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새끼가 내소설 별점테러하고 갔네 ㅅㅂ ㅋㅋㅋ 추천제도가 이래서 좋다니깐




#12.

도널드는 자신의 새하얀 검을 가볍게 휘둘러서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검신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냈다.

뒤를 돌아보니 로버트가 엎어진 곳에서 피가 꾸역꾸역 솟아나고 있었다. 마치 끝을 모르는 분수처럼 계속 흘러나와 방안에 깔려있는 카펫까지 벌겋게 물들였다.

“쯧.”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손을 조금 과다하게 썼군. 도널드는 입맛이 쓴 것을 느끼면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한번 로버트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축하드립니다. 사령관님.”
도널드가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스틴이 고개를 숙이면서 축하해 주었다.

“축하는 자네가 받아야지. 자네가 전부 준비한 계획인데 말이야.”

“아닙니다.”

“그나저나, 아들놈은 잡았어? 그 노튼 이라는 놈 말이야.”

“예. 자기 방에 있더군요. 이실라가 가서 잡아왔는데……. 좀 정신이 약간 이상한 모양입니다.”

“정신이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글쎄요. 자신만이 진짜 사람이라느니, 자신을 빼고는 전부 숫자에 불과하다느니……. 이상한 말을 자꾸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가만, 노튼이 기억 상실증에 한번 걸렸다고 하지 않았었나?”
더스틴과 그림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튼은 반년 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했었다.

“예, 하지만 그 ‘저주’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권력과 재물을 광적으로 탐한다는데, 노튼 네스우드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열심히 자기 아버지 말을 따르는 청년 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엔 그랬겠지. 한번 내 앞에 대려와 보게나.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아주 궁금한데 말이지.”

“지금 말입니까?”

“지금.”

“알겠습니다.”
더스틴은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나려 했다.

“아, 그리고 더스틴.”
무엇인가 생각난 도널드가 다시 더스틴을 불렀다.

“예.”
물러나던 더스틴이 다시금 그에게 다가왔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누가 죽였는지도 알아보게. 로버트가 지시를 했어도 그가 직접 칼을 들고 죽인 것은 아닐 걸세.”

“알겠습니다.”













습기 차고 어두운 감옥의 한 방에 도널드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더스틴이 건네준 보고서가 들려있었는데, 그가 알아보라고 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피브릴 이라는 자가 눈에 띄었는데, 다른 이를 죽인 현장에 있었던 이 죄수는 그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사형장에 같이 끌고 와서 그만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를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던 것이거나, 아니면 그를 괴롭히고 싶어 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도널드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 가능성 높다고 생각했다. 고민만 했다면 사형장을 데리고 오지 않아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말쑥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밧줄에 묶이고, 경비원들에게 팔꿈치를 제압당한 채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어디서 심하게 얻어맞았는지, 이곳저곳 멍이 심하게 들어있었다. 아마도 그의 부하였던 자들이 그를 괴롭힌 듯싶었다.


노튼 네스우드.
그였다. 도널드 자신이 그를 이리로 부르라고 했으니 확실할 터였다.

“자네가 노튼 이군.”
도널드가 말했다.

“일단 앉아보게. 자네에게 궁금한 점이 많으니깐 말이야.”
그가 말하자 경비원들이 노튼을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어디보자. 죄수를 죽이라고 시킨 사람은 자네 아버지지만, 실제로 죄수를 처형한 사람은 자네로군. 맞나?”

“.......”
노튼은 도널드를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후후. 입을 열지 않겠다 이건가? 좋아......”
도널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의자에다 걸면서 말했다.

“난 전장에서 꽤 오랜 세월 구른 사람일세. 그 세월 동안 포로의 입을 열수 있는 방법 수 만 가지를 알아냈지. 자네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겠다면, 나는 그 방법 들을 한 가지씩 자네에게 체험시켜 줄 수밖에 없네. 알겠는가?”

“......”
노튼은 그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재갈을 물리지 않았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경비원. 자네 혹시 단검 같은 거 없는가?”

