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또 올리는군요 -_-;
여전히 비평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노구찌님 삼국무쌍 완결 축하드립니다.


4화 꺽여진 날개


"넌... 바보였던거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는 카로니에. 모닥불은 이미 엄청난 비로 인해 꺼진지 오래였다. 차가운 감촉에 잠을 깬 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것은 떨어지는 비에 완전히 젖어서는 멀건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으으... 다젖었네. 추워..."

비를 피하기 위해 폭포 뒤 동굴에 들어온 카로니에와 그런 그를 따라온 소녀. 젖은 옷을 벗어 강하게 물을 짜내는 카로니에의 몸은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소녀가 그의 몸을 바라보고있자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반했냐?"

"..."

역시나 무반응. 대충 예상했지만 그래도 아쉬운건 어쩔 수 없었다.

"휘유~ 이걸 언제 내려간다냐..."

까마득한 아래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카로니에.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굳은살이 박힌 손을 잡자, 그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본다.

"이봐... 설마 진짜 반한거야? 난 너같은 어린애한테 관심 없다고."

"..."

갑작스레 아래로 뛰어내리는 소녀. 그리고 그 소녀에게 팔이 잡혀있는 카로니에. 아까 자신에게 잡혔던 그 힘없는 소녀는 어디가고 엄청난 힘으로 끌려간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카로니에는 그대로 끌려 떨어지고말았다.

"왜 이렇게 되는거냐고!!!"

그의 절규가 커다란 동굴에 울려퍼졌다.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은 카로니에. 적어도 자신을 잡고 뛰어내린 소녀도 같이 죽게될테니 조금은 덜 억울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자폭이라니. 해도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이미 늦었다.

"...응?"

슬슬 지면에 정면충돌하며 엄청난 충격이 올 것을 대비하고있던 카로니에는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뭐...뭐지?"

눈을 뜨자 지면이 바로 아래보였고, 자신과 소녀는 공중에 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치 바닥에 서있는 듯이 자세를 유지하고있는 소녀와, 양 팔로 머리를 움켜쥐고 움츠린 자세를 하고있는 카로니에. 순간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서 자세를 잡는다.

"크흠, 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무마시키려하는 카로니에였지만 오히려 그것에 신경쓰는건 그 혼자뿐. 소녀는 이미 땅으로 내려앉고 동굴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따라내려가 멀건히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어디가는거야?"

"..."

그저 바깥으로 걸어갈뿐이다. 따라나오자 아직 어두컴컴한 바깥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소나기였는지 비는 그새 그쳐있었다. 계속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소녀.

"이봐!"

어둠의 폭포 덕분에 들리지 않는건지 못들은채 하고있는건지 깨끗하게 무시하며 계속 걷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따라간다. 사실 어디로 가는건지 궁금한 마음도 없었던건 아니었다.

"그래, 어디든 가보자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폭포소리가 들리는 영역을 벗어났다.

약 세시간 후, 소녀가 발걸음을 멈춘곳은 아무것도 없는 숲.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조용히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킨다.

"뭐가있는데?"

자연스레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꺽여진 하나의 깃발. 그리고 깃발에 그려진 문양은 셉터 루넨의 문양이었다.

"어째서..."

믿을수없다는 듯이 천천히 한걸음씩 다가간다. 자각하고나자 비릿한 피내음과 역겨운 냄새들이 몰려왔다.

"어째서... 루넨의 깃발이 여기에..."

주변에 널려진 수많은 시체들. 워낙 규모가 작은 루넨의 군대였기에 얼굴을 아는자들이 태반이었고, 그덕분에 특별한 증거 없이도 이들이 루넨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반쯤 불타 까맣게 그을린 나무들, 무너진 막사들과 거대한 바위조각들, 바닥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과 말발굽들이 방금 전까지만해도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을거라는 예상을 가능하게해주었다.

"설마...설마...!"

미친 듯이 시체를 헤집고다니며 실성한사람처럼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카로니에.

"아...!"

한곳에서 붙박힌 듯 멈춰버린다. 한곳만을 바라보고있는 시선. 그곳에는 카로니에와 같은 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쓰러져있었다. 몸에 나있는 수많은 검상. 그리고 가슴 중앙에 박힌 기다란 바스타드소드.

"바...바쿤..."

믿을 수 없었다. 항상 전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신뢰를 받아오던 바쿤. 그 어떤 위험,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만은 피해갈 듯 보였거늘, 자신의 기대는 너무도 허망하게 부숴지고 말았다.

