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갈 일이 있었다.
첫 전철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열심히 산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이상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편도 1시간 40분 출퇴근 거리에 있는 회사에서 하루에 14시간, 16시간을 보내면서
집은 잠깐 눈 붙이고 옷 갈아입는 정도의 공간인 것 처럼 살았다.
그놈의 '할 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살았다.
긴 시간도 아니다. 겨우 4년.
4년을 그렇게 보냈다.

3년 반을 그렇게 지내다가 결혼을 하면서 조금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이라는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급여 조건은 개선되었으나, 환경은 조금 더 나빠졌다.
최근에는 남편이 야간에 일을 하는 직장으로 이직을 하면서 우리는 거의 주말부부가 되었다.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여성들도 사회 활동을 많이 한다. 출산, 육아는 한때다. 일을 놓지 말아라"라는 상사의 말에 "저는 더이상 저를 위해 치열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이제는 딸로써, 아내로써, 며느리로써, 엄마로써 치열하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옆 팀 상사가 "그것도 자기 자신이 바로 섰을 때 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건 이미 충족 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를 위해 열심히 살았고, 이만 하면 됐다 싶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취한 대리가 자리에 끼어들면서 자연스레 끝났다.

공대 박사님들처럼 대단하지도 않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박사를 졸업했고,
이직을 해도 나를 찾아주는 클라이언트가 있어 위신이 섰고,
맺어야 할 일이 있으면 밤샘을 해서라도 맺어냈다.
이만하면 열심히 잘 살았다.
이제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아이도 갖고,
남편의 출퇴근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아내가 되고싶다.

사실 나는 무엇보다 집을 꾸미고,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빨래를 향기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내 천직은 가정주부가 아닐까..?

오늘 산책을 하면서 더더욱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마자 울음이 났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잘 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어서 잠을 쪼개고 몸을 부셔가면서 열심히, 치열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신은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를 못한다.
그게 이 우울감에서 제일 큰 것 같다.
엄마가 되고 싶은데, 엄마가 되지 못하고 있어서.
양가 어르신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친정엄마는 한약을 지어주며 임신 준비를 종용하고,
시어머니는 스트레스 받지 말라더니ㅎㅎ 차라리 애 없이 살으라고. 너네 애는 가질 수 있기나 하냐고ㅎㅎ
.....둘 다 싫어..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너무 웃겨서 또 눈물이 났다.

추석이 지나면 그만 두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추석이 지나니 퇴직 의사를 밝혀도 될지 몰라하고 있다.

이제 이직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퇴직하는게 창피한가..? 적응을 못하고 튕겨나가는 것 같아서..?
아니면, 이제 막 바빠지기 시작할 시즌인데 팀원들에게 다 지우고 나 혼자 빠지는 것이 미안해서..?
아니면..나를 보고 계약해준 클라이언트의 사업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가장 크다.
그렇게 또...퇴직 의사를 밝히는 것을 미룬다.

나는..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
열심히도 아니고..그냥 살고싶지 않아졌다.
이렇게 까지 죽음을 바란 적도, 죽음을 바라는 기간이 이렇게까지 긴 적도 없다.
너무 힘들어...
정말 싫어...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거야'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며 살았는데,
이젠 그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목을 조여오는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 굴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