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헛바람골이라고 불렀다. 그래서일까, 슬레이트 사이로 바람이 슬슬 기어들어 오고, 픽픽 구멍 나 버린 문틈 새로도 바람이 들어왔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동파가 시작되고, 응달에는 얼음이 바짝바짝 얼어 두 발을 뒤뚱거리며 내려와야 하는 언덕 위 동네.
나는 언덕 아래에 살았고, 너는 언덕 제일 꼭대기 즈음에 살았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동네의 이름을 수군덕대면서, 너에 대해서도 수군덕거렸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헛바람이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너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아침 거친 비탈길을 내려왔다. 앞을 바라보면서, 저 아래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면서 종종걸음으로 내려왔다. 수군거림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품속에 삐져내기 싫은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웃는 표정으로 너를 마주하면, 너는 살짝이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걸어갔다. 군데군데 낡은 흔적이 남은 가방과 오래된, 아니, 그것들은 어떻든 상관없다. 아니, 너는 너로써 충분했다. 곧 올 겨울 하늘 아래, 너는 햇볕에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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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너는 말했다. 해진 옷깃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었을까. 아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너는 말했다. 사실 너는 삼류 소설의 주인공 같은 불운한 인물이었다고. 어릴 적 보았던 동화 속의 공주를 꿈만 꿨었다고. 나는 너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던 일이었기에, 이제껏 너를 기다리면서 언뜻 보였었던 순간의 장면들을 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있지.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 문장을 끝으로 너의 얼굴에서 마침표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밑의 모래밭이 더 진한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너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 것만 같았지만, 나는 아직 어려서, 익지 않은 단어들만 입술 속에서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너와 나 사이의 짙은 색의 모래는 더는 퍼지지 않았고, 그제야 나는 그럴듯한 문장을 입술 밖으로 꺼냈다.

“그럼. 내가 너의 껍데기가 돼줄게.”

국어책 속의 글귀였었나.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너의 입꼬리가 살짜기 올라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너는 뒤로 돌아섰고, 나는 방금 한 말의 의미를 너에게 전달하려 애썼다. 바람이 불어서 어디선가 떨어진 낙엽 더미를 보고 얘기했다고 할까? 낙엽이 모래의 껍데기듯이, 나도 그렇게 될게. 이 말이 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떨어지는 노을에 두 뺨이 물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너는 서술이 부족한 문장에 만족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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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화장을 했다. 두 눈덩이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옷 끝을 붙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처음으로 안았다. 새어 나오는 소리는 내 품에 모두 묻어라. 아무 말이 없어도 너는 나의 의중을 알았고, 소리 없는 비명이 내 턱 아래서 들려왔다.
나는 너의 껍데기이기에, 너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하여야만 한다..
울음소리 아래, 너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나의 두 주먹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들릴 듯 말 듯 한목소리를 너에게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저 뒤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돼. 겨울의 초입에 불어온 바람에 너의 짧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우리는 한참을 숨만을 골랐다. 아주 천천히, 눈을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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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공기는 방음재 역할을 했다. 조심스레 걷는 나와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걷는 너는 이윽고 언덕 위의 집에 도착했다.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집에는 쥐새끼 하나도 없었다. 아니, 큰 새끼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그놈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는 어느 도라꾸 뒤 짐칸에서 들고 온 망치를 손에 쥐었다. 너의 목에 매인 쇠사슬을 끊어 내기 위해, 어지럽게 박힌 못들을 뽑기 위해 인정 따위는 없이 인중에 뭉툭한 쇳덩이를 내리쳤다.
최후의 숨은 나의 한숨과 하나 되어 밝아오는 새벽녘 사이로 흩어졌고, 붉게 물들어가는 방안은 새 아침이 왔다고, 태양 볕을 방안에 비췄다. 너는 이런 나를 예상했었던 것일까? 불규칙한 숨이 뒤에서 들렸다. 그러나 떠나는 발소리는 없었고, 너는 조용히 나의 뒤를 안았다. 쇳덩이 끝에서 똑똑 거리는 방울을 우리는 조용히 들었다. 나의 두 눈은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고, 두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바닥을 밟고 있었다.
등 뒤의 온기는 진실이고, 눈앞의 장면은 거짓이 아니다. 너는 내 등에 눈을 가리고 섰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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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다음 날, 어디선가 구해온 큰 비닐에 그것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해가 뜨기 전 새벽, 산 중턱 즈음에 있는 인적 드문 못에 그것을 빠트렸다. 한겨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살얼음이라도 끼어 있었다면 그것은 퍽 문제가 되었을 것이기에. 뽀글뽀글 거리는 한숨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괜찮을 거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나는 안도감에, 너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아니, 겨울의 추위 때문일 테지. 우리의 코끝은 빨갛게 물들었고, 눈물샘에서는 방울방울 떨어졌다. 훌쩍이는 소리가 한참을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너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침 이슬, 사슴의 눈망울, 시린 새벽녘. 아름다운 표현이 너의 표정 속에 담겨 있었다. 나는 옷 끝으로 잘 못 채색된 너의 표정을 닦았다. 마치 아름다운 그림 작품에 먼지라도 묻은 듯이, 조심스레, 세심하게 곧 말라버릴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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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의 별빛이 붉게 물들었다, 다시 어두워졌다. 일정한 박자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것은 우리에게로 와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잠시 뒤, 일정한 박자로 세상과 우리 사이를 두드린다. 우리는 아직 미숙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너의 어깨를 안았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 것이다. 나는 너의 껍데기이므로, 연약한 속살을 지키기 위해 말했다. 너의 어깨는 들썩이기 시작했고, 얇은 문은 더 빨리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나에게 어디에 숨어있으라 했다. 어디에 도망가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고개를 저었다.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너의 불평은 이다지도 작다. 너는 내 속에 들어올 만큼 작은 사람이므로, 너의 슬픔은 내가 모두 가져가야 한다. 나의 온기는 모두 너에게 남기고, 차갑고 시린 것들은 내가 모두 가져가야 한다. 그것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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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뒤에 두고, 툭툭거리는 발걸음으로 쿵쿵거리는 문을 열었다. 번쩍거리는 플래시에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누군가 옆에서 나의 팔을 가로챘고, 누군가 무어라 외쳤다. 너가 놀라지 않도록,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너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바라본 순간, 세상은 아주 조용히 기울고 있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