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물건을 정리하는 중에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스무살 때의 내가 찍혀있는 사진.
다른 잡동사니들과 섞여 서랍 깊은 곳에 박혀있다가
15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빛을 보게 된 물건이었다.
순수하고 앳된 그 모습을 보자 그리운 마음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스무살. 한창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내 미래는 밝을거라 확신하던 그때.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며 화를 내듯 물었다.
“행복하냐? 그래 너야 뭣도 모르고 행복하겠지.
근데 지금 난 처절할 정도로 비참 하거든?”
입 밖으로 나쁜 소리를 내뱉자마자 감정이 터져 나오듯 언성이 높아졌다.
“너 그따위로 헤실거리는것도 오래 안가.
현실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아름답지가 않다고.
그것도 모르면서 뭐가 그리 좋다고 쳐 웃고있어?”
한껏 열변을 토하고는 마음을 좀 가라앉힌 뒤,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너무 답답하고 열이 받아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으니까 내가 하는말 똑똑히 들어.
나처럼 안 살려면 새겨듣고 똑바로 하라고.”
하고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일단은 상투적인 이야기부터 꺼내기로 했다.
“대학생활 할 때 친구들 많이 만나. 괜히 쿨한 척 혼자다니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해. 노는게 좋아도 공부해놓으면 나중에 다 돌아오니까.
군대는 빨리가고, 휴학 길게 끌지마.
시간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힘들어 지니까.
또 술도 작작먹고.”
되는대로 늘어놓고 보니 꼰대라 불리는 어른들이 할법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이런걸 원한건 아니었기에 고개를 젓고는 진짜 하고픈 이야길를 시작했다.
“2년쯤 뒤에 친구 주선으로 소개팅 자리 하나 들어올거야.
거긴 그냥 나가지 마.
혹시라도 해야겠으면 애프터는 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사귀지도 말고.
그냥 걔한테 빠져서 마음 주지 말란 얘기야.
그게 내 불행 시발점이니까.
굳이 만나야겠으면 오래 끌지는 마.
가능하면 빨리 헤어져.
3년 안에는 무조건 헤어져야 돼.
은지 병원가기 전에. 병 걸리기 전에 헤어져.
절대 결혼하지마.
아니 하다못해 그냥 이혼이라도 해.
쓰레기 소리 들어도 차라리 그게 훨씬 더 편할테니까.”
격해지는 감정에 말을 멈추고 한동안 심호흡을 한 뒤에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못헤어지고 결혼하면 5년 동안 병수발 들게 될거야.
아프고 괴로워 하는거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돼.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하고 만번쯤 생각하고
제발 기적처럼 나았으면 하고 백만번쯤 생각하면서.
돈 들이고 시간들이고 인생 전부다 쏟아부어.
밑 빠진 독에 물 들어붓듯이.
그리고 뭣보다 그렇게 전부 가져다 바쳐봐야. 은지... 결국엔 죽어.”
슬픔보다는 분노가 밀려 들어왔기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더 웃긴건 뭔지 알아?
은지가 죽을때쯤 되니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실컷 다 해놓고, 뒤늦게 후회를 해.
은지 죽는다는 생각이 날때마다 머리를 쪼개서 뇌를 찢어버리고 싶었는데
정작 한번 후회를 하기 시작하니까 미칠 것 같았어.
엄청 사랑하고 소중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미워지더라?
은지 장례식에서 한바탕 눈물 쏟고 나니까 오히려 개운해질 정도로.
그렇다고 은지 죽고나서 편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일도 그만두고 병원비 내느라 빚도 졌지.
주변사람 다 떠나가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이제 사회생활도 못해.
은지는 죽었는데 난 벗어나질 못한다고.
알아들어?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어.
머릿속에서 완전하게 지워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고.
봐. 지금 내꼴을 봐.
사람도 다 떠나고 단칸방으로 쫒겨나서
아무런 낙도 없이 간신히 먹고 살아.
아니지 이건 사는게 아니야. 그냥 연명하는거지.
이런꼴 되고 싶어? 그러니까 내 말 들어. 그래야 네가 살아.”
토해내듯 뱉어냈지만 역시나 남는건 지독한 자기 혐오감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이 말이 과거의 자신에게 전해진다 해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너무도 뻔했다.
“그래.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안듣겠지.
뻔해. 다시 은지 사랑하고 다시 그 거지같은 짓거리를 자진해서 하겠지.
착한척. 멋진척 해봐야 나중에는 분명 후회할테니 두고봐.
마지막에 가서는 언제 죽나 손가락으로 꼽을거야.
은지 죽었단 소식 들었을 때.
겉으로야 오열했는데 속으로는 환호성이 나오더라.
추잡하지? 그래. 내 인생이 그따위였다고.”
말을 뱉어낼수록 혐오감이 심해졌지만 멈출수가 없었다.
난 사진을 집어들어 한참동안 쏘아붙였다.
“뭣보다 화나는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은지는 날 미워한단거야.”
사진을 내려놓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방 한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곳엔 야윈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은지의 형체가 서있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넌 죽었잖아.
나 할만큼 다 했잖아. 내 인생 전부를 다 바쳤잖아.
과거도 바쳤고 미래도 바쳤고 전부다 바쳤잖아.
그런데 왜그래? 마지막에 내 마음이 떠났다고?
제발 너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네 상태 악화 될 때마다 내심 좋아해서?
그걸 원망하고 싶은거야?
내가 나쁜짓 한거 아니잖아.
그냥 나도 좀 살고 싶은 마음에 좀 그런 생각이 들었던건데.
그게 죄책감 느낄 일이야? 이것도 내가 잘못한 거냐고!”
은지는 대답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한때는 사랑했던 여자지만 지금은 그저 무서운 존재일 뿐이다.
병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고.
할 수 있는 모든rjf 다 해봤지만 은지의 모습을 지울 수는 없었다.
환영인지 귀신인지는 그 비슷한 무언가인지는 모르지만
저게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 만은 확실했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옛 물건들을 꺼내 청소를 하고 주변정리를 하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금 옛날 사진 속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지워지질 않아. 그러니까 제발 후회할 짓 하지마.”
차분히 사진을 정리해 상자에 담는 동안,
은지는 여전히 섬뜩한 모습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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