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쩌지…….’

녀석이 어떤 놈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목소리로 봤을 때 남자로 추정했는데 만약 나보다 크고 강한 육체를 지닌 녀석이라면……. 방금 전 그 돼지를 죽일 때에는 그가 방심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지 정말 제대로 싸웠다면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사람을 해부하는 녀석들이야……. 나를 죽이는데 머뭇거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을 많이 죽인 녀석들이 나보다 강할 확률이 높았다.

‘뭐가 싸우면 이길 수도 있다는 거냐……. 병신 같은 놈…….’

방금 전에는 무슨 객기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막상 실전이 다가오자 방금 전에 생각하고 있던 계획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바뀌어있었다. 난 대체 어떤 영웅 심리를 품고 있었던 걸까?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았단 말인가.

‘정신 차려. 문호야, 정신 차려.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정말 죽어!’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싸워야한다. 이렇게 떨고 있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침착하고 지금 상황을 냉정히 봐야만 한다. 그나마 방금 그 녀석을 상대해봤기 때문일까 마음은 의외로 금방 침착해졌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는 쉬웠다.

‘어차피 피할 수 없잖아.’

어느 정도 진정되자 메스를 다시 고쳐 잡았다. 생각하고 있던 계획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급히 어떻게 할지 주위를 살폈다.
현재 내가 등지고 있는 침대 엄폐물은 복도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녀석의 시선을 막아주고 있다. 녀석은 방금 그 돼지 녀석처럼 방 안에 있었을 테니까 방금 그 소리로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무리다. 즉, 아직까지는 내가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최대한 녀석이 방심한 상태에서 덮치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지금도 그리 절망적인 상황만은 아니었다.

“잘못 들었나?”

녀석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이제는 거의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좋아, 녀석이 엄폐물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순간 덮치는 거야.’

몇 발자국 남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녀석을 덮칠 수 있을 거다. 물에 젖은 발소리. 백정의 동료가 확실했다.

“학두 녀석인가?”

그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드디어 녀석의 옆모습에 내 시야에 닿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노리는 곳은 목과 얼굴이었다. 양손에 메스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목과 얼굴을 향해 찔렀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어?”

녀석은 멍청한 소리를 뱉으며 이제야 겨우 나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런 무방비에 노출된 녀석의 목과 관자놀이에 메스를 꽂아 넣었다.

“컥!”

녀석은 짧은 비명을 흘렸다. 사람이 아무리 반응속도가 빠르다고 한들 갑작스러운 습격에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관자놀이는 두개골 때문인지 깊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목으로 날아간 메스는 정확히 녀석의 야들야들한 목 근육을 꿰뚫었다.

“케, 켁!”

녀석의 떨리는 양손이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딜!!’

오른발에 더욱 힘을 주어 쥐고 있던 메스를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관자놀이에 찔러 넣었던 메스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그 직후 녀석은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뇌를 공격한 탓에 반사적인 행동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빠르게 메스를 회수하려고 했지만 돌에 꽂힌 것처럼 관자놀이에 있는 메스는 빠지지 않았다. 목에 박힌 메스만 겨우 빼냈다.

“하아, 하아…….”

어느 샌가 땀방울들이 이마에 맺혀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땀방울은 붉은 웅덩이 위에 떨어졌고, 작은 파문을 만들어냈다. 녀석의 시체에는 징그러울 만큼 많은 혈액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조, 좋아…….’

피가 잔뜩 묻은 메스를 녀석의 옷에 닦은 뒤 천천히 일어났다.

“어.”

일어나자마자 바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다행히 피 웅덩이 위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피의 영역은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피에 옷이 젖어버릴 거다.

‘이, 일어나야…….’

하지만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젠장, 일어나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애썼지만……. 이번에는 말 그대로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거다. 물론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라면 죄겠지만 그는 나에게 아무런 해악을 가하지 않았다. 방금 전 그 돼지는 나를 강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이런 나의 죄책감을 더욱 짓눌렀다. 방금 그 돼지처럼 혐오스러운 복장이 아니었다. 청바지와 시중에 흔히 있는 긴팔 셔츠.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 잘한 거겠지? 이 사람은 분명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그의 두 눈에는 ‘경악’이라는 두 글자만 담겨있었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 죽여 버린 거다. 고통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이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라도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 있어요! 살려주세요!”

넋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렇지.’

방금 그 비명을 지른 사람이 문득 생각났다.

‘다행히 죽진 않은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전혀 움직이려고 하지 않던 다리 근육이 아무렇지 않게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여자인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자였다. 조금 어린 목소리로 봐서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쯤이라고 판단했다.

‘그녀가 도움이 될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겠지만 과연 그녀가 도움이 될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리고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