“예, 있습니다.”
경비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차고 있던 호신용 단검 하나를 도널드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네.”
도널드는 그 단검을 이글이글 불타는 횃불에 가져다가 달구었다. 차가웠던 단검은 불길에 닿아서 자신의 온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단 가볍게 이것부터 시작하지.”
단검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도를 계속 받아들이다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듯 부분부분 벌겋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도널드는 뜨겁지도 않은 듯 그 단검을 계속 횃불의 불길에 가까이 했다.

“난 말이지. 인두 같은 것을 왜 고문할 때 쓰는지 모르겠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후후후,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 좋네, 일단 맛을 보실까.”
그렇게 말한 도널드는 뜨겁게 달궈진 단검의 검면을 노튼의 뺨에 대었다.

“크으으……으아아아!”
노튼은 입을 열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는 단검을 한참동안이나 떼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노튼이 눈이 뒤집히면서 거품을 물려고 하자, 그때서야 도널드는 단검을 떼었다.

노튼의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부어올랐다.

“어떤가, 이제 입 좀 열 생각이 생겼나?”
도널드는 노튼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흐흐흐…….”
그는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좋아. 아직도 이야기 할 생각이 없는가 보구먼.”
도널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단검을 다시 횃불 가까이 대었다. 그러자 노튼은 기겁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말할게. 말할게요!”
노튼은 콧물까지 훌쩍거리면서 겁에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아직 내가 봤을 때 자네는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이번에는 단검이 노튼의 오른쪽 뺨에 닿았다. 뺨에 있는 살갗이 타들어가면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노튼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제발…제발......”
압도적인 고통 앞에 노트는 몸을 꿈쩍 거리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꿈틀대던지, 경비원들이 황급히 다가와 노튼을 붙잡아서 강제로 의자에 앉히지 않았다면 단검이 그대로 얼굴을 그어 버릴 뻔 했다.

“이제 좀 말할 용기가 생겼나?”
도널드는 단검을 떼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응시했다.

“무엇이……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다 말할 테니 제발…….”
심문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빨리 질문해 달라는 뉘앙스를 풍긴다면 어느 정도 질문할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고문 받는 사람이 충분히 고문에 대한 공포심을 느낀 상태가 아니면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도널드는 책상에 올려져 있는 보고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디보자, 자네는 죄수들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 자리에 앉아있었군. 맞나?”

“예, 예. 맞습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

“제 아버지, 로버트 네스우드입니다.”

“관리하던 죄수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는가?”

“몇 명밖에……정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죄수들은 정말 몇 명밖에 없습니다.”

“이름을 말해보게.”

“피브릴, 에드윈, 엠마, 다이스……. 이 정도 밖에는 모르겠습니다.”
엠마.
도널드가 원하던 이름이 마침내 나왔다.
일단은 침착하자.
노튼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공포감을 심어준 이미지 그대로 유지를 해야 했다.

“그 죄수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 보게.”

“전부 말입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런가?”
도널드는 다시 단검을 꺼내서 횃불에 가까이 대는 시늉을 했다.

“제발! 기억나는 거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가? 그럼 말해보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욱 재미있는 것을 체험하게 해줄 테니 각오하고.”

“일단……. 그 피브릴과 에드윈, 엠마는 서로 가족입니다. 그리고 다이스는 정육점 직원이구요.”

“가족 전부를 잡아넣은 건가?”

“예, 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브릴입니다. 에드윈은 피브릴의 동생이었고 피브릴이 체포될 당시 같이 체포된 놈이고, 엠마는 성문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잡혀왔지만, 그는 다릅니다. 사실 제가 피브릴을 압박하기 위해서 그들을 일부로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는 왜 다르지?”

“그…그는 상부에서 말한 ‘악마의 저주’에 걸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널드의 눈이 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노튼의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결정지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자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나?”
도널드는 단검을 다시금 손에 쥐는 척 하면서 노튼을 긴장시켰다.

“확실합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제가 그놈을 조사를 해보았는데, 한 반년 전쯤 기억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자네도 알지 않는가?”

