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여동생에게.

너에게 편지를 쓰려 마음먹고 나서야 이 편지가 너에게 주는 첫 번째 편지란걸 알게 되었구나.

평생을 단칸방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인지,

그저 편지라는 감성적인 것을 생각지 못할 만큼 내가 삶에 찌들어서 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지금은 처음으로 보내는 이 편지를 네가 기쁘게 받아줬으면 한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쓰게 된 편지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함이 느껴지는구나.

그러니 그냥 처음부터 떠오르는 대로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열두살 때.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고, 그 해 여름 아버지도 어디론가 사라지셨지.

세 살 어린 너와 그 좁디좁은 단칸방에 완전히 버려졌다는걸 알았을 때,

난 울고 있는 너를 안아 들고 맹세했다.

내가 무슨짓을 해서라도 너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도록 키워내겠다고.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내가 학교 대신 공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 따위는 둘이 살기에 턱없이 부족했지.

그랬기에 난 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에게 맛있는걸 먹여주기 위해 내가 먹을 것을 포기해야 했고.

너에게 예쁜 교복. 예쁜 옷을 입혀주기 위해 내가 입을 걸 포기해야 했다.

네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 동안 내 친구들과는 멀어져야 했고,

네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게 난 웃음을 버려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너무 지쳐서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지.

그래. 그땐 말하지 못했지만, 매일같이 소리죽여 울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내 인생을 오로지 너만을 위해, 너 하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한 이상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순간을 버텨왔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공장일이 끝나자마자 대리를 뛰고, 대리 일이 끝난 새벽녘부터 배달일을 하면서

몸이 만신창이 되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네가 웃는 모습만 보면 전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난 못배운 놈의 새끼. 부모없는 새끼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돈 때문에 남의 발 앞에 엎드릴 지언정,

너만은 착한 아이, 똑똑한 아이, 부족함 없는 아이로 잘 자라주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나에게 넌 삶의 이유이자 희망이자 전부였다.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때.

명문대까지는 아니지만, 수도권의 그럴싸한 대학에 합격했단 소식을 전한 그때.

난 너에게 조심스레 물었었다.

학생의 신분이 끝나는 느낌이 어떻냐고.

사실 내 질문의 의도는 감상 따위를 묻는게 아니었다.

평범한 학생으로서,

부모 없는 가난한 학생이 아니라 남들과 다를바 없는 여학생으로서 부족함 없이 잘 보냈냐는 의미였지.

넌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친구를 사귀고, 남들과 다를바 없이 놀러 다니고,

누릴 것을 전부 다 누릴 수 있었다고.

그 말은 듣고 나서야 난 안심하고 너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너도 조금은 네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나 역시 조금은 내 인생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하지만 대학 등록금은 그리 만만치 않았지.

그리고 여대생은 여고생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내게 손을 벌려오는 날이 많아질수록 난 버거움을 느꼈다.

지나가는 식으로 슬쩍 아르바이트를 해보는게 어떠냐 말해보기도 했지만,

넌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며 단칼에 거절했지.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래도 참기로 했다.

그래. 네가 제대로 공부해야 우리 남매가 산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성공하면 그때는 웃을 수 있으니까.

아직은 내가 조금 더 고생해야 할 시기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더 늘렸지.

네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게 되면 나에게도 시간이 주어질거라 믿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여유가 생기면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못 배운것에 대한 설움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가장 먼저 공부를 하고 당당하게 검정고시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조금이나마 시간이 생길 때 마다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네가 고등학생 때 보던 교과서 따위를 들여다보곤 했지.

네가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면 그땐 나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웬 남자 한 명을 데려왔다.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너와 마찬가지로 대학생 신분인 그 남자는 널 부양할 능력이 없었기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네 배 속에 생겨난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 가정을 이루는 것이 너의 행복이라면 나도 이해한다.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존중해 줘야겠지.

내 욕심으로는 더 능력있고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지만

그래도 책임감 있고 건실해 보이는 그 남자를,

가장 소중한 네가 선택한 그 남자를 나도 믿어보기로 했다.

