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씁쓸한 겨울밤


성은의 무대는 오늘도 빛이 났다. 리허설보다 더 빛나는 무대를 연출했으며, 그에 따라 그녀의 노래 ‘맴돌아’는 점점 더 순위가 높아져 갔다. 얼굴도 예쁜데다 노래도 잘하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팬들이 집에서 정성스레 만들어 온 피켓들. 그 중 상당수는 ‘힘내세요.’ 라는 취지의 내용들이었다. 오늘 아침의 일이 이렇게나 퍼지다니. 현대사회에서 미디어의 힘은 정말 대단한 듯하다.
성은이 무대를 마칠 무렵, 나는 무대 아래에서 벗어나 그녀의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약 5분 뒤, 그녀가 오른손에 기타를 들고 들어온다.
“오빠, 오늘 어땠어?”
무대가 끝난 뒤 나에게 항상 눈을 반짝이며 묻는 질문이다. 오늘도 여전하다.
난 대답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내 엄지손가락을 본 그녀는 날 흘겨보며 투정부리듯 말한다.
　　“치, 맨날 최고였대.”
하지만 흘겨보는 그녀의 눈이 반달모양이다. 맨날 듣는 대답이지만 기분은 좋은 듯하다.
“그럼 어떻게 하냐. 매번 볼 때마다 점점 더 최고가 되어 가는데. 넌 천상 가수야.”
“치, 말이나 못하면. 뭐, 기분이다! 오늘 술은 내가 살게.”
그녀가 내 옆 소파에 털썩 앉으며 기타를 넘겨준다.
“그건 그렇고, 시간되면 수연언니도 불러～못 본지 오래돼서 보고 싶네.”
성은과 수연은 나로 인해 알게 된 사이로, 꽤 친한 사이다. 성은과 내가 가까워질수록 필연적으로 수연과도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성은을 아끼는 만큼 수연도 성은을 아껴줬으며 친동생 이상으로 대해줬다. 성은도 친언니 따르듯 수연을 따랐다.
말하자면 둘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그 당시엔 내가 아끼는 두 여자가 서로 잘 지낸다는 것이 매우 좋았지만, 결론적으로 지금와선 둘을 서로에게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 매우 후회된다. 왜 그때는 헤어진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연애에 도가 튼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속내 혹은 사람들을 상대방에게 소개시키기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헤어질 때를 생각하며 만나는 것이다. 전에는 지극히도 계산적인 행태를 보이는 그들을 비난하고 경멸했으나, 내가 지금의 곤란한 상황에 빠져든 지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니다, 오랜만이니까 내가 직접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지～수연언니 번호가...”
그녀가 핸드폰의 홀드버튼을 누르며 말한다.
“됐어. 수연이 오늘 바쁘대...음...곧 기말고사 시즌이잖아.”
수연의 직업은 고등학교 국어교사. 둘러댈 핑계가 이것밖에 없다.
“그래? 피...그래도 오빠는 맨날 수연언니 보잖아!”
성은은 입을 샐쭉거리며 나에게 따지듯 말한다.
“...나도 이젠 못봐.”
“못보긴...오늘도 나랑 헤어지자마자 수연언니한테 달려갈 거면서!”
그녀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여튼 오늘은 안돼. 나중에.”
“치, 나 수연언니 보고 싶은데...”
“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이제 너 나온다. 네 무대 모니터해야지.”
마침 텔레비전에서 그녀의 무대가 나온다. 음악 프로그램은 생방송이라고는 하지만 5분 정도 늦게 공중파를 탄다. 방송국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시간이겠지. 그래서 나는 ‘인기가요, 뮤직뱅크, 음악중심’ 등의 앞에 꼭 들어가는 ‘생방송’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5분 늦은’ 생방송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이런 시스템은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PD입장에서는 아까 말했듯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다는 의미와, 생방송이라는 것에 대한 압박을 덜 받고 무대연출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가수 입장에서는 자신의 무대가 끝난 직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무대 모니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결국에 나는 가수의 매니저이므로 이 시스템이 좋아야 한다. 하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 시스템인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직업 때문에 속마음까지 바꾸는 것은 끌려간다는 느낌이 있어서 싫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성은은 어느새 그녀의 무대 모니터를 끝낸 상태였다. 그녀는 나를 보며, 자신의 무대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털어 놓는다.
“음...도입부분에서 카메라 앵글을 좀 천천히 돌렸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리고 나 저거 마음에 안들어! 왜 내가 노래 부를 때 스모그를 저렇게 뿌려놓는거야? 다음부터는 저러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려야겠어. 그리고 고음도 살짝 불안정하네...아직도 연습을 더 해야겠네...그나저나 오빠, 내 말 듣고 있는거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면...나한테 반한거야? 호호호～”
그녀가 재잘대는 모습은 순간적으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짐들을 내려놓게 해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던 것이다.