“......”다시 노튼의 입이 다물어 졌다. 이번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 일 테지. 증거가 없지 않는 가, 증거가.
“좋아, 그럼 자네가 잡아왔다던 나머지 다른 가족에 대해 말해보게.”

“엠마와 에드윈 말씀이십니까?”

“그래.”

“엠마는 귀족 집안의 영애 였던 여자로 이곳에 정착한지 약 20년 정도 되는 중년 여성 이었습니다. 에드윈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꼬마아이로 피브릴의 동생입니다.”

“영애 였 던 자라니, 어떤 집안의?”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머지 조각들은 대부분이 다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쫓겨난 귀족 집안의 영애로 20년 전 이곳에 정착한 중년 여성.

자신이 그녀를 버려두고 도망 쳤을 때가 20년 전의 일이 아니었던가?

“확실하진 않지만……. 유력한 귀족 가문인 글랜 집안 이었던 것 같습니다.”

“골든 필드의?”

“예, 맞습니다. 골든 필드의 그 가문입니다.”

그녀가 맞았다.
엠마 글랜이 맞았다.
도널드는 뒤통수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깐 그녀는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에 말이다. 자신이 조금만 빨리 이 도시를 점령했었다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죽었습니다.”
도널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죽었다고? 어떻게 말인가?”

“제…제가 직접 처형했습니다.”
노튼이 직접 살해했다면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도널드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확 굳어졌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 마치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아니 눈앞에 있는 이 빌어먹을 놈이 사죄할 기회를 아예 걷어 차 버렸다.

그의 눈에서 조용한 분노의 기운이 솟아올라오기 시작했다.
저놈을 단박에 죽여 버릴까?
아니다. 그를 단박에 죽이면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놈을 다시 감방으로 데려가라.”
노튼의 표정이 밝아졌다.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는 다는 말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나에게 다시 데려오도록. 죄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살해한 살인범이니 사령관인 내가 직접 목을 벨 것이다.”

“예.”
노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자신을 죽인다는 말이 저렇게 쉽게 떨어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노튼이 뭐라고 소리치려 할 때 경비병의 억센 팔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쎄게 가격해 그를 기절 시켰다.















피브릴은 그가 머물렀던 거처에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먼지난다며 싫어했던 흙바닥도, 잿더미가 가득하게 들어차 있는 불 지피는 곳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만 엠마가 없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단 한 사람이 없을 뿐이지만, 그녀의 빈자리는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그 한 사람의 부재가 무거운 침묵이 되어 두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피브릴은 말없이 부싯돌을 부딪쳐 나무에 불을 붙였고, 에드윈은 입을 꾹 다문채로 걸레를 들고 침대들을 닦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들의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손님으로 온 사내였다.

문이 묵직하게 두들겨 지는 것을 듣고 피브릴은 작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처음 보는 중년사내가 서있었다. 그는 칼을 차고 있었다.

“혹시 이곳이 엠마라는 여성이 거주했던 곳 맞나?”
그는 초면에 반말을 사용했지만, 피브릴은 왠지 불쾌하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풍모가 그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맞습니다만.”

“나는 그녀의 오래전 친구라네. 자네는……피브릴 이겠군.”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하하.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나저나 이 집은 손님에 바깥에 이렇게 계속 세워 두는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가 차고 있던 검이 무서워서 그런지 집안에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브릴은 그를 비좁은 집 안으로 안내했다.

“고맙네.”
중년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한쪽 침대에다가 걸쳐 두었다. 그러자 외투 안에 숨어있었던 거무튀튀한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브릴은 저 갑옷을 한번 본적이 있었다. 자신을 감옥에서 풀어준 병사들이 입고 있던 그 갑옷과 똑같았다. 그럼 저 사내도 그 단체 소속인 것일까?

“아……안녕하세요!”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던 에드윈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중년 사내에게 인사했다.

“네가 에드윈이로구나.”

“네.”
이상했다.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에드윈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엠마를 찾는 것을 보아하니 엠마와 안면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 같았다.

“죄송하지만, 대체 누구십니까? 당신도 혹시 그 그림자라는 단체의 소속입니까?”

