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아저씨. 어때요? 이걸 보니까 어떤 느낌이 들어요?”

수혁은 휴대폰에 찍힌 영상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화나요? 짜증 나요? 무섭다거나 뭐…. 아니면 별 생각 안 든다던가.”

영상을 잠시 보고 있던 석현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이거 뭐야. 너 뭔 짓거리 한 거야?”

수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휴대폰을 내렸다.

“어쩌면 나쁜 짓이고…. 어쩌면 아니고요.”

수혁이 내린 휴대폰에서는 어린 소녀가 모질게 얻어맞은 듯 엉망으로 감금된 모습이 찍혀있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너 누구야? 그 애한테 무슨 짓 했어?

왜 우리 집에 찾아와선 그걸 보여주는 건데?”

석현이 수혁의 멱살을 잡아들고 거칠게 말했지만, 수혁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궁금했거든요. 요즘 들어 아주 핫한 우리 영웅 아저씨가 진짜 영웅이 맞을지요.

그래서 한번 시험해보려고 한 거예요.

이제 슬슬 설명해 드릴 테니까 이거 좀 놔주실래요?

자꾸 이러시면 이 아가씨 안전 장담 못 해요.”

석현은 심호흡하며 진정시킨 다음 수혁을 놔주었다.

“전 이수혁이라고 하고, 대학생이에요.

아저씨랑은 구면인데 아무래도 절 기억 못 하시는 거 같으니까 힌트를 드릴게요.

잠깐만요.

음…. 아 여기 있다.”

수혁은 다시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영상을 하나 틀어주었다.

영상에서는 화재 사고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알죠? 아저씨가 전국에 이름을 알린 그 영상.

건물이 불에 타고. 사방이 연기에다가 다들 우왕좌왕 도망가기 바쁜 와중에

일반인 신분으로 불난 건물에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 대피시키고 구조하고….

또…. 이거! 이장면!

아저씨가 요 아까 그 여학생 구해서 나오는 장면이요.

와. 이거 카메라맨 누구지? 진짜 영화 한 장면 같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어디 있냐면?

잠깐만요….

여기!

아저씨가 애 내려놓고 숨 헐떡거리다가 옆에 있던 사람한테 뜬금없이 소리 지릅니다.

‘뭘 멀뚱히 보고 있어! 사지 멀쩡하면 도와!’

간신히 그 불지옥에서 탈출한 사람한테 갑자기 일갈을 퍼부으시더니

그대로 다시 불난 건물로 뛰어 들어갑니다.

보이시죠? 여기 엥? 하는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는 애.

네. 이게 저예요. 이제 기억나요?”

석현은 그제야 눈앞에 청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을 조금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모두 이리저리 애쓰던 화재 현장에서

혼자 멀뚱히 서서 구경만 하던 청년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보고만 있던 그 청년에게 화가 나 소리친 것이 그대로 영상으로 남았고,

얼마 가지 않아 인터넷에 급격하게 퍼지며 모두가 석현을 영웅처럼 떠받들어 댔다.

“이 영상 하나 덕에 아저씨 이름이 전국에 퍼져나갔잖아요?

신문에 나고, 인터뷰 오고, 티브이 나오고…. 아주 연예인이 되셨잖아요?

반대로 전?

네. 천하의 호로새끼가 되어버렸죠.

이 영상 댓글. 한 30%가 아저씨 찬양이고, 나머지 70%가 제 욕이었어요.

와. 원래 남의 말 크게 신경 안 쓰는데 전 국민이 뜻 모아서 욕을 처해대니까 저도 좀 그렇대요.

결국 휴학하고 집에 틀어박혔는데.

집까지 찾아와서 뭐 던지고 욕하고 어쩌고 하는 인간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쯤 되니까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아니 그렇잖아요.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잖아 솔직히?

나도 이제 간신히 살아나와서 숨돌리고 있었단 말이죠.

근데 어떤 슈퍼히어로 망상에 빠진 아저씨가 나한테 소리 지르질 않나!

또 영상 본 새끼들은 내가 안 돕고 가만히 있었다고 개새끼래.

이게 존나 웃기잖아.

아니 내가 누구 도움받아 나왔으면 그래도 덜 억울한데

난 내가 내 힘으로 살아나왔단 말이야?

근데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들겨 대는 병신 찐따 새끼들이

무슨 대법관이라도 된 거 마냥 지랄 옘병을 떨어서…. 씨발 내가….

후….

암튼 그래요.

