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으~좋다~”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었던 내 머리가 점점 마취되어간다. 술은 이래서 마시는 거다. 모든 것들을 흐려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붕 뜬 기분만 남긴다. 다음 날 속을 부여잡고는 죽을 듯 괴로워할지도 모르지만.
“캬아~나도 좋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보니, 성은의 표정도 점점 풀어진다. 이제 좀 물어도 될까. 그녀와 민혁의 관계를.
“근데 오빠! 오빠 정말 수연언니랑 헤어졌어? 그냥 사랑싸움이나 뭐 그런 거...그런 거 아니야?”
그녀가 살짝 혀꼬인 발음을 내며 말했다. 젠장, 선수를 뺐겼다.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래. 헤어졌다. 어제.”
난 조용히 성은과 나의 비워진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도대체...아니, 도대체 왜? 왜? 그렇게 엊그제까지만 해도 죽네 사네 했던 분들이 왜?”
“그러게. 엊그제까지만 해도 까맣게 몰랐네, 우리가 헤어질 줄은.”
아무 전조도 남기지 않은 이별. 그래서 더 답답하고 미치겠다. 괜히 머리를 긁적여본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야?”
그녀가 잔을 들어 까딱거린다. 나도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부딪히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크으...넌 날 아직 잘 모르냐?”
“알지~너무나 잘 알고말고. 오빠가 헤어지자고 했을 리가 없지. 헤어질 생각같은 거 했다면 나한테 먼저 의논했을거야. 그런 중대사를 오빠가 혼자 처리할 수 있을리 없지.”
“그래. 아마 그랬을거다. 분명히.”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내 성격을 잘 아는 그녀다. 그래, 만약 내가 이별하려 했다면 성은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성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아...수연언니 좋았는데. 착하고, 성실하고...예쁘고...바보같은 오빠.”
입을 삐죽거리는 성은. 그녀의 모습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내가 왜 바보냐. 헤어지자고 한 수연이가 바보인거지.”
“수연언니가 왜 바보냐? 그런 좋은 여자 놓친 오빠가 바보인거지.”
듣고보니 그렇다. 수연이만큼 좋은 사람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의 여자였다.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게...네 말 듣고 보니 내가 바보구나. 쳇.”
이번엔 성은이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운다. 성은에게 미안하다. 수연과의 관계가 나 때문에 깨어지려 하고 있다. 성은에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수연과 나와의 이별로 인해 불편해지는 것이다.
“혹시 나 때문에 수연이랑 연락 안하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접어. 수연이랑 나랑 헤어진 거와는 상관없이 너희 둘, 자매같이 잘 지냈었잖아.”
“그래. 잘 지냈었지. 과거형이잖아. 오빠랑 헤어진 언니랑 어떻게 잘 지내냐? 오빠가 이러니까 나한테 바보라는 소리 듣는 거야. 수연언니가 좋은 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헤어졌든지, 난 수연언니보다 오빠와 훨씬 더 가까워. 어쨌거나 결국엔 오빠 편이 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제 수연언니랑은 예전처럼 잘 지내기 힘들어. 이건 여자의 직감이야.”
“하지만...”
“됐어~이왕 이렇게 된 거, 오빠는 헤어짐에서 빨리 헤어나올 생각이나 하셔. 오빠가 어리버리해지면 나도 피곤해지니까. 자, 한 잔 더하자~”
성은의 마음이 고맙다. 그녀가 내 편이라고 말해준 것도 매우 고맙거니와, 일부러 틱틱대며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듯 말해주는 그녀의 배려심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진다.
“쳇. 그래. 알았다. 이까짓 이별, 공주님을 위해서 얼른 벗어나 드리지요! 자~한 잔하자~”
쨍. 잔이 부딪히고 술이 입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내 눈은 점점 초점을 잃는다. 성은의 양 볼은 이미 빨개진지 오래.
“성은아.”
“응? 왜?”
그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날 바라본다.
“넌 나랑 수연이가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내 말에 그녀가 히죽 웃는다.
“헤에~당연히 궁금하지~내가 제일 아끼는 오빠랑, 친자매같은 언니가 무슨 이유로 헤어졌을까?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마음속으로 생각해봤지~”
“근데 왜 안 묻냐?”
그녀가 젓가락으로 닭똥집을 집어먹으며 말한다.
“물어봐야 뭐해~물어보면 둘이 다시 만나나? 아니잖아~괜히 오빠 마음만 아프지. 나중에 괜찮아지면 그 때 얘기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머, 오빠 울어? 오늘 아침에도 울더니 또 울어? 으이구~내가 못살아~”
하며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는 그녀. 이 녀석이 이렇게 컸었나. 이제 곧잘 날 위로해주네.
“야. 너 나 왜 이렇게 챙겨주는 거야? 매니저는 난데. 가수 주제에.”
“매니저 주제에 가수 잘 못챙겨주니까, 가수라도 매니저 잘 챙겨줘야지~”
성은이 씨익 웃는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 얘 언제부터 이렇게 예뻤지?
“너, 점점 예뻐지는 것 같다?”
“당연하지. 꽃다운 나이 스무살인데!”
콧대높은 척 얼굴을 위로 드는 성은.
내가 무슨 말을 못해요.
“그나저나...너 민혁이랑은 어떤 사이야? 아까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았던거야?”