실제로 학교를 그만둔 그 남자가 열심히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그때는 나도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함께 결혼을 준비하는 너와 그 남자를 보며, 이게 옳은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 부담이 줄어들어 기쁜 것도 있었지.

방식은 달랐지만 이제 나도 내 인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게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다.




네 살림에, 네 결혼식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지나치게 무리해서 일한 탓인지

이제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공장에서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빠른 대처 덕에 기계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왼쪽 손목만은 포기해야 했다.

외팔뚝이가 되었다는 슬픔보다는 이제 널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그간 몸뚱이 하나 믿고 해내던 대부분의 일들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마음을 다잡아봐도 그간 고생한 것과 그간 포기한것들.

그리고 앞으로 절대 가질 수 없게 된것들이 자꾸 떠올라 어리광을 부리게 되더구나.

그래서 나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너에게 물었다.

이제 네가 날 돌봐 줄 수 있겠냐고.

넌 한동안 말이 없다가 뒤늦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네 표정. 그리고 망설이는 동안 스쳐 간 입술의 떨림으로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래. 네 행복이 망가지는걸 원치 않았겠지.

이제 드디어 힘겨운 단칸방 생활을 청산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 생활을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웬 외팔이 짐덩이가 달라 붙는게 탐탁치 않았겠지.

난 널 이해한다.

그간 너도 맘고생 많이 했고, 이제 제대로 된 행복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방해하는 나에게 결국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전부를 바쳐 키워낸 네가 날 짐짝 취급해도 될까?

오로지 포기하기만 했던 내가 이것마저 포기해야 할까?

넌 내게 단순한 여동생이 아니라 삶의 이유였고 삶 자체였다.

가족.

그리고 가족이었지.

그럼 너에게 난 뭐였을까?

그냥 돈벌어다 주는 사람? 인생을 순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그냥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

정말 그렇다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지금은 내가 뭐가 되지?

인생을 방해하는 짐짝일까?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남이고 타인일까?




너에겐 작은 망설임이었겠지만 그것 하나로 난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내가 포기한 모든 것이 너의 지금을 만들었지만

넌 내게 작은 배려 하나 보여주지 못했다.

마음이 수만갈래로 찢겨지고 차라리 아버지에게 버려졌던 그때 같이 죽어버릴걸 하는 생각.

나 혼자였다면, 너만 없었다면 난 더 나은 삶을 살았을텐데 하는 생각.

그마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그 기계에 빨려들어가 죽어버릴걸 하는 생각.

온갖 나쁜 생각들.

널 상처입히고 날 무너지게 할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차서 견딜 수 없었다.

아직까지 마음이 괴롭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그래도 난 여전히 널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널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가족으로 남기위해 너의 짐이 되지도 않을거고

그렇다고 너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타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제 내 생에 처음으로 네가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하려 한다.




네가 이 편지를 받는 오늘. 그래. 너의 결혼식 날.

피로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혼여행 갈 준비를 하면서 이 편지를 받아보고 있겠지.

어쩌면 이미 내 소식이 전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너의 얼굴을 보고 이 편지를 너의 신혼집으로 보내자 마자

그대로 목을 매달 생각이다.

내가 죽으면 더이상 너에게 짐이 되지도 않고 가족으로 남을 수 있겠지.

왜 굳이 오늘이냐는 질문에는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해주고 싶다.

죽어서 잊혀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타인이 되버리는 것이니까.

단순히 내 기일이라면 네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가장 행복한 날임이 분명한 결혼기념일에 내가 죽는다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겠지.

그렇게라도 네가 날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더불어 행복해야 할 날에 내 죽음이 너에게 우울함을 가져다 줄테니

그간 괴롭고 서운했던 내겐 소심하고도 처절한 복수가 되기도 한다.

이기적인 선택이지만 이 역시 내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너를 위한 선택이기도 함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내 몫까지 행복하길 바란다. 이건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되 일년에 단 하루 만이라도 날 기억하고 아주 조금은 괴로워 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며, 행복하길 바라마.

가족이 되고 싶었지만 짐이 되었고.

타인이 되기 싫어 미움받기를 선택한 못난 오빠가.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