"그...그렇다면 세라피엔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본다. 반쯤 실성한 눈빛.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시체를 헤집으며 세라피엔을 찾으려 해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세라피엔..."

...

"후우..."

입이 간질간질했다.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싶었다. 부질없는 한숨만을 내뱉기엔 속에 쌓인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틀새에 두명의 무덤을 만든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아버지의 무덤을, 두 번째로는 절친한 소꿉친구이자 정직한 동료이자 충성스런 부하였던 바쿤의 무덤을...

그의 가슴에 박혀있던 바스타드소드. 그 검의 검신에는 '테온' 이라고 쓰여있었다. 상당히 무거운 검. 그 검을 한손으로 가뿐히 들어 휘둘러본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검.

"테온... 네 놈이었군. 이걸로 한방 더 먹었는걸? 이번에야말로... 네 놈의 가슴에 이 검을 박아주마."

달빛을 받아 빛나는 차가운 검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증오를 머금은 사신의 얼굴.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그의 눈엔 어떠한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역시나 소녀가 자신의 앞에 서있다.

"루넨으로... 가자."

씹어뱉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다.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뜻은 전달된것만같았다. 아니, 전달되었다.

저벅저벅

그다지 험난하지는 않은 여정. 어둠의 폭포에 너무도 쉽게왔듯이, 루넨에 가는길도 너무 쉬웠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루넨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실을 확인하고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날 반기고있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수십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있었다. 점점 더 느려지는 발걸음은 곧 멎어버리고 말았다.

"...?"

앞에 가던 카로니에가 멈추자 따라 멈춰 가만히 기다린다. 떨리는 카로니에의 몸. 그 자리에 붙박힌채 움직일줄을 모르는 듯 서 있었다. 떨림이 점점 심해진다. 그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자신에게까지 들리는것같았다. 아무런 전후 사정도 몰랐지만, 왠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것만같은 기분. 안심시켜주고싶었다.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 검을 내려놓는다.

등에서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감촉. 소녀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잊고있었다. 여성의 몸의 부드러움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맞닿아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상태로 있을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의 떨림이 그녀에게로 전해질 것이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저리 치워..."

목소리마저 떨려나온다.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에 스스로 놀라는 카로니에. 그러나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은듯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손으로 소녀를 밀어낸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 또다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그를 감싸온다. 하지만 그 상태로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자..."

다시금 천근처럼 무거운 한 걸음을 떼어낸다. 저 멀리 보이는 루넨의 외곽. 두려운 마음을 안고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걸음을 떼어내고 있었다. 이젠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래... 시간이 되었다.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어.'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카로니에의 뒷모습을, 여느때와 같이 소녀가 바라보고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띈 채. 하지만 앞만 보고 걷고있던 카로니에는 그 미소를 볼 수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휴우..."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카로니에는 드디어 셉터 루넨의 정문앞에 도착했다. 다시한번 심호흡을 한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하지만 평화로운 루넨의 모습. 아니, 평화롭다기보단 너무도 조용했다.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간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그러다 마침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유일하게 들리는 고동소리.

'시끄럽다...'

-와아

"!!!"

작았지만 분명히 들렸다.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는 걸음. 어디...어디지?

"아..."

마을 광장. 모여있는 몇몇의 사람들.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젠장... 나도 울보 다됐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유래없이 평안했다.

그가 루넨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라피엔의 생사를 확인하는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집에...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

지금 자신과 대화를 하는자는 바쿤의 부관이었다. 처음 이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적지 않은 의심을 했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던거지? 루넨의 부대가 거의 전멸할정도의 전투가 일어났는데, 자신의 상관인 바쿤이 죽는 상황에서도 살아서 루넨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 추궁하리라고 다짐하며 온 그였다. 하지만 정작 그를 본 순간 카로니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려나간 채 아물지 못해 핏자국이 남아있는 오른팔. 왼다리가 있어야할 자리도 의족이 대신하고있었다. 자책감이 들었다. 한낱 부관이 이정도가 될 때까지 싸웠는데 그때 자신은 어둠의 폭포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현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수고했네. 가봐."

"예."

힘없이 뒤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다. 재빨리 세라피엔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카로니에. 세라피엔도 무사하진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쾅쾅!

"세라피엔!"

쾅쾅쾅!

