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모호함 1

다 마신 커피 잔을

다시 들었다
텅 빈 것들은 오래 따뜻하다

서랍 속 오래된 연필처럼
꺼내 쓰지 못한 말들이
가끔 찌르고 지나갔다

바람이 아니라

문턱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사랑을 고양이라 불렀고
너는 그것을 수평선이라 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대충 짐작만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시계는 계속 돌아가고
방 안엔 여전히
작은 조명 하나 켜져 있었다

빛과 어둠 사이
그 모호한 사랑의 명칭은
끝내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사랑 그 모호함 2

한때는 너를
벽에 기대어 놓은 그림이라 여겼지

그림자보다

더 오래 자리에 남아 있는

내가 본 건
액자 너머의
창밖의 먼 곳이었다

너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나는 대답할 일이 없었다

모호함으로 서로를 이해했지
이해의 모서리는 늘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무얼 사랑한 것인지

바라보던 어느 날의 바다였는지
끝내 구별하지 못했어

한 조각 파도에 마음을 놓고 왔다고 믿었지

시간은 늘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남은 건
자리를 잊지 못하는 의자 하나

사랑은 그 위에 앉아
오늘도 명확하지 않게 숨을 쉰다

사랑 그 모호함 3

문득 네가

내 안에 없다고 느낀 건

떠난 날이 아니라
너를 부르지 않은 어느 아침이었다

햇빛은 오래 머물렀고
방 안에 먼지가 떠다녔다

먼지를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며
기억해내려 애썼다

사랑은 언제
감정에서 풍경으로 바뀌는 걸까

시간은 아직 내 안에 있지만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앉았던 자리에 등을 기댄 채
전혀 다른 계절을 듣는다

누군가의 숨소리 없이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가끔은 묻고 싶었다
그 모호한 여백이
정말 사랑이었는지

우리가 사랑이라 믿었던
서로의 오해였는지를

사랑 그 모호함 4

남은 것들이
모두 사물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접힌 수건
절반쯤 탄 초
뒤집어 놓은 잔 두 개와
마주 보지 못한 창문 하나

우리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사랑이 떠났다는 말조차

사랑처럼 조심스러워서
끝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작은 정적들을 의심한다
너와 함께 걷던 길에 핀 이름 모를 풀잎들이

계속 같은 쪽으로만 기울고 있는 이유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더는 묻지 않는다

이쯤이면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에 닿기 전
잠시 머문
그림자의 틈이었을까

사랑 그 모호함 5

떠난 방을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
옷걸이에는 같은 방향을 본 셔츠 두 벌

탁자 위엔
누군가의 손을 오래 잡았던
가늘게 휘어진 유리컵이 남아 있었다

이름 없는 것들만
사랑 끝에 오래 남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은 머리카락 한 올이
마지막 말처럼 보여
괜히 발끝으로 피했다

있었던 자리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입을 맞췄던 벽은
이제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고

눈을 감았던 창문은
다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을 나서며
남긴 것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랑은 늘 그렇듯
정확하지 않다

사랑의 그 모호함 6

떠난다 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후의 날들은
자꾸만 너의 방식으로 펼쳐졌다

물 컵을 둘째 칸에 놓고
창문은 왼쪽만 열며

네가 하던 말을 흉내 내며 생각했다
조용한 날이 더 위험하다고

그 말이 맞았는지
지금도 대답을 찾고 있다

네가 앉았던 자리에 햇빛이 앉아 있었고
무심코 말을 건넸다
오늘은 늦었네
햇빛은 아무 말이 없었다

끝났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끝낸 적은 없어서
사랑은
아직도 너를 고쳐 쓰고 있다

무엇이 남아 있는가보다
무엇이 지워지지 않는가를 묻는 쪽이
이제는 더 정직해 보인다

사랑은
물음표 끝에 놓인 마침표를
아직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의 그 모호함 7

누군가는 먼저 나갔고
누군가는 끝까지 등을 보이지 않았다

남겨진 방엔
접힌 수건 하나와
꺾인 침묵 몇 조각이 머물러 있었고
그 방을 닫으면
끝난 줄 알았다

자꾸만
너의 손목을 내 손으로 기억했다

말하지 않은 말들이
방 안을 떠돌다
사물처럼 굳어졌고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너의 웃음이 묻어 있었다

얼굴을 끝내 확인하지 않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사랑은 분명 떠났지만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

지워진 줄 알았던 문장이
다시 문장 속에서 살아나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던
어떤 하루의 중심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