“...또 쓸데없는 소리. 내가 너 같은 어린애한테 왜 반하냐? 그러느니 지나가는 유치원생한테 반하겠다.”
내 말에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째려본다.
“뭐라고! 내가 뭐 어때서! 이정도 몸매, 얼굴이면 누구한테도 빠지지 않는다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 손을 허리에 얹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는 그녀.
풋. 섹시하다는 생각보다는 귀엽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때? 이제 수연언니 버리고 나한테 넘어오는 게?”
그녀는 자아도취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농담을 건다.
사실 얼굴, 몸매, 노래 등 누가 보면 ‘완소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은이지만, 옆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고 있는 나는 왠지 그녀의 완벽함이 실감나지 않는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뭐? 헛소리? 오빠 말 다했어?”
나에게 따지듯 묻는 성은. 하지만 그녀의 어조에는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응. 말 다했어.”
“으이구! 저런 걸 매니저라고...얼른 갈아버리던가 해야지.”
“뭐? 갈아버려? 네가 날 보내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이구! 자기가 무슨 내 수호천사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메롱이다, 메롱!”
나를 향해 혀를 쑥 내미는 그녀. 으이구. 못 말린다, 못 말려.
“나도 메롱이다! 메롱!”
...뭐, 나도 못 말리는 녀석이구만.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며 밴으로 향했다.

“술은 뭘로 마실래? 소주? 맥주? 양주?”
나는 시동을 걸고 변속 레버를 ‘D’로 옮겼다.
“요새는 소주가 좋더라. 소주 마시자.”
소주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지.
“그러면 내가 아는 곳으로 가자. 조용하면서 부담없어 좋은 곳이니까.”
“뭐, 오빠 좋으실대로. 어디로 가는데?”
“내가 예전에 자주 갔던 곳.”
“호오～자신있나본데? 기대하겠어!”
“피곤할텐데 자고 있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새벽부터 많이 피곤했을 그녀를 위해 말했다.
“흐암. 안그래도 졸렸는데. 그래주면 고맙고. 근데 오빠 심심하지 않겠어?”
“아까 방송국 올 때처럼 냉랭한 분위기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걱정말고 주무세요, 아가씨.”
“치,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누가 매니저 노릇 제대로 하지 말래?”
그녀의 말에 괜히 바늘에 찔린 듯 뜨끔해진다. 백미러로 보니 그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은. 이대로 두면 또 삐지겠구만.
“알겠어. 오빠가 다 잘못했으니까 공주마마는 어서 잠을 청하시지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지 마시오! 내 지금은 졸려서 눈을 감으나, 곧 엄히 문책하겠소!”
...참 상황극 좋아하는 성격이라니까.
“알겠사옵니다, 마마.”
“흥! 나 진짜 잔다. 운전 조심하고.”
하며 날 잠시 노려보더니 무릎담요로 얼굴 전체를 덮는 그녀. 편히 잘 수 있도록 그녀가 좋아하는 이루마의 피아노곡을 잔잔히 틀어 놓는다. 편히 주무세요, 공주님.
그녀가 편히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핸들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향한 곳은 천호동의 한 술집. ‘스카이’ 시절 자주 왔던 술집이다. 아, ‘스카이’는 내가 속했던 옛날 인디밴드 이름이다. 아무튼 이곳은 조용하고 값싼 안주들로 배고팠던 시절 내 배를 풍족히 채워줬던 곳이다. 푸짐한 이모 인심 덕분이었다. 도착하니 벌써 날은 저물어있었다. 겨울은 밤이 빨리 와서 싫다.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뒷자석 차문을 열고 그녀를 조심스레 깨웠다.
“성은아, 성은아. 일어나. 다 왔어.”
“아우우웅...”
이 웅얼거림은...‘인형 끌어안기’의 전조...설마...이런 곳에서 ‘인형 끌어안기’는 안된다. 난 얼른 그녀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어떻게 깨운다...어쩔 수 없다. 이번만큼은 가수와 매니저의 관계를 벗어나야겠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성은아! 성은아! 이성은! 일어나! 일어나!”
그녀의 머리가 헤드뱅잉하듯 앞뒤로 마구 흔들렸다. 이러다 목디스크 걸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이 약간 밀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둘만 있는 실내에서도 아니고, 주위의 시선이 상존하는 바깥에서 ‘인형 끌어안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켁, 켁!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느새 일어난 그녀의 분노가 오른손으로 실리더니, 주먹이 내 왼쪽 뺨을 강타했다.
