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모댁은 '엣헴'하는 집안이었더랜다



대문 앞에는 방물장수가 줄을 서고, 명절에는 경찰청장이 문안을 왔다.
여름 처마에 서면 본가 소유의 토지와 일하는 소작인들이 끝없이 펼쳐져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외조모님은 그 댁의 홍일점 넷째 딸이었다.

외조모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집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갓 쓴 선비가 돌아다니던 당시 말만한 처자가 남학생들과 동석한다는 건 증조부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대신 비싼 돈을 들여 가정교사를 두었다. 외조모는 교사로부터 몸가짐과 예법, 수예 따위를 배웠다. 귀한 집 따님이니 설렁설렁 할 법도 한데, 교사가 엄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고 혼도 많이 났었더라고, 나중에 외조모는 말했다.



반면 외조부댁은 '굶는'집안이었다.
빈곤하다 해도 식량이 없어 굶는 형편은 당시에도 흔치 않았는데, 외조부댁은 진짜로 밥이 없어서 굶었다.
집에는 여섯 남매가 있었는데, 오늘은 첫째, 셋째, 다섯째가 굶고, 내일은 2,4,6.. 이런 식으로 끼니를 정했다고 한다.
외조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툭하면 혼절하곤 했는데, 그래서 외조부의 굶는 순번에는 다른 형제들이 십시일반하여 끼니를 챙겨줬다고. 그래선지 독립한 지 한참 뒤에도 외조부의 형제 사랑은 각별했다.



외조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 영장이 나왔을 때였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 외조부는 지주 대감님, 그러니까 외조모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외조부는 대감께 절을 올리고 누구누구 아들인데 군입대로 장시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강하소서. 인사를 올렸다.
대감은 외조부에 가는 길 바라는 게 있느냐고 물었고, 외조부는 고향에 남는 어머니가 걱정인데 참한 처자를 곁에 두면 걱정이 없겠습니다. 했다.
대감은 외조부더러 잠깐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후 하루 동안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낚시를 하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다음 날 술이 덜 깬 외조부가 비몽사몽간에 논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대감이 한마디를 했더라고 한다.
"처자식 굶기진 않을 상이로다."
그렇게 대갓댁 금지옥엽의 넷째 딸은 가난한 일꾼 집안 며느리가 됐다.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났는가 하면

타고난 강골과 밝은 심성, 부지런함으로 순식간에 일꾼 집안을 장악한 외조모가, 외조부 입대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엔 작업반장 비슷하게 되어 있더라고 한다. 외조모 말로는 체질 안 맞는 예법 교육같은 걸 받다 물 만난 물고기의 심정이었다고. 외조모는 아이를 여럿 낳고도 계속 일을 하다, 애가 넷이 되어 도저히 시간이 안 나자 그제야 일을 그만두었다.
외조부는 전역 후 장교로 재입대해 긴 파병을 다녀왔는데, 귀국 이후론 아내와 떨어지지 않았다.

외조부는 대감과의 믿음을 지켰다.
아내가 살 집, 세 받을 가게 한 칸. 욕심쟁이 아들이 탐낼까봐 들어 놓은 평생보험까지（예상은 들어맞았다.） 준비를 마치고 일찍 세상을 떴다.
외조모는 그 뒤로도 20년간 건강하게, 잔병도 치매도 없이 살다 남편을 따라갔다.



여담으로 외조부는 본인이 대감으로부터 당한（?）걸 되갚고 싶었는지
내 어머니가 남편감을 데려오자 똑같이 바둑을 두고 술을 마셔 하루 보내는 시험을 했다.
그리고 "당신만은 절대 사위 못 삼겠다."며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고, 내 아버지의 꽃미모에 넘어간 어머니가 멋대로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