세라피엔의 저택. 쉬지않고 달려온 탓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런건 개의치 않았다. 문이 부숴져라 두드리며 부르자 곧 문이 열렸다.

"누구시죠?"

낯이 익은 여자. 순간 멈칫 했던 카로니에는 그녀가 이곳의 하녀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어둠의 폭포에서 내몰려 루넨의 최외곽이던 이곳까지 몰리는 바람에, 카로니에와 바쿤은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지만 세라피엔의 본가는 애초부터 이곳이었기에 건재한 모습으로 그녀를 반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서 버틸 수 있게된것만도 세라피엔이 자신의 재산과 사병을 전부 내놓았던 것이 컸다.

"아, 카로니에님이시군요. 아가씨가 기다리고계십니다."

"아..."

갑작스레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하녀장은 그런 카로니에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세라피엔의 방으로 향할뿐이었다. 거대한 저택엔 고요함이 감돌고있었다. 세라피엔의 부모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항상 이 넓은 집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세라피엔의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커텐에 가려져 어슴푸레한 빛만을 내려주고있는 창문. 침대에 누워 그런 창문을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라피엔.

"세라피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흠칫 하더니 이쪽을 돌아본다. 그녀의 눈동자가 놀란 듯이 커진다.

"카로...니에?"

겨우 이틀만의, 그러나 억겁의 시간보다 더 오랜만의 재회였다.

그녀의 몸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절단을 해야할정도의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팔이 부러졌고, 갈비뼈도 몇 대 나갔으며 제대로 걷기도 힘들만큼 체력이 약해져있었다. 몸에 난 절상으로 인한 상처들도 어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저정도의 상처라면 흉터가 상당히 많이 남으리라. 가슴 한켠에서 울컥 하곤 뭔가 치밀어 오르는것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가슴아프게했던 것은, 항상 열의에 가득차있던 그녀의 눈빛에 이젠 공허함밖에 남지 않았다는것이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너무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기다리고 있었어. 이거..."

말하기도 벅찬 듯 한 마디 한 마디 짜내듯이 내뱉으며 무언가를 건낸다.

"이건..."

단검. 바쿤 가의 문장이 새겨진 단검이었다. 광석 '리디스'를 이용해 만든 단검. 철광석과 함깨 채굴되는 광석인 리디스. '쓸모 없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그대로 이름으로 붙을만큼 이름 그대로 쓸모 없는 광석이었다. 하지만 사실 리디스는 '쓸모 없는' 광석이 아니었다. 왠만한 불에는 녹지도 않고, 그 경도도 상상을 초월해 제련이 불가능. 그렇기에 쓸모 없다고 불리는 광석이었다. 그럼에도 바쿤 가의 속한 대장장이 랄프는 이것을 제련해내는데 성공했다. 육십평생을 쏟아부은 노력이었다. 이 단검을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랄프는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고, 덕분에 리디스의 제련법은 다시금 묻혀버리고 말았다. 항상 바쿤이 소중히 여기던 단검. 세라피엔이 건네주는 단검을 보자 바쿤의 죽음이 새삼 눈앞에 떠오르는것같았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눈을 감아버린다.

"날개는... 꺾였어..."

방을 나서는 카로니에의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세라피엔의 한마디. 그 절망적인 한마디에 카로니에는 어떠한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세라피엔의 집에서 나온 그의 발걸음은, 자신의 집이 아닌 회관으로 향하고있었다. 무언가를 쫓는 듯이, 무언가를 바라는 듯이.

끼이익

역시나 예의 소리를 내며 음산하게 열리는 문. 휑 하니 비어버린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항상 셋이서 웃고, 떠들고, 루넨의 미래를 걱정하던 이곳. 이젠 둘밖에 남지 않았다. 바쿤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난... 무얼 바라고..."
'이곳에 온걸까.'

고요한 회관이 자신을 짓누른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나온다. 해가 떨어지며 붉은 빛을 만들어내고있었다. 그래,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어떠한 짓을 해도 점점 우울해졌다. 이대로라면 아늑한 집마저 자신을 짓누를지도 모른다. 아니, 짓누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딱히 갈곳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하하... 우울한걸..."

자조적인 웃음을 띄며 휘적휘적 걸어간다. 루넨은 거의 침묵상태에 빠져있었다. 다들 이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것이겠지. 덕분에 분위기는 한없이 추락. 그렇다고 이 분위기를 전환할 수도 없었고, 전환할 생각도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집에게 하는 인사. 어차피 반겨주는이 없는 집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넌 왜 여깄는거냐?"

