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양 팔을 튜브 위에 올려놓은 채로 멍하니 바다를 유영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주변에 빛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조각을 하나 주워 노 대용으로 써볼까 했지만 곧 의미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여기서 노를 저어본다고 해봤자, 어디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플라스틱 조각을 멀리 던져 버렸다. 하지만 플라스틱은 멀리가지 못하고 바로 코앞에서 첨벙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그는 주변에 널린 맥주캔을 하나 집어 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맥주캔를 따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보름달이 떠있었다. 별도 무지하게 많았다. 그는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키고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일단 별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먼 친척이 살고 있는 산골 동내에 갔을 때나 몇 번 별을 본 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하늘처럼 본격적이진 않았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시골 하늘의 별과 지금의 별을 번갈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굳이 비교하자면 가정용 화분의 모래와 넓은 바닷가의 모래 정도의 차이였다. 오래된 창고의 퓨즈가 거의 다 나간 전구와 거대한 돔구장의 LED라이트 정도의 차이였고, 편의점에서 파는 4개 번들 맥주캔과 침몰한 크루즈선에서 흘러나온 맥주캔 정도의 차이였다. 그는 그 순수한 차이에 감탄하며 남은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캐롤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그는 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새다가 문득 그 사실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기적적으로 크루즈에서 탈출해, 지금쯤 바다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몸에 꽉 끼는 튜브를 쓰고, 하늘의 별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하지만 그녀의 튜브 주변에는 맥주가 없을 것이다. 크루즈의 맥주란 맥주는 전부 그의 튜브 근처에 있을 테니까. 대신 와인병 같은 게 둥 둥 떠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조금 금이 간 와인 잔과 함께.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잖아. 하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녀가 튜브 언저리에 와인병을 두고,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상상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상대로만 된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는 두 번째 맥주캔의 뚜껑을 따며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첨벙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파도 소리는 아니다. 무언가 인위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낸,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로 몸을 돌렸다.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작은 물보라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맥주캔이 그 물보라에 따라 위아래로 은색의 몸뚱이를 움직였다. 분명 사람이었다. 가는 팔이 물살을 가르며 위로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 사람도 튜브를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떤가. 몇 분 후면 확인할 수 있을 테고,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성별은 그때 가서 확인하면 된다.
그는 어설픈 몸짓으로 주변의 맥주캔을 해치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되는대로 팔을 휘젓고 다리를 움직였다. 흰 물보라가 거칠게 튀어 오르고 맥주캔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그에게 다가와 있었다.
그는 물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엔 캐롤인줄 알았다. 외견상의 모습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이 묘하게 캐롤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분명 캐롤은 아니었다. 캐롤 보다는 키가 작았다. 머리도 단발이었고, 눈 색도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왼손은 손가락이 네 개 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튜브에 양 팔을 올려놨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휙 휙 돌아가며 주변을 탐색했다. 남색의 짙은 바다를 가득채운 맥주캔과 정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조각. 그리고 그녀와 같은 처지의 남자 하나.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로 마련된 공간이라도 있는 것 마냥.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대놓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건 없었다. 맥주와 플라스틱으로는 한밤중의 망망대해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야.” 그녀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다. 그녀는 혀를 차며 말을 바꿨다.
“그런 것 말고. 난 당신의 이름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아. 내가 묻고 싶은 건 당신이 어째서 이런 장소에 있느냐는 거야. 보시다시피, 여긴 완전히 바다 한 가운데잖아.” 그녀가 양 팔을 벌리며 주변을 가리켰다.
“혹시 모르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뭘 말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앞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설명해봐.” 그녀가 말했다.
“뭘?”
“뭐든 간에, 당신이 알고 있는 거.”
