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저녁은 상당히 맛있었다. 적당히 익혀서 약간 데친 오믈릿 하며, 우리 마을 토박이들만이 아는 프랭크 버섯찜... 거기다가 오늘 잡은 소로 만든 비프 스테이크까지... 정말 배터지게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마치 걸신들린듯 먹은지라, 배가 래미안산만큼 불룩 튀어 나왔다. 예의, 법도, 그런 것 모두 잊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맡긴 채, 나는 허겁지겁 포크를 휘두르고 나이프를 썰었다.

영주님이 내주신 방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물침대에 벌러덩 자빠졌다. 물컹거리는 느낌이 온 몸에서 느껴져 왔다. 뭐랄까, 너무 부드러워서 온 몸이 극도로 떨린다.

" 아 좋다."

이대로 꿈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이미 배는 가득 차서 숨쉬기조차 곤란하고, 거기다가 아까 칼을 휘둘러 대서 온 몸이 쑤시고... 그래, 이대로 꿈 속으로... 꿈 속으로...

똑똑.

젠장.

막, 꿈나라로 빨려들 것만 같을 때에 갑자기 방문이 두번 두드려 졌다. 귀찮았지만, 어쩌랴. 손님의 신분인데. 저런 방문을 거부해서는 아니되지. 그럼.

" 누구세요?"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대충 잠옷을 걸쳐 입은 뒤에 문 가까이 다가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문 저 편에서 상당히 얇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조금 전에 들어본 목소리다.

" 나야, 얼른 문 열어."

" 나라니?"

괜히 모른 척 한 번 해볼까나?

" 너, 죽는다."

" 어허, 언제 봤다고 벌써부터 욕질이야? 거기다가 죽이겠다고? 살인미수죄로구만?"

" ...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성난 생쥐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렸다.

" 알았어, 알았어. 자, 들어와."

문을 슬쩍 열어주자 파자마 차림의 로즈가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막, 머리를 감았는지 빨간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머릿결은... 굉장히 좋은 편이군.

" 들어가지 못 할 법 없지?"

" 어? 그게 무슨 말..."

" 좋아."

로즈가 다짜고짜 나를 밀쳐냈다. 원, 여자가 뭐 이리도 힘이 센지. 나를 퉁겨낸 그녀는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세찬 소리를 내며 문을 꽝 닫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흠, 아까도 느낀거지만 솔직히 예쁘긴 예쁘다. 근데 저렇게 기가 세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니... 별로 내키지는 않는 레이디다.

"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건데?"

" 이렇게 노려보면 적어도 너가 움찔해서 달아나 줄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거 보니 아주 작정을 하고 내 방으로 왔구나?"

" 흥, 작정이랄 것 까지야."

어어? 왠지 내가 말싸움에서 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살면서 내가 말싸움에서 밀리는 거는... 거의 유례를 찾을 수가 없는 일인데. 이녀석... 한 배짱 하는군.

" 무슨 일이야?"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대답을 안하는게냐?

나는 한참동안 로즈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노려보고 있어야지 로즈가 약간은 기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 했다. 그녀는 한층 더 기고만장해진 태도로 내게 밀어붙혔다.

" 우리 집, 방에 주인인 내가 드나드는데 누구 허락받을 일 있나?"

" 그야 그렇지만... 나는 손님의 자격으로 이 방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

" 그 권한을 부여한건 바로 우리 집안이야."

" 그치만..."

" 시끄러워. 내가 온 이유를 말해주지."

정말 외모와는 달리 입이 더러운 것 같다. 음, 나같이 입이 걸레인 사내녀석이 이런 말을 하니까 아주 조금은, 아주 조금... 은 낯이 간지럽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마이레르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레이디가 저런 모욕적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는거지!

" 간단히 말할게. 설마 벌써 나와의 약속을 까먹고 있는 건 아니지?"

" 너와의 약속이라니...?"

로즈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발을 둥둥 굴리며 내게 사납게 물었다.

" 벌써 잊은거니?"

"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나는 너랑 13년 만에 만난 건데 말이야."

" 실망이다, 레온."

" 어? 뭐가?"

갑자기 그녀는 나를 죽일 것만 같은 기세로 노려보았다. 아까보다도 더욱 더 강렬해진 기세로.

" 좀 이해하기 쉽게 말을 해줘. 그래야 내가 생각을..."

" 너희 아버지는..."

" 뭐라고?"

" 네 아버지가 내게 약속하셨어. 그 자리엔 너도 있었고."

" 무슨 약속?"

그녀는 지금까지의 그 화난 표정을 갑자기 풀더니 내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그리고선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어? 이렇게 가까이 오면... 여자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건 처음인데... 이야, 정말 이쁘긴 이쁘네. 그치만 이 눈만큼은... 너무 느끼해, 아니 도도하다고 해야 하나?

" 오늘은 결판을 봐야겠어."

" 뭐..."

그녀는 싱긋 웃더니 냉큼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선 내게 손짓을 하며 착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 따라와."