“컥!”
“야, 강진우! 너 아주 미쳤구나! 목 나갈 뻔 했잖아!!”
이게 여자 주먹의 파워란 말인가. 도저히 용납할 수, 아니, 흡수할 수 없는 파워다.
“쓰읍...너 여자 맞냐. 주먹이 왜 이렇게 세! 그리고! 네가 이런 곳에서 ‘인형 끌어안기’라도 하면! 그 사진을 누가 찍는다면! 그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간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우리의 소란에 주차장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엇, 쟤 이성은 아니야? 완전 예쁘다...”
“그러게...여긴 왠일이래. 저 사람이 이성은 버렸다는 남친인가? 나쁜 놈이네.”
주위에서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아...아니...그게 아니고요...전 이성은 매니저입니다. 잠시 볼 일 있어서 이곳에 왔고요...저는 절대 저 녀석 남친 아닙니다! 야! 너도 뭐라고 좀 해봐!”
나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흑흑...나쁜 놈...여기서까지...”
내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향해 꽃혔다.
“저...저 아니에요! 야, 이성은! 너 뭐하는 거야...!”
그녀가 나만 보이도록 살짝 고개를 들더니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눈 아래를 살짝 내린다.
“메롱.”
하아, 이 자식. 죽을라고!
“하하...하하...저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야, 이성은. 너 빨리 차 타. 어서!”
나는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구겨넣듯 차에 집어넣고는 얼른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밖에서는 야유가 장난 아니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야, 이성은! 너 죽고 싶어?”
“킥킥...이번 걸로 매니저 노릇 제대로 못한 거 퉁칠게...킥킥...호호호～”
그녀의 웃음이 터졌다. 하아...힘들다, 힘들어.

성은의 장난 때문에 때 아닌 동네 한 바퀴 놀이를 하고 겨우 술집 건물에 들어선 우리.
“여기 좋아. 조용하고, 안주도 맛있고, 양도 많고. 무엇보다 싸고. 인심도 훈훈하고.”
“근데 무슨 술집 이름이 ‘쥬뗌므（Je T'aime）’야? 까페 이름 같네.”
그녀가 간판을 가리키며 묻는다.
“하긴, 술집 이름 같지는 않지. 들어가자.”
나는 술집 문을 열며 그녀를 안내했다.
“이모! 저 왔어요!”
“이게 누구야? 진우 아니야? 어머~오늘 반가운 얼굴들 많이 보네~”
내 손을 맞잡고 반기시는 이모. 보통 30대 후반의 여자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뱅헤어에 백색 스웨터와 빨간색 스키니진을 입은 그녀.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굉장히 잘 어울린다. 어색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 이 분은 진정으로 젊은 분일 것이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죠?”
“그래, 얘. 이모한테 얼굴도 안 보여주고, 못됐어.”
그녀가 새침하게 눈을 뜨며 긴 생머리를 귀 옆으로 넘긴다.
“하하～죄송해요~요새 좀 바빴어요.”
“그래. 근데 옆에 아가씨는 누구? 낯이 익은데...”
이모가 성은을 힐끗 보며 묻는다.
“아마 그럴거에요. 요새 한창 활동하고 있으니까. 이쪽은...”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이성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하기도 전에 선수치는 그녀.
“...라네요. 제가 이 친구 매니저 하고 있어요.”
“아~노래 들어봤어요. 좋던데요? 반가워요~우리 진우 잘 부탁해요~”
“네! 안 그래도 요새 여러 가지로 챙겨주고 있습니다!”
밝게 받아치는 성은. 저 성격이 좋다. 붙임성하며. 역시 내 동생이구만.
“...내가 네 매니저거든? 내가 널 챙겨야지 네가 날 챙기냐?”
“어머, 내가 오빠 더 많이 챙기잖아~호호호~”
“으이구, 조막만한 게. 말이나 못하면.”
“호호호~둘이 친하게 지내나보네~보기 좋아~자리에 어서 앉아요~”
성은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친다.
“엄청 젊게 사신다. 멋있다~”
그녀의 말에 어깨를 한 번 으쓱댔다.
“당연하지. 누구 이모인데.”
난 성은과 대화를 멈추고 이모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모. 근데 또 아는 사람 누구 왔어요? 아까 반가운 얼굴들 많이 본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 민혁이도 오늘 왔어. 저기 구석에 앉아있네.”
“민혁이가요? 어디?”