“아, 난 그 단체의 우두머리라네. 앉아도 되겠나?”
한 도시를 뒤집어 버린 단체의 수장 이라는 정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밝힌 그는 나무침대 한편에 앉았다.

“내가 여기 왜 왔냐하면……. 그저 자네들이 보고 싶었네. 그녀와 같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엠마 아주머니와 무슨 관계 이시기에…….”
피브릴은 중년사내가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일세. 엠마 글랜 이라는 여자와 한때 사랑의 도피를 했던 사람일세.”

“도피요?”
솔직히 황당함이 먼저 앞섰다. 도피라니? 그럼 왜 엠마 아주머니는 저 남자와 살지 않고 자신들과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네.”
이야기가 심각해 질 것 같았다. 에드윈을 내 보내야 하는가?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에드윈이 더 들어야 하겠지. 자신은 반년정도 같이 살았던 사람이지만, 에드윈은 자신보다 훨씬 오래 본 사람이 아니던가?

“혹시 골든필드 라고 아는지 모르겠군. 이 추운 베이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이지만 사실 기후는 완전히 딴판인 곳이라네. 따스한 햇볕이 일 년 내내 내리쬐고, 항상 풍년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작물이 덜 나온다면 바로 그 해를 흉년 취급을 해버리는 곳이네. 자네들이 알고 있는 그 엠마 아주머닌 그 곳을 지배하고 있는 영주 가문인 글랜 가문의 영애 였어.

나는 반면에 몰락한 더글라스 가문 출신이었지. 어찌나 가문이 쫄딱 망했는지,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나에게 남은 것은 대대로 물려온 이 검 밖에 남지 않았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보여주었다.

“새하얘요.”

“그렇지. 흰 검이라네. 꼴에 그래도 한때 잘나갔던 가문이었는지, 그렇게 귀하다는 프로즌 스틸로 만든 검이라서 그렇지. 아무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네. 이 검을 팔까? 아니면 검을 휘두를까 하고 말이야. 나는 검을 쓰기로 결정 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결정이었어.

난 곧 트윈 왕실 기사단에 입대했고 곧 기사가 되었네. 그리고 한 여자와 사귀게 되었지. 그녀가 바로 내가 주둔하고 있던 헤이즈에서 만난 엠마 글랜이라네. 사실, 난 처음에 그녀가 글랜 가문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네. 우리의 관계가 진전되자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밝혔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때 관계를 끝냈으면 그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사람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뻔 한 이야기 일세. 그녀는 원래 결혼해야 할 상대가 따로 있었던 거야. 노스홀드 가문이라는 것만 알고 나머지는 몰랐네. 지금도 모르고 말이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삼류 드라마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듣는 것 같았다. 가문 때문에 서로 헤어져야 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드라마는 보통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던가?

“그녀의 가문은 나에게 그녀에게서 떨어지라고 했고, 나도 사실은 그녀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네. 그것이 나와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죽을 만큼 싫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미래를 해치는 일이라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지. 그녀가 덜컥 임신을 해버린거네.”

“당신의 아이군요.”
피브릴은 넘겨짚었지만 자신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확신했다.

“맞네. 내 아이지. 웃긴 게 뭐냐 하면, 그녀가 임신하자 그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는 거네. 그녀와 헤어져서는 안 될 것만 같았지.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헤이즈에서 도망쳤네. 그녀가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뜻에 순순히 따라 주었지. 그녀의 가문인 글랜가문은 즉시 추적대를 파견해서 우리를 쫓았어.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처럼 우리의 뒤를 귀신같이 쫓아왔지.

계속 도망가 보았자 손해 보는 것은 우리였다네. 저쪽은 육체를 단련한 기사들이 잔뜩 있었고, 우리는 몸이 무거운 임산부가 있었으니 당연히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지. 나는 은신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적당한 산에 동굴을 마련했네. 우리는 거기에서 숨어서 행선지를 정했지. 베이스트가 아닌 그레이 랜드로 가야했어. 그리 하려면 발리우드 숲을 건너야 했는데 사실 임산부로 그 숲을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네.