" 근데 말이야."

" 응? 뭐가?"

" 어떻게 초면부터 반말을 그렇게 찍찍 쏴댈 수 있는거냐?"

한참을 걷고 있던 로즈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내게 사근히 답했다.

" 내 특기거든. 초면인 사람에게 딴지 걸기."

" 오, 그러셔?"

비웃음 섞인 조롱을 찔러준 나는 대화를 끊고선 다시 주의를 기울이며 로즈를 따라갔다. 난 밤 눈이 매우 어두운 편이다. 언제부터였지? 하여간, 어릴적 언제 부턴가 눈이 조금씩 조금씩 안 좋아지더니 요즘은 밤에는 거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해결책은 있다. 그란트 아저씨가 지어준 특제 약을 먹고 30분만 자면 그래도 밤눈이 조금은 좋아지는데, 지금은 그 약조차도 먹지 않았고, 거기다가 충분한 수면도 취하지 않았으니 밤 눈이 밝을 수가 없었다.

대충 손을 휘저어 가며 그녀 뒤를 얼마간 따라갔다. 로즈는 따라오라는 말을 한 후로는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따라가냐고? 안 가면 얻어 맞을 것 같거든.

" 다 왔다."

" 엉?"

"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꼼짝말고 기다려."

" 알았어."

밖이라 그런지 쌀쌀했다. 밤바람은 옷깃을 제대로 여물지 못한 나를 계속해서 강타했다.

얼마간 있어도 로즈가 오질 않아 나는 흙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 땅과는 달리 하늘의 풍경은 몹시 잘보였다. 저기, 하나 떨어지는 별동별. 그리고 수없이 많은 별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보름달. 음, 오늘은 왠지 보름달이 커 보인다. 크레이터도 몹시 잘 보이고... 내가 눈이 좋은 건 아니지만 정말 잘 보이는데?

갑자기 주위가 확 밝아졌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살폈다. 왜 주위가 밝아졌는고 하니, 로즈가 횃불을 들고 여기 저기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어? 이곳은... 아까 그 연무장이잖아?

" 왜 이런 곳에..."

내가 로즈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로즈는 무엇인가를 들어서인지 나를 바라보았다.

" 뭐라고?"

" 왜 여기에 왔냐고."

" 아직도 기억 못 하겠니?"

" 그래, 기억 못 하겠다. 어쩔래?"

" 으휴, 널 믿은 내가 바보 천치 오크 레이디지."

" 흥, 넌 오크 레이디의 범주에도 들지 못 할걸. 적어도... 그래, 차라리 드워프 레이디가 낫겠다. 아니면, 고블린정도?"

" 뭐라고? 너 말 다했어?"

" 그래, 다 했다. 어쩌시려구요?"

" 으으... 너어..."

로즈는 횃불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막 달려들 듯한 기세를 취하다가 갑자기 그 기세를 거두었다. 휴, 십년 감수했네.

" 너, 나를 무시하는데."

" 무시할만하지."

" 좋아. 언제까지 무시하나 보자고."

그렇게 말한 로즈는 자신어린 태도로 연무장 가운데 섰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무얼 하나, 하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로즈는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빙긋, 싸늘한 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파자마의 단추 하나를 풀렀다.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하나 더... 어? 어? 저, 저기. 거기까지 풀러버리면...

" 야, 야? 뭐 하는거야?"

" 넌 죽었어."

" 뭐라고?"

그녀는 내 물음에도 답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더니 갑자기 치마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뭐 하는거야!

치마의 단추마저 모조리 풀러버린 그녀는 이제 마지막 관문을 향해 치달았다. 그녀는 온 몸의 파자마를 모두 집어 던졌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두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내가 양심이 없는 남자는 아니다. 혹자들은 이런 좋은 기회를 어째서 놓치냐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르다. 왜냐고? 나는 백일화의 기사의 피를 이어받은 레이디를 살피는 나이트니까!

" 놀고 자빠졌네."

" 다 널 생각해서 보질 않는거다. 어서 다시 입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날 당황시킬려고 그런 짓을 했다면 나 너한테 약간은 실망했다."

" 이런 걸 보고 혼자서 잘 논다... 라고 하는건가?"

" 너, 한 번만 더 날 골려봐. 그땐 이 손 내려버릴테니까."

" 손 내리세요, 똥 배짱 기사님."

" 한 번만 더..."

" 정말 잘 논다. 극장 광대짓이나 하지 그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두 손을 내리고 나는 눈을 떴다. 절대로 로즈의 나체가 보고 싶어서 손을 내린 것은 아니다. 단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응? 뭐지, 저게? 남자 옷을 입고 있잖아? 그것도... 저 복장은...

" 왜? 안 어울려?"

" ... 너 무슨 생각 하는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저 복장은 마치...

" 약속을 시행할 때가 왔어. 얼른 칼 집어."

설마...

" 나, 로즈마리 부르노어는 레온 조나단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