펼쳐졌다.

부드러운 마력의 기류가 봉인을 풀고 내용이 드러났다.

그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법은 진실을 밝히는 데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글자들이

헬레나의 생각보다 먼저 그녀의 시야를 점령했다.

『 용사가 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