난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민혁의 얘기가 나오자 역시 표정이 어두워지는 그녀.
“물어보지 말걸 그랬다. 그냥 술이나 마시자.”
“...헤어졌어.”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채 속삭이듯 말한다.
“뭐라고? 누구랑 헤어졌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있다. 정말 슬픈 표정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피아노치듯 톡톡 테이블을 친다.
“헤어졌다구...민혁오빠랑...”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그녀가 민혁이랑 사귀었었다니?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 얼굴이 찌그러진 캔처럼 일그러졌다.
“뭐라고? 민혁이랑? 둘이 사귀었었어?”
“그래...내가 아까 아침에 헤어졌다고 했었지?...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였어. 민혁오빠랑...”
뭐야, 도대체. 그 둘의 관계를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갑자기 화가 치민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둘이 사귀었다고? 도대체 그런 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내 가장 친한 친구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서로 사랑을 했다는데 왜 내가 모른건데?”
“민혁오빠랑 오빠가 그런 사이인 줄 몰랐어.”
“몰랐다고 말하면 다야? 도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나도 모르게 심하게 말해버렸다. 나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굳는다.
“행동거지? 오빠가 내 스케줄 외의 것에 관심이 있기는 했어? 난 말야...”
그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인다. 지금은 방금 전의 눈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날 원망하는 눈물인 것이다.
“오빠가 불편해할까봐 종종 사무실 찾아오는 수연언니 맨발로 반겨준 게 누군데? 가끔 수연언니랑 싸워서 내 조언 구할 때마다 기꺼이 들어주고 위로해준 게 누군데? 난 일할 때 외의 오빠 모습도 다 알아. 그런데 오빠는?　무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아니, 관심은 가져봤어? 도대체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내 행동거지를 논하는데? 오빠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도대체 오빠가 나의 뭔데? 단지 매니저일 뿐 아니야?”
짜악.
나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난 그녀의 행동거지 논할 자격 같은 거 없으니까. 그런데 단지 매니저일 뿐 아니냐는 그녀의 말에 왜 나는 화가 나는 것일까.
그녀가 나에게 맞은 오른뺨을 부여잡으며 나에게 소리친다.
“왜 때려? 오빠가 도대체 나의 뭐냐니까? 그 말이 그렇게 억울해? 억울하면 억울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왜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들어, 왜!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내가 누굴 만나고 다녔고 누구랑 헤어졌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성은아...나는 그럴 생각이...”
“난 말야. 민혁오빠랑 헤어진 것보다 오빠가 날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고 화가 나.”
“...”
“됐어. 이제 오빠 꼴도 보기 싫어.”
그녀가 자신의 짐을 챙겨서 가게를 나간다. 온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을까. 말도 안되는 무관심으로 그녀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고는 도리어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 나는 도대체...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나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두려움이 내 몸을 떨게 했다. 그것은 어쩌면 성은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를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 이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문을 부술듯이 열고는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으로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녀를 향해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그녀를 향해 달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의 뒷모습이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가 내 손에 닿았다.
“가지마!”
성은의 발걸음이 멈춘다.
“가지마, 성은아.”
내 말에 그녀가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본다.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한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양 어깨를 꽉 붙잡는다. 그렇지 않으면 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진다. 난 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가져가려 했다. 성은은 고개를 숙이며 내 손길을 거부한다.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가 왜 수연이랑 헤어졌는지..나도 몰라.”
“..궁금하지 않아. 갈 거야. 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내 손을 벗어나려 하는 성은. 난 그녀의 어깨를 더 꽉 부여잡았다.
“..이유를 알려주지 않더라. 왜 나랑 헤어지려 하는지. 내가 싫어졌대. 단지 그 뿐이래.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전날 밤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처럼 전화를 끊었던 그 사람이..갑자기 내가 싫어졌대. 단지 그 뿐이래.”
그녀가 버둥거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슬며시 바라본다. 목이 매여 목소리가 갈라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걔가 그렇다고 하니까..그래서 보내줬어.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데도 보내줬어.”
성은의 어깨를 잡은 두 손이 떨린다. 마치 내 마음처럼..내 입술처럼..내 두 눈처럼. 그녀는 흔들리는 내 두 눈을, 자신도 울듯이 쳐다보고 있다. 마치 마음과 마음이 합쳐진 기분이 든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내 진심을 알아준다면..
“너는 지금 나를 떠나려고 해. 다시는 안 보려고 해. 마치 수연이처럼..내가 너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네 상황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하지만 지금은 수연이 때와는 달라. 네가 날 떠나려고 하는 이유를 알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그래..그러니까 이거 놔. 나 갈거..”
“그래서 널 보낼 수 없어.”
내 말에 그녀가 움직임을 멈춘다.
“내가 왜 널 아프게 했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에..그래서 널 보낼 수 없어. 널 아프게 한 이유를 안 건..어쩌면 널 앞으로 아프지 않게 할 방법을 찾은 것과 마찬가지니까..그러니까..앞으로 아프게 할 일 없을테니까..”
“...”
“..떠나지마. 내 옆에 있어.”
“..흑흑..”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온 몸에 힘을 푼다. 자연스레 내 품에 들어오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준다. 그리고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프게 하지 않을게..”
“..흑..으앙~”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서럽게 운다.
한적한 거리에서 그녀의 우는 소리만이 추운 겨울밤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