"..."

잊고있었다. 어둠의 폭포에서 데려왔던 소녀. 이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예의 무표정을 띈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모르겠다. 난 지금 심란하니까 건들지 마라."

그리곤 허름한 침대 위로 드러누워버린다. 눈을 감자 방금전에 했던 말이 되새겨진다. 원래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녀석이었지만 이럴때도 반응이 없으니 갑자기 불안해진다. 혹 말을 심하게 한건 아닐까.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걱정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 소녀에게는 고운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항상 차갑고 냉정한 말투.

'다 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겠지...'

"에잇! 도대체 하고싶은게 뭐야? 얼른 말해. 난 자고싶으니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여전히 무반응. 그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너 말 못하는거냐?"

"..."

"알아듣지도 못해?"

"..."

어째서 그런걸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했던걸까. 말을 하지 않는다는걸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놓친것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자를 가리키며 묻는 카로니에.

"자 따라해봐. 이건 '의자'야. '의자' 알았어?"

"..."

"의자!"

"..."

"의자라니까! 의자!"

"...의자."

"그래그래, 의자... 가 아니고! 드디어 말했구나!"

소녀와 만난지 한참만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 앳된 티가 나는 듣기좋은 미성이었다.

"그럼 이건... 침대! 따라해봐, 침대."

"침대"

"와..."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 하나 가르쳐주자 오히려 재미가 붙은건 카로니에 쪽이었다.

"그럼 저건...읍!"

동공을 치켜뜨며 손으로 입을 가리는 카로니에. 나오려는 기침을 속으로 삭인다. 비록 피를 토해내지는 않았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피내음이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소녀를 바라보자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뭔가 반응을 기대한것도 아니었지만.

"이건... 단순한 과로가 아니었던건가...?"

그러고보면 이틀전에도 피를 토한적이 있었다. 그 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그 후로도 괜찮았기에 역시나 잔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와서 다시금 피를 토하게되니 덜컥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행은 겹쳐서 오는건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답답했다.

"침대"

"응?"

그녀의 뜬금없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멈칫하던 카로니에. 잘했다는 듯이 칭찬해달라는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킥, 넌 생각없이 살아서 정말 좋겠다. 이 녀석아."

"침대"

"그래 그래, 내일은 함께 세라피엔을 찾아가보자. 이러고 있어봤자 해결되는건 아무것도 없어."

"침대"

"그만하고 네가 여기 누워서 자라. 그다지 푹신하진 않지만 바닥보단 나을거야."

나름대로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 침대를 넘긴다. 하지만 소녀는 그다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침대"

"...누우라면 좀 누워서 그냥 자!"

"침대"

"..."

이미 어두워져있는 바깥을 힐끗 바라보곤, 바닥에 이불을 깔아둔 채 누워버린다. 눈을 감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무얼 하든 신경 쓸 필요 없다. 자신은 분명히 침대를 넘겼으니 바보가 아닌이상 가서 자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한다. 하지만 바쿤과 세라피엔에 대한 생각으로 쉽게 잠들 수 있을것같진 않았다.

"잘자라."

...

다음날 아침. 조촐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요리와는 완전히 담쌓은 인생이었지만, 어둠의 폭포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하인의 손을 빌릴 처지가 안되었기 때문에 한 끼 식사정도는 마련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다양한 요리를 해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실력에 어느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카로니에. 하지만 그 자부심은 눈앞의 소녀에 의해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저기... 안먹어?"

"먹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음식을 먹고있는 자신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녀. 그녀는 처음부터 눈앞의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열심히 먹고있는 자신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걸 먹는게 신기하다는 뜻이냐...'

"먹어?"

"..."
'맛있는데...'

그래도 저런 눈빛을 마주하고 먹으려니 자꾸만 자신이 잘못됬고 소녀가 정상인듯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맛있는데...'

결국 얼굴을 맞댄 채 아침식사를 한건 카로니에뿐이었다.

똑똑

"오셨군요."

"예, 세라피엔은...?"

"계십니다. 들어오시죠."

소녀와 함께 세라피엔의 집을 찾은 카로니에.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하녀장에게 줄 음식을 싸온채로.

"드시고나서 감상평은 필수입니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채 세라피엔의 방으로 향한다. 굳게 닫힌 문 앞에 도착해 돌아서 소녀에게 다시금 신신당부한다.

