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이 할머니는 내 블로그에 최다 등장 인물이자, 우리병원 최다 진료 빈도를 기록하신 분중의 한 분이시다.
할머니 사연이나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얽힌 애증관계는 익히들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씩씩한 분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작년 집에 불이 난 이후로 할머니가 영 기운이 없어보이고 진료 후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지셨다. 처음에는 요즘 감기환자가 많아서 병원 로비가 북적거리니까 환자들에게 이런저런 사연을 얘기하시느라 그러려니 했는데, 가만보니 그게 아니었다.
진료마감이 다 되고, 대기실에 아무도 없는 시간까지 계속 앉아 계시는 것이다.
원래 할머니가 하루에 서너번씩 병원에 등장하시는 일은 잦은편이다,
또 할머니는 일이라도 있으시면 영민이를 데리고 와서 병원 로비에 두고 가실 때가 자주 있다.
아이를 아무데도 맡길데가 없으니 혹시 공공근로 자리라도 생기면 가장 안전한데가 병원인 것이다. 할머니가 진료를 마치고 “우리 영민이 좀 봐줘~!” 하고 나가시면 그때부터 영민이는 간호사나 원무과 직원들 몫이다.
물론 영민이에게 특별히 손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민이도 이제 눈치가 백단이라서 대기실 제일 뒷줄에 앉아서 온종일 TV 를 보고 있으면, 가끔 직원들이 빵을 주거나 마실 것을 주기도 하고, 다른 환자들이 용돈을 손에 쥐어 주기도 한다, 또래에 비해 몸무게가 반 밖에 안나가는 녀석이라 누가봐도 안쓰러운 탓이다.
그래서 영민이가 낮에 혼자 병원에 남는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지만, 밤 늦게까지 할머니와 둘이서 대기실을 지키는 것은 5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께 사정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집에 불나고나서 새로 얻은 방이 추워요? 아니면 불을 땔 돈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 아니,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그래, 불나서 타버리고 텔레비전이 없어서 텔레비전 볼라고,, 방해되면 오지말까?”.. 그러고보니 그럴만했다, 불이나서 옷가지까지 모두 타버린 상태니 노인과 아이가 늦은밤에 tv 라도 못보면 무엇을 하겠는가 싶었다.
작년부터는 어떤 경우라도 마음 약해지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지만 （ 할머니도 이제 아시는듯 했다） 원무과장을 불러 병원에 남는 TV 가 없는지 물어보았더니, 남은것은 작은 환자용 TV 밖에 없었다. 도리없이 내 사무실에 놓인 TV 를 드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고개를 백번 쯤 숙이셨다.
사실 중고 TV 한 대 가치가 5만원이나 할까? 내가 버릴려면 오히려 돈을 내고 버려야 할 물건인데, 그나마 그것에도 저러는 모습이 영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원무과장에게 TV 가져다 드리라고 다시 확인을 해보니, 할머니가 그날 밤에 이웃에서 리어카를 빌려서 그길로 당장 싣고 가셨다고 했다.
할머니 생각에는 내가 혹시 다음날 마음이 변할까 걱정이 되신 탓이리라 싶었다. 결국 나도 문제가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그러신다 한들 그것이 이유없는 게으름이 아니라 결국 생존의 한 수단 이었던 것을, 내가 거기에 마음을 두고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둔 탓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 한켠이 영 불편하고 걸려있는데. 방금 할머니가 밤에 병원에 또 오셨다.
“할머니 집에 TV 안나와요? 왜 선이 연결이 잘 안되요?” 내 질문에 손사래를 치셨다. 할머니는 그 질문에 “그게 아니고 서울에 구경갔다가 허리가 병이났어, 아침 10시에 갔다가 한밤중에 왔는데, 추운데 한데 오래 서있었는데다가, 차를 오래타서 허리가 아파,” 하셨다.
그날 영민이가 하루종일 병원에 맡겨져 있었는데 그게 결국 관광 때문이셨다는 말인가.. 싶어 순간 약간 심기가 불편해졌다.
할머니와 나는 늘 이런식이다.
