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자 1호 내가 하자."


난 나름대로 멋있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냥 뭐랄까. 그녀랑 한 번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트래쉬고 나발이고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어 내뱉은 것 같다.

"싫어."
"아 왜. 물론 나도 길치지만 집도 벌써 두 번이나 데려다줬고, 돈은 없지만 선물은 종종 줄줄 알고, 그리고 오빤 여자 경험이 많잖니? 니 맘을 잘 알아줄걸."
"웅아 넌 니가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니?"
"그러지마라. 험한 말하면 나도 울 수 있다."

방금 전 자기가 괜찮은 여자냐는 그녀의 말에 평소 감정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었다. 사진으로는 많이 못생겼고, 실제로도 못생겼고 그런데 지내다보면.. 이 말까지 하다가 컷당해서 뒤에는 말을 못했지만. 이 모든 말은 전부 진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울어버렸다.


"방금 고백한 거 맞지?"
"그렇다고 하자."
"남자가 그게 뭐냐. 고백이면 고백이고 아니면 아니지."
"남자다운 거 보여주냐?"
"아 꺼져. 막 기습키스하고 이런거지?"
"천잰데?" -_-

점집을 하나. 정말 기습키스 한 번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줄게."
"아 별로 듣기 싫은데. 싫다며."
"이유를 좀 들어봐."
"너 뒤끝있다. 아까 못생겼다고해서 복수하는거지?"
"아냐. 한 번쯤은 말해주고 싶었어."



그녀를 만난 후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봤다. 알고 지낸지는 7년, 만난 지는 5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옛날에 나 고등학생 때 니가 만나자고 했었잖아."
"응. 무섭다고 안 만난다고 했었지."
"응 맞아. 무서웠다."
"뭐가 그리 무서웠냐?"
"그당시 표현으로 날 잡아먹을까봐 무섭다고 했었는데,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니가 날 먹을까봐 더러웠다."
"음.. 아마 그 때 만났으면 먹었을거야."
"거봐. 그거 범죄다. 이 더러운 새끼야."
"어허. 입 한 번 더럽다?"
"아무튼 고등학생 때는 그래서 널 안 만난거고. 20살이 되고나서 너 만나다가 니 여자친구 바람나서 차이고 외롭다고 나한테 껄떡됐었잖아."
"껄떡은 아니지. 그냥 좀 외로웠던거지."
"물론 그 때 내가 남자친구가 있기도 했지만 너랑 잘해볼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
"저기요, 지금 그 쪽은 남자 2명한테 동시에 차인 분이셔요. 상황이 이런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좀 들어봐봐. 해줄 말이 있어서 그래."



그녀의 눈빛은 무엇인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빛이었다. 

"알았어. 담배나 한 대 더 줘봐."
"입담배 주제에 존나 피네. 아 존나 아깝다."
"니 딴 남자 앞에서도 욕하냐?"
"아니. 니 앞에서만 하는데?" ㅋㅋㅋㅋ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었다. 

"넌 편하고 좋아. 그런데.."
"아 불길하다. 그런데 뭐."
"음.. 상처받지마라."
"잠깐만. 오빠가 눈은 작아도 눈치는 빠르잖니? 방금 전에 나 정말 별로니라고 물은 질문이랑 연결되는 거 아니냐?"
"맞아."
"그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피차 슬픈 이야기잖아."


"하아.. 연애를 해도 연애를 하는 것 같지 않았어. 이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불쌍해지는 거 아는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남자 1호는 안정적인 피난처, 남자 2호는 좋은 피난처지만 그만큼 비용도 지불해야 되는 곳, 그리고 너는 피난처가 아니고."


알고는 있었는데 웅트래쉬로 살고 있는 이유를 그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한 마디로 표현해버렸다. 피난처가 아니다. 그랬다. 난 여자들에게 있어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아닌척 할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잔인한데.."
"사실인데 뭐.."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막상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듣자 빈정이 상해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남자 2호랑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왜?"
"니말대로야. 남자 2호에게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보다 이뻤다면 이러고 살지는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