그는 도대체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또 그런 이야기로 그녀를 납득시킬지도 알 수 없었다. 잘 될지도 모르고 전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1분가량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우연의 기회로 크루즈선에 탄 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이었어. 부산에서 출발해 홍콩을 거치고 싱가포르로 나아가던 중이었지. 운행 내내 날씨는 거의 맑았고, 파도도 그렇게 많이 치지 않았어. 뱃멀미라고는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안한 운행이었지. 하지만 그날은 다르더군. 아침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거대한 비구름이 바다 저편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왔어. 항상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선박의 풀장도 그날만큼은 텅 비어 버렸어. 풀장과 가까이 있던 공연장도 마찬가지로 조용했지. 사람의 그림자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어. 크루즈선이 바다를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는 소리만 주기적으로 날 뿐이었지. 난 난간에 기대서는 저 맞은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비구름을 멍하니 바라봤어. 언제쯤 이 선박에 도달할지 궁금했거든. 손목시계로 시간을 쟀고. 비록 지금은 망가졌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여주었다. 시침과 분침의 움직임이 둔하고 느렸다. 깨진 유리의 틈으로 바닷물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2시간 21분쯤 뒤에 선박의 앞머리가 비구름의 영역에 들어섰고, 비구름이 완전히 선박을 삼켰을 때는 그로부터 3분이 더 흐른 뒤였지. 난 그 시간차이에 감탄하며 선박 안으로 들어갔어. 목적은 이룬 샘이니까. 그러고는 낮잠을 잔 다음 일어나서 밥을 먹었어.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거대한 비구름의 영역 안이더군. 새 찬 빗줄기가 기관총처럼 창문을 두드리고, 바닷물은 뜨거운 불 위에서 달궈지는 기름처럼 튀어 올랐어. 난 그런 바닷물은 한동안 쳐다보다가, 이내 관두고는 칵테일 바로 내려갔지. 그때 시간이 6시쯤이었어. 그곳에서 자신을 캐롤이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한 시간정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박이 크게 흔들리길래 풀장 쪽으로 올라왔어. 비는 그쳤지만 어쩐지 선원들이 바빠 보였고, 난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가 바다에 빠졌어. 뭐,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한 건데.” 그녀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크루즈선이 가라앉았다는 거.” 그가 말했다.
“어쩌다가?”
“나도 자세히는 몰라. 크루즈선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선채에 구멍이 뚫렸어. 그러고는 가라앉았지.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상황 파악이니 뭐니 그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어.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에게 남은 건 저기 정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조각과 수많은 맥주캔 뿐이었지. 이정도면 설명이 됐을까?”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그녀는 주변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믿을 수밖에 없겠지.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 말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확률은 없어?” 그녀가 물었다.
“난 네가 그 크루즈선의 생존자인줄 알았어. 타이밍도 그렇고, 튜브를 몸에 끼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안타깝지만 전혀 아니야. 크루즈 같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타본 적 없다고. 그냥 이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길래 와본 것뿐이야. 뭐, 얻은 건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진상규명은 했잖아.”
“그런 건 아무 도움도 안 돼.” 그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긴 하지……” 그가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답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바다에 떠다니는 맥주캔을 하나 집어 뚜껑을 따고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어쩔 거야?” 그녀가 물었다.
“뭐…… 어쩔 도리가 있을까? 술이나 마시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그런 거지.”
“정말 그런 것 뿐이야?”
“안타깝지만.” 그가 답했다. “너는 어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나? 하나 있기는 하지.”
“그게 뭔데?”
“내가 원래 머무르고 있던 섬으로 돌아가는 거야. 사실 섬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작은 곳이지만.” 그녀가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1km정도만 가면 볼 수 있어. 바위 같은 게 위로 툭 튀어나와있는 모양세지.”
“하지만 난 수영을 할 줄 모르는걸.” 그가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아. 난 이래봬도 수영을 꽤 잘하는 편이니까. 너 하나 정도는 끌고 가줄 수 있어.”
“술도 마셨는걸?”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가 오른손에 들린 맥주캔을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수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 자동차나 배는 안 되겠지만.”
‘그리고 비행기도.’ 그는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갈 거야 말거야?”
“갈게.” 그가 말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잘 생각했어. 여기 있어봐야 물고기 밥만 될 뿐이야. 영화「언더 위터」의 남자들처럼.”
“거기서는 물고기가 아니라 상어가 나오지 않아? 상어랑 갈매기.”
“물고기나 상어나. 결국 사람을 먹어 치운다는 것에서는 다를 게 없어.”
“그런 거야?” 그가 물었다.
“그런 거라구.” 그녀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