우리는 일단 아이를 낳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결론지었네. 엠마의 배가 점점 불러와서 운신하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지. 버티는 것은 좋은데 돈과 식량이 점점 떨어져 갔네. 나는 그녀를 동굴에 두고 근처의 마을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지.

나무를 베거나, 농사일을 도와주거나, 아니면 돌담을 쌓거나 해서 다행히 임산부를 먹일 돈은 벌수 있었네.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만 그래도 뱃속에 있는 아기와 엠마를 떠올려 힘을 냈지. 그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굉장히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네.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어. 글랜 가문의 추적자들이 마침내 우리의 근처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지. 추적자 들은 우리의 코앞까지 도달했고 우리는 도망칠 곳이 없었네. 엠마의 진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꼼짝없이 앉아서 추적자들이 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지.

솔직히 당시 나는 두려웠고, 겁을 집어 먹었다네. 글랜 가문이 나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지. 그래서 아주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네.

그녀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 거지.”

“세상에......”

“나는 혼자 도망쳤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서 빠져나올 구멍은 있더군. 엠마는 분명 글랜 가문에게 잡혀갔었겠지. 그리고 그녀가 밴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네. 자네들이야 엠마와 혈연관계가 아니니깐 그 아이가 아니겠지. 아마 내 생각으로는 낙태를 했거나, 아니면 나온 아이를 바로 죽여 버렸을 것 같네.

아무튼 도망친 나는 후회를 했네. 참 병신 같은 놈이지 않는가? 하하하.

한동안 술에 절어 살다가, 다시는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도록 부와 명예와 권력을 쌓기로 다짐했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던 검술부터 단련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시금 왕실 상비군에 들어갔어.”

“군에서 당신을 받아주었습니까?”

“그러네.”

“하지만 ‘글랜 가문’ 이라는 사람들에게 발견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었네. 전쟁이 터졌거든.
라쿠르가 장벽을 넘어 오자 하찮은 삼류 사랑이야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죽이는 광란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그딴 거 신경 쓸 여유는 없게 되었네. 나도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고 말이야.

나는 검술을 정말 열심히 수련했고 그 결과 그 전쟁에서 살아남아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지. 마침내 꿈에 그리던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서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어. 하지만 말일세, 그렇게 지위에 오르고 나니깐 과거에 내가 저지른 잘못이 양심의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찌르고 있더군. 여자들만 만나면 항상 엠마 생각이 나서……. 도저히 친해진 것 이상으로 관계를 진전 시킬 수가 없었네. 죄책감이 계속 진행 되서 마음속의 한이 되어 버린 거지. 어떤가, 정말 한심하지 않는가?”
중년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가 엠마를 찾으러 온 것은 아마 과거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터였다. 엠마에게 무슨 쌍욕을 먹더라도 와서 그녀에게 사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그녀는 죽었다.

“아니요. 저는 당신이 한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피브릴은 중년 사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 결국 엠마를 만나지도 못한 내가 한심스럽지 않다고?”

“예, 맞습니다. 당신은 한심하지 않아요. 제가 인생을 오래산 것은 아니지만, 자기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인지 압니다. 자신의 과거에 잘못했던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려운 법이죠. 당신이 누구고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엠마를 만나러 시도했잖아요.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자격이 당신에게는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잘못한 점은 그냥 과거에 묻어버리려고만 하지 고치려고 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위안을 해버리고 말죠.”
중년 사내의 굳었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의 말이 사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묵었던 과거의 일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하길 바랐다.

“허허, 허허허허.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들었구먼. 고맙네.”
중년사내는 크게 웃으며 피브릴에게 말했다.

“노튼 네스우드라는 놈이 있지.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말이죠. 엠마 아주머니를 제 눈앞에서 살해해 버린 놈입니다.”

“그에게 고문을 받았겠지?”

“예.”

“하하, 그럼 되었네.”
피브릴은 중년 사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뭐가…….”

“혹시 자네 말이야. 분명히 자신의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걸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는가?”
사내는 다시금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