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 베스트2
용제
2025-04-23 10:14:08
158 0
저게 고대국가에서는 진짜 중요한거임, 고려왕가의 왕씨 계보가 끊기지 않고 제국의 부마국이 되는 것. 당연히 제국 치하가 되면서 몽골의 피가 섞이고 정치적 간섭을 받긴 했지만 일단 어디까지나 제국공주가 '시집' 와서 시댁이 되는 왕씨 집안의 소속이 되었거든.
이동
어디에적혀있을까
2025-04-22 20:41:34
46 0
1. 고려사 / 권25 / 세가 권제25 / 원종(元宗) 원년 / 3월 / 중국 남방 행재소에서 몽고 황제가 왕을 후대하다 http://db.history.go.kr/id/kr_025r_0030_0030_0090 - (전략) 황제의 동생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
어디에적혀있을까
2025-04-22 20:51:41
220
2. 고려사 / 권27 / 세가 권제27 / 사신의 찬 https://db.history.go.kr:443/id/kr_027r_0050 - 사신(史臣)이 찬(贊)하기를, “원종(元宗)이 세자였을 때에는 권신(權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였는데, 원[上國]이 죄를 물을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기꺼이 복속하지는 않아서 몽고(蒙古) 군대가 해마다 국경에 집결하여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왕은 부왕(父王)의 명령을 받들어 원(元)에 직접 입조(入朝)하여 권신이 발호하려는 뜻을 좌절시킴으로써 결국 등창이 나서 죽게 만들었다. 또 아리발가(阿里孛哥, 아릭부케)가 원 헌종(憲宗)의 적자로서 상도(上都)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길을 막고 있을 때 세조(世祖) 황제는 번왕(藩王)으로서 양(梁)·초(楚) 지방에 있었는데, 원종은 천명(天命)과 민심(民心)의 소재를 알고 가까운 아리패가를 버리고 멀리 있는 세조를 찾아갔으므로 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공주를 왕자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맺어서 동방의 백성이 100년 동안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였으니 이 또한 칭찬할 만한 일이다. (후략)
어디에적혀있을까
2025-04-22 20:56:27
210
5. 고려사 / 권35 / 세가 권제35 / 충숙왕(후)(忠肅王(後)) 6년 / 5월 / 정동행성이 백관들이 말을 탈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하다 http://db.history.go.kr/id/kr_035r_0170_0030_0030 - 무오 정동성(征東省)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토풍을 고치지 말라[不改土風]고 한 조서에 의거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백관(百官)이 말을 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용제
2025-04-23 10:14:08
158 0
저게 고대국가에서는 진짜 중요한거임, 고려왕가의 왕씨 계보가 끊기지 않고 제국의 부마국이 되는 것. 당연히 제국 치하가 되면서 몽골의 피가 섞이고 정치적 간섭을 받긴 했지만 일단 어디까지나 제국공주가 '시집' 와서 시댁이 되는 왕씨 집안의 소속이 되었거든.
rkgnl99
2025-04-23 14:20:50
80
본토에 있던 막내는 전쟁이 뭔지 모르니까 이런 저런 제안해 봐야. '조까' 지만 남송전쟁부터 여몽전쟁까지 몽케칸 따라다니며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쿠빌라이라면 막내보다 전쟁의 참상을 잘 아니,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말자는 애기가 좀 더 통할 공산도 크고. 당장 실적도 올려야 하는 처지고. 막말로 쿠빌라이랑 얘기해서 잘 안 풀렸으면 동생 찾아가서 2트 시도 해도 되는 거 아님? 근데 1트에서 얘기가 잘 되고 쿠빌라이가 딸도 준다고 하니 콜 해도 나쁘지 않지 않나.
dagdha
2025-04-23 10:24:32
21 0
[부연설명] 1231년 시작된 여몽전쟁은 28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힘에 부친 고려는 몽골에 항복을 하기로 하고 늙고 병든 고종 대신 태자가 북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몽골의 칸은 몽케였는데 그는 남송 원정을 위해 수도를 떠나 있었다. 태자는 그를 만나러 수천리 길을 갔는데 가는 중 고종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던 태자는 3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를 표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남송을 공격하던 몽케 칸이 급사를 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몽골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두쪽으로 갈라져 싸웠다.
dagdha
2025-04-23 10:24:38
210
[부연설명] 이때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나 그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당시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는 강했으나 몽골 본토와 중앙아시아의 몽골인으로부터 지지를 받던 아리크부카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선조가 아무도 정복 못한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쿠빌라이에게 큰 기회였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예전에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며 기꺼워했다.
dagdha
2025-04-23 10:24:45
280
[부연설명] 세자는 쿠빌라이에게 매우 과감한 항복조건을 내세웠다. '의관(풍습)을 유지한다. 조정에서 보내는 사신 외 다른 사신은 금한다. 강화도를 나와 개경에 돌아오되 그 일정은 역량에 맞춰서 진행한다. 압록강 유역의 몽골군을 철군한다' 등의 '항복은 하지만 우리는 우리 맘대로 살겠다'라고 할 수 있는 파격적인 항복조건이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한 나라를 그냥 얻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데다 후계자 싸움에서 큰 정통성을 얻게 되는 상황이었으니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 공략에 동원되었던 만주 지역의 동방 3 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도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개최,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dagdha
2025-04-23 10:24:52
360
[부연설명] 이후로도 쿠빌라이는 '지금 세상천지에서 고려만큼 대우받는 나라가 없다" 라고 생색을 낼 정도였다고 하며, 고려 왕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에게 항복하고 고려로 돌아가 즉위한 원종이 임연에 의해 폐위되자 압박하여 무진정변을 끝냈다. 또한 이후 몽골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편입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 "세조(쿠빌라이)의 뜻을 거역할 거냐?"라는 반대논리로 무산시켰다.
Gee라르
2025-04-23 14:18:27
7 0
충선왕부터 고려왕들이 사실상 원나라 칸의 외손주거나 친척이니까 원나라안에서도 서열이 높을수밖에 없음. 게다가 심왕이라는 직책도 겸해서 요동을 같이 통치하기도 함. 근데 이건 어디까지 고려왕조 이야기이고 원나라에 권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도 늘고 원나라에 잘보이는게 1순위가 되서 재물 바칠려고 고려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짐. 고려왕들은 고려왕인데 정작 고려에서 안살고 원나라 중심부에 가서 거기서 정치질하고 권세 누리는데 집중함. 고려왕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원나라 중심부 권력에 더 관심 많아서 왕자리 그냥 자식한테 물려주고 원나라에 관심쏟는 경우도 많았음. 고려왕조 기준으로는 만주지역을 다스리는 왕도 하고 역대급 권세를 누렸으나 나는 별로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라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