나는 이모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혼자, 조용히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언밸런스 헤어, 여전히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일렉트릭 기타까지. 저 녀석은 변한 게 없구만.
“여어~오랜만이다. 최민혁.”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이게 누구야, 잘나신 강진우 아니신가.”
그의 말투에는 왠지 모를 적개심이 깔려있었다.
“자식, 오랜만에 형님을 봤으면 반가운 티라도 내야지.”
나는 민혁이 반대편에 털썩 앉았다.
최민혁. 그는 밴드 ‘스카이’의 기타리스트였다. 밴드가 해체된 후, 그는 잘생긴 외모와 출중한 기타실력을 바탕으로 현재 아이돌 밴드 ‘M-Holic’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근데 요새 안 바쁘냐? 연말이잖아. 곧 있으면 콘서트도 한다면서.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셔도 되는 거냐?”
“그럴 일이 좀 있다...자식. 그나저나 너야말로 술집에 올 정신이 있냐?”
그와 연락하지 않은지는 2년 정도 되었다. 아이돌 밴드이긴 하나 지속적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그를 ‘스카이’의 리더로서, 현실에 굴복한 사람으로서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오랜만에 만나도, 2년 간 연락 한 번 없다가 우연찮게 만나도 대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것이다.
“...그냥 먹고 산다. 아참, 성은아! 이리와!”
나는 그제서야 입구에 뻘쭘하게 서 있는 그녀를 불렀다. 성은이는 내 쪽을 향해 종종거리며 뛰어오다가 민혁의 얼굴을 발견하고 살짝 멈춘다.
민혁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계속 그녀를 바라본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
굳은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성은. 천천히 다가와서는 내 옆에 앉는다.
“...넌 성은이랑 어떻게 아냐.”
민혁이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묻는다.
“...내가 먹고 사는 일이 이거다. 매니저. 내가 이성은 매니저야. 그런데 너는 성은이를 어떻게 아냐. 오다 가다 몇 번 본 게 다일텐데.”
“...네가 성은이 매니저라고? 참...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놀랐다면 미안하다. 음악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어.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너 피해다녔다. 뭐, 이런 곳에서 만났으니 이젠 어쩔 도리가 없지만.”
사실이다. 방송국에서 여러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으나 나는 그 때마다 민혁을 피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너 성은이랑 어떻게 아냐? 성은아, 넌 얘 어떻게 알아?”
나는 민혁과 성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울듯한 표정의 성은. 그리고 굳은 얼굴로 소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민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민혁이 따라놓은 소주를 입에 털어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별 사이 아니야. 나 먼저 일어난다. 네 말대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래. 아쉽긴 하지만. 이젠 종종 연락하마.”
“...뭐, 그래. 잘 살아라. 아, 그리고...”
민혁이 나를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 한다.
“그리고 뭐?”
“...아니다. 그건 그렇고 수연이랑 잘 지내냐?”
또 수연 얘기. 어느새 햄버서 세트메뉴 취급을 받는 건가, 수연과 나는.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더 이상 나와 그녀는 함께가 아닌데, 왜 다들 우릴 묶어서 생각하는 건가.
“...헤어졌다. 잘가라.”
“뭐? 헤어져?”
민혁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렇게 됐어.”
민혁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일으킨다.
“이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네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수연이랑 헤어질 수 있어!”
어이가 없다. 도대체 네가 뭔데 남의 연애사에 이래라 저래라, 감놔라 배놔라 한단 말인가. 난 내 멱살을 잡은 민혁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 상황? 나는 뭐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졌어? 갑자기 나한테 불쑥, 아무 이유없이, 다른 날하고 다를 게 없었던 어제! 아니, 조금 다르다면 엊그제보다 조금 더 추웠던 어제! 나랑 헤어지자는데, 내가 싫어졌다는데! 뭘 더 어떻게 하라고!”
민혁은 내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러더니 일그러진 표정을 풀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 내 어깨를 툭툭 다독인다.
“...아니다...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겠지...그러니까 네가 여기 온 거겠지...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나 간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자식.
뒤돌아서 문 밖으로 나가는 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성은은 아까 모습 그대로다. 얘, 민혁이한테 무슨 죄 지었나?
“...너 쟤랑 어떻게 아는 사인데? 둘이 왜 그렇게 서먹한데?”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 표정이다.
“...뭐. 아무렴 어떠냐. 됐고. 술이나 마시자. 이모! 여기 참이슬 후레쉬 한 병하고 닭똥집 좀 맛있게 해서 주세요!”
“그래~조금만 기다려~”
오늘 여러 번 술이 고프네. 취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씁쓸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 퍼져가는 겨울밤이었다.



Written by 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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