할머니가 내 진료실이나 대기실에 앉아 늘 눈물지으시며 손을 벌리시는 일이나, 할머니가 영민이를 시설에 맡기지 않고 데리고 계시는 일이나, 이렇게 관광을 가시는 일이나 모두 바르지도 그러지도 않은 일이다. 하나는 생존이고, 둘은 혈연과 도구의 문제이고, 세 번째는 아무리 형편이 그래도 할머니도 한번쯤은 웃는 일이 있어야 할테니 말이다.
이 문제들은 내가 아무리 고민을 해도 이리 얽히고 저리 섥혀 결국에는 실타래처럼 뭉치고 만다.
그런데 할머니의 그다음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 누가 동네 노인들을 서울 구경 시켜준다고 가자더라고,, 노인정에 할매들 모두 다 따라갔어,, 청와대도 보여주고 청계천인가 좋은거 해놨다고 그거도 구경 시켜준다고 가자는거야, 그래서 아침에 강변에 모이라는데 가보니 세상에 관광버스가 스무대가 넘게 와 있는거야, 아마 안동시내 노인들 다 갔을거야, 그런데 말이야 막상 따라갔더니,, 거기 서울에 강가에 차를 내리더니 모두 데리고 방송국 앞에다가 가는거야,.. 나는 방송국 구경 먼저 시킬라는줄 알았어,, 그런데,, 누가 나오더니 뻘건 띠를 하나씩 주고, 손에 글씨달린 막대기를 하나씩 주더니 ,, 손뼉을 치라는 거야, 그리고는 따라하라는데,, 그게 무슨 ‘정 머시기 사장 물러가라’ 라고 하면 우리가 물러가라.. 하고 손뼉을 치고 막대기 흔들고 하는거야,, 할매들이 그래도 그거라도 해야 구경하는갑다 싶어서, 그냥 물러가라,, 하면 손뼉치고 했거던,, 그런데 좀 있으니 기자라는 사람이 묻데? 할매들 여기서 뭐해요? 하길래,, 그래도 아무리 늙은 병신이라도 눈치는 있거던,, 우리가 놀러왔다하면 우리를 델고온 사람들이 다친다 싶어서 정 머시기 사장 물러가라고 ,, 그거 할라고 왔다고 했어,, 다들,, 그런데.. 망할놈들이 세상에 그거 끝나고 도로 버스태워서 그냥 와버리자너,, 김밥 두줄하고, 돼지고기 삶은거 조금하고, 떡 두쪼가리 주고는 밥도 안주고,, 그걸로 서울 방송국 구경했다는기라,, 그래서 오는데 사방에서 할매들이 허리아푸다고 앓는기라,, 그 추운데.. 그짓을 했으니,, 몽땅 속았지 뭐,, ”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할머니의 사연이야, 그나마 이상한 물건 파는데 속으신게 아니라 다행일 수 있지만, 세상에 이게 무슨일인가?
사회는 다양하고 누구나 소수의 의견을 개진할 자유가 있다,
소수는 그 자체로서 보호받아야하고 그것이 바로 인권이다,
나는 누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하고 만세삼창을 하더라도 그가 간첩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을 가련하게 여길 뿐 처벌하는데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짐승과는 달리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세삼창을 하는것은 자유지만, 귀가 약한 누군가에게 이 만세는 김구선생을 위해하는 것이라고 속이고 만세삼창을 시키면 그것은 안되는 일이다.
그것은 누구나 스스로 존중받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의 경위도 자세히는 모르고, 누군가가 왜 할머니들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그 주장이 옳은 주장인지 틀린 주장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분명한 것은 절대로 이런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그 일이 아무리 옳은 일이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 이런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어쨌건 그 물러가야 할 사람이라는 사장과, 무슨 사연인지 무슨 일을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을 물러가라고 할머니들을 동원했다는 또 다른 그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영민이 할머니는 진통제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으며, 영민이는 그날 하루종일 병원 대기실에서 오가며 또 하루를 천덕꾸러기로 지내야했다....
2007/01/08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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