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4 01: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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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지하는 '현실' 은, 인간의 감각（시각, 청각, 촉각 등）을 통해 전달된 신호를 뇌에서 '재구성'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것을 정말 '실재하는 현실' 로 불러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라 온다.
이에 대한 고민은 이미 수천 년간 철학의 중심을 관통해왔다.
임마누엘 칸트（wikimedia）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현상（Phenomena）이라 불렀다. 앞서 언급 했듯, '현상' 은 감각 기관을 통해 필터링된 정보를 우리의 뇌가 '재구성' 한 세계이다.
바나나에서 반사된 500~700nm의 전자기파가 망막의 원추세포를 흥분시키고, 이 자극을 대뇌에서 해석하며 '노란색' 이라 감각（qualia）한다.
그러나 자외선을 인식하는 꿀벌이나 초음파로 인식하는 박쥐는 동일한 사물을 다르게 인지한다.
결국 칸트는 필터를 거치기 이전의 '진짜 세계' 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진짜 세계' 를 현상과 구별하여 '물자체', 혹은 본질（Noumena）이라 정의하였다.
칸트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현실' 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 의 공통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꿀벌만의 현실, 박쥐만의 현실이 그렇듯 각자간의 현실이 존재하며 '진짜 현실' 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현실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우리 인간' 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 실체 탐구 : 궁극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간주하며, 이러한 진정한 현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 관념론（Idealism）이 속할 수 있다.
과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은 불완전하지만 수학, 과학과 같은 '우주 보편적 언어' 를 통한 우리 자연에 대한 해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보는 단단한 사과가 실제로는 원자, 전자들이 빠르게 진동하며 주변 전자기파와 상호 작용하는, 전자의 오비탈 구름과 중심의 원자핵이 자리 잡은 '무언가' 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수소 원자의 오비탈 모형（wikimedia）
이와는 달리 관념론에서는 진정한 현실이란 물질이 아닌 관념, 혹은 정신 그 자체로 간주한다.
누군가（결국 궁극적으로는 신과 같은 초월적 개념）가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이라는 관점이며, 조지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는 말과도 일맥 상통하는 입장이다.
（나） 의미 탐구 : 궁극적인 실체를 찾거나 정의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그룹이다.
우리가 '현실' 이라 믿는 것들이 우리에게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진정한 현실' 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실용주의（Pragmatism） 관점과도 연결된다.
유사한 관점으로 현실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간의 합의를 통해 정의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중요하고 성공적으로 작동하므로 사실상 진정한 현실과 다를 바 없다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에도 해당할 수 있다.
두 입장 모두 '존재' 자체보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기능에 초점을 맞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을 정의하려는 시도 대신 그것의 의미가 우리에게 어떠한 실용적인 차이점을 가져오는지, 혹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합의 내리고 의미를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진정한 현실' 이 창조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비유한다면,
과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사랑은 옥시토신, 엔돌핀, 도파민 등과 같은 호르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면 관념론에 따르면 사랑은 두 영혼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유대와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실용주의의 관점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며,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 차이에 따라 사랑의 정의를 고전적 개념에서 점점 확장해 나가는 것에서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을 적용해볼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슬슬 이 글의 제목이 '블록 우주（Block Universe）'인 점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가）와 （나）중 어떠한 것이 올바른지에 대한 판단은 제쳐두더라도,
비록 전문 연구자는 아니지만 과학에 한 발을 담근 '존재' 로서 과학적 실재론에 입각한 진리 탐구가 '인간' 인 나 자신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 중, '시간의 흐름' 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우리 우주의 근본적인 규칙 중 하나로, 모든 물체는 결코 광속을 초과할 수 없다는 자연 법칙（특수상대론）을 이야기해보자.
시공간의 사건 구조를 나타내는 light cone（wikimedia）
광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입자는 질량이 0인 광자（Photon）이다.
광자의 관점에서는 진행 방향으로 무한히 길이 수축이 일어나 모든 3차원 공간이 하나의 평면 상에 압축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무한히 시간 팽창이 일어나 시간의 흐름 또한 멈춰 있다.
즉, 시간은 더 이상 흘러가는 강물이 아닌, 얼어 붙은 강인 셈이다.
자연의 근본적인 규칙을 진정한 현실로 간주할 수 있다면, 결국 시공간（Spacetime）의 본질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 없이 '이미 존재' 하는 얼어 붙은 강인 것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흐른다' 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시공간을 관측하면서 발생하는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모든 장면들이 현상된 상태로 영사기 안에 영화 필름이 '존재' 하지만, 영사기가 빛을 비추면서 우리는 필름의 순서대로 관측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 이 바로 영사기의 '빛' 인 셈이며, 그 옛날 플라톤이 말했던 동굴에 비친 '이데아' 의 그림자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 이란, 이데아가 빛에 비쳐 생긴 그림자라고 생각하였다（wikimedia）
이러한 관점은 결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제시하는 '동시성의 상대성' 과도 연결 된다.
아인슈타인은 '지금 이 순간', '동시에 일어난 사건' 의 개념이 우주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두 관찰자에게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 순서가 뒤바뀔 수 있다.
'광속' 이라는 우주의 궁극적인 한계 속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이 정지된 상태야말로 우리 자연의 '본질' 일 수 있다.
즉, 우주는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 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한 우리 우주에 대한 해석이 바로 블록 우주론（Block Universe Theory）이다.
이것이 정말 '진실' 인가? 하는 의문점이 남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이 '흐른다' 고 인지하는 것일까?
다른 생물의 인지를 우리가 겪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 인류가 알기로는 '시간의 흐름' 은 인간의 종 특이성이 아닌, 거의 모든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생물들의 보편적 특징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실재론에 입각한 이야기를 한 김에, 이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이어가보면 결국 '엔트로피의 방향성' 으로 연결할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모든 자연 현상은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발생한다. 혹은,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보일' 뿐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에서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기억, 인지, 노화）이 이러한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성을 따르며, 결국 이와 같은 단방향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 으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가장 친밀하고 본질적이라 느끼는 '시간의 흐름' 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만약 과거-현재-미래가 이미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블록 우주' 가 진실이라면, 나를 '나' 로 존재하게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과거의 기억, 현재의 경험, 미래의 꿈은 그저 4차원 시공간에 '이미 새겨진' 흔적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나의 '자유 의지' 또한 이미 정해진 각본을 따라 연기하는 배우의 착각일까? 과거의 행복했던, 혹은 슬펐던 순간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며, 미래에 닥쳐올 운명적 사건 또한 결코 피할 수 없이 '영원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들은 어쩌면 허무주의적 생각에 빠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다음과 같이 느껴진다.
매 순간 흥미로운 스토리가 펼쳐지는 책을 읽는 '독자' 이면서 그와 동시에 그러한 내가 등장하는 거대한 책이 '이미 완결된 상태로 존재'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는 '등장 인물', 두 개의 강과 두 개의 현실을 넘나 들며 지적인 유희를 추구하고 싶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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