"아까 가르쳐준거 기억하지? 그대로 해야해."

가르쳐준 인사법을 다시금 강조한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방문을 연다. 어제와 비슷한 광경. 아니, 어제보다 더욱 삭막한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세라피엔의 모습이 보이자 가까이 다가간다. 악몽을 꾸고있는지 표정을 찡그린채로 자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깨워야하나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자는 것을 깨우는건 그다지 좋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돌렸다. 채 몇걸음 떼기도 전에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카로니에 왔어?"

"...내가 깨웠나."

다시금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본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녀는 별로 신경쓰는것같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 어느새 잊고 있었다. 신호를 주면 인사를 하도록 말해두었는데 예상 외로 세라피엔이 자고있는바람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스 타이밍!'

입밖으론 내지 않았지만 소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카로니에였다.

"저 애는... 누구야?"

들려오는 질문에 세라피엔의 눈을 바라본 카로니에는 그녀의 눈빛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공허했던 눈빛은 간데없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채 소녀를 바라보고있었다. 하지만 그가 당황했던건 단순히 그녀의 눈빛이 변해서가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어린 시절에는 자주 저런 눈빛을 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 그녀에게서 저런 눈빛을 찾아볼 수 없게된 때는 자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분명히...

'키루아가 죽은 다음부터였지.'

나이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는 오빠를 가졌던 세라피엔. 그의 이름은 키루아였다. 어릴때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던 카로니에는 일찌감치 철이 들었고, 나이차가 심했지만 키루아와는 굉장히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있었다. 그가 어렸던 시절엔 어둠의 폭포를 노리는 셉터들의 연합이 쳐들어왔던 전시였다. 대대로 무가의 자손이었던 바라 자연히 키루아도 전쟁에 참가하게되었고, 그의 참전한 전투는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금새 그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빠르게 이름을 알려나갔다. 모두들 그가 나중에 큰 일을 벌일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 적 연합의 총 공격이 이루어졌던 그 전투에서 키루아는 전사하고말았다.

키루아를 죽인 자가 누군지 세라피엔에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카로니에는 알고있었다. 그는 7살부터 셉터의 모든 일을 알고있기를 강요받았으며, 그에게 루넨에 대한 비밀이란 없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키루아를 살해한 자는 다름아닌 이온의 전사인 테온.

그의 이름이 떠오르자 카로니에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오른다. 잡생각을 접고, 세라피엔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어둠의 폭포. 소녀와의 첫 만남. 바다의 눈물. 산의 중턱에 있던 초원.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는 묵묵히 듣고만있었다.

"그렇게해서 여기로 돌아온거지."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듣고있던 세라피엔의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애 이름은 모른다는거네?"

"그렇지."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그러고보니 이름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애 정말 귀엽다."

예의 눈빛을 지은 채 말하는 세라피엔의 표정은 조금 슬퍼보였다.

"카로니에..."

"응?"

"내일 함께 바쿤에게 찾아가자."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를 띄운다. 밝은, 하지만 내면 구석에 어둠이 서린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는다. 이제 그만하자는 무언의 의사표현. 하지만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힘들고 무기력하겠지만, 그녀는 항상 어딘가에 집중하면 의욕이 살아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가르치는걸 상당히 좋아했다. 약 18년을 친구로 지내며 터득한 그녀의 성격이었다.

"세라피엔, 부탁이있어."

가만히 눈을 감고있던 그녀가 눈을 뜨며 카로니에를 바라본다.

"아까 말했듯이 이 애는 언어를 몰라. 그러니 네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

급하게 말을 끝마친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의 그녀라면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거절당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하여 소녀를 맡기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좋아."

"어째서? 얘 기억력도 좋아서 가르쳐준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얼마나 재밌는데!... 가 아니고, 뭐라고?"

"알았다구, 가르쳐줄게."

의외로 간단히 승낙하는 그녀의 모습에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럼 부탁할게. 나는 셉터의 일 때문에..."

사실 하는김에 여러 가지 조언을 듣기위해 말을 꺼냈지만 셉터 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마자 거부감이 생기는 그녀의 표정을 보곤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인사를 남기곤 재빨리 방을 빠져나온다.

"후우..."

구름 한점 떠있지 않은 맑은 하늘. 눈부시게 푸르른 색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신에겐 그 푸른색마저 슬프게만 보였다.

"그럼... 이제 루넨 재건사업을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