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의 어느 날
저 멀리 펼쳐진 들판 위에서
나는 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릿흐릿한 풀들 사이 겹쳐 보이는 네 뒷모습에
바람결에 함께한 생명이 심장에 고동쳤다

찾으려 달려가고 달려가도 잡을 수 없었지만
그 따스한 추억은 잊을 수 없었다.

20살의 어느 날 나는 다시 너를 만났다
여린 팔뚝에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핏기 없는 피부
어른이 되어있는 너는 여느 사람들보다도
더 아이 같았다.

이번엔 놓칠 수 없어 소리쳐 부르니
흐릿한 태양빛이 네 흰 피부에 비춰
얼굴은 보지 못한 채 너는 내게 속삭인다

이번 계절은 아직 불완전하네

23살이 된 나는 별 다름이 없었다.
그저 군대를 2년쯤 다녀오니, 내 손에 쥐어진 통장과 시간들을 잘 바느질해 여행을 다닐 뿐이었다.

8년 전 맞은 바람의 향기가 그리워 돌아간 고향
가지런한 갈대들이 오열하는 소리와
을씨년스러운 추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돌아온 이유는 너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른 곳들은 다 건물이 들어오고 도로가 깔려도
이곳만큼은 아직 나의 추억이 어려있어서

너를 마지막으로 본 이 지평선은 태양이 눈을 가리지 않는다.

아직은 따스할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네가 있었던 그 장소를 작은 suv 안에서 바라본다

구릿 거리는 기름냄새와 비료냄새가 섞여
잠시 눈빛이 흐릿할 순간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다가왔다

혹시 당신의 계절을 사도 될까요

그는 지금의 내 계절이 가장 쓸쓸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했다.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제안은 달콤하다고
마치 마지막기회인 듯 양

그가 내민 작은 종이에는
펜과 함께 양도계약서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지금 당신의 계절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기억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그 작은 문장이 나를 어렵게 하였다.

계절을 판다고, 고통을 없앤다고

예전의 추억들을

그는 검은 모자를 벗어서는 인사를 건네곤 떠나버렸다

그 순간 건너편에 흐릿한 그림자가 졌다.
이번에는 놓치면 안 돼 라며
차 키도 꽂아놓은 채로 달려간 그곳에는

"그리운 계절은 고통스럽지 않아, 아픈 건 기억일 뿐"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나는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좁은 틈 안에서 천천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고양이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에

작은 종이가 떨어졌다

"당신의 계절을 샀습니다, 이제 그립지 않아요. 다만 너무 흐릿할 뿐이에요"

계절은 훌훌 날아가버렸다.

고양이는 내 머리 위에서 건물 사이를 휙 지나다닌다.

나는 손을 쫙 펴보았다.

엄지, 검지, 약지, 소지
모두 1cm의 길이로 완벽하게 잘려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른다

계절을 산다는 건 어쩌면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닐까
겨우 내 글자 하나에서 그 한 자를 빼면
내 기억의 끝이 피어나는 건가

모든 사념들아 다 하늘로 날아가거라
가장 짙은 계절은.. 그립지 않다
그저 흐릿할 뿐

내 희망은 선택을 항상 간과해서
불안한 마음만 눈앞에 상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