난 내가 뭔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거든요?

근데 세상이 다 아저씨 편이더라고. 내 편 하나 없이.

이게 이상하잖아요? 뭐가 있단 말이야.

그걸 알아보려고 이 영상 수십 번 돌려보고.

또 아저씨 인터뷰나 기사 이딴것들 있잖아.

전부 다 찾아봤단 말이야.

일단 아저씨를 제대로 알아야 이 엿 같은 상황이 이해가 될 거 아니야.

아무튼 열심히 찾아보고 생각을 해봤어요.

이 인간이 왜 이렇게 화가 나서 나한테 지랄했을까?

국민 그 씨발 개돼지 새끼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지랄할까?

내가 뭘 그렇게 존나 죽을죄를 지어서….”

석현은 더 참지 못하고 수혁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본론이나 말해.

아까 그 영상은 뭐야! 걔한테 무슨 짓 했어?”

수혁은 조금 짜증이 난 듯 보였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아 하여튼 성격 존나 급하네. 그럼 간단히 말할게요.

그러다 내가 내린 결론!

아저씨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전부 다 연기를 하고 있다.

착한 사람 연기.

그래서 내가 그 같잖은 연기를 깨고 본심을 드러내 보겠다.

이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 아저씨가 구해낸 이 어리고 약한 소녀를 인질 삼아 시험을 해보겠다 이거죠.”

석현은 수혁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천천히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수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본심을 보여주시면 돼요.

왜 그렇게 죽을 똥 싸가면서 사람들을 구한 건지.

왜 그렇게 나한테 화를 냈던 건지.

아저씨 진심을 보여주시면 되죠.”

석현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땐 상황이 위험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고.

내가 도울 수 있었어. 그냥 그뿐이야.

그렇게 하는 게 도리여서 그런 거지.

나 말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난리 통에 애써준 덕에

큰 피해 없이 수습되었어.

그 와중에 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

너도 같이 움직였어야 해.

그게 사람 된 도리였는데 넌 그걸 하지 않았어.

그래서 화가 났던 거야.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이제 더 나쁜 짓 하지 말고 사람답게 행동해.

그 애 풀어줘. 지금 어디 있어?”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말로는 안 되죠.

제가 볼 때는 아저씨,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거든요.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

그런 연기를 하고 있다고 봐요.

아저씨는 인간의 도리 어쩌고 하지만 그건 틀렸어요.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에요.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고 그게 정상이야.

남의 집 자식새끼가 뒤지는 거 보다 우리 집 개 감기 걸린 거에 더 슬퍼하고

남의 눈깔 뽑히는 거 보다 내 눈에 난 다래끼를 더 아파하는 게 사람이라고.

근데 이 이기적인 새끼들이 뭔 구더기마냥 오밀조밀 모여있다 보니까,

서로 착한 척을 하는 거야.

남한테 잘 보여야 서로 잘 붙어 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맘에도 없는 소릴 지껄이는 거지.

남의 집 김장을 했는지 어땠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요? 솔직히 아니잖아.

또 너희 자식새끼 아픈 거? 내 알 바냐고?

실연으로 힘든데 나보고 어쩌라고.

속내는 다 이런데 또 겉으로는 세상 휴머니스트야.

인류애로 가득 찬 사람들인 것처럼 연기를 한단 말이죠.

뉴스에서 무슨 사고가 나면 바로 또 연기 들어가요.

아이고 안타까워라. 마음 아파서 어쩌나 흑흑.

저 나쁜 새끼. 감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너무 화가 나!

이딴 개짓거리나 하고 자빠졌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진짜 착한지.

정말 이 여자애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구하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치켜세워주길 바라고 영웅행세를 한 건지.

진짜 아저씨 본심이 어떤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거지.”

수혁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이 애를 살리고 싶으면, 제가 돌아간 후에 곧바로 사람들에게 고백하세요.

인터넷에 영상을 올리건, 기자들 모아서 기자회견을 하건

전 국민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국민 여러분.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죄목은 납치, 감금, 폭행, 협박.입니다.

제가 살려준 그 여자애한테 목숨 구해 줬으니 노예가 되라고 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탱글한 노예를 가지고 싶단 일념 하나로 불구덩이 뛰어들어서 생 쑈를 했는데

시건방지게 구는 바람에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가둬두고 팼습니다.

막상 패고 보니 이건 뒷수습 안될 거 같아서 도망쳤는데

어차피 잡힐 것 같아서 자수합니다.’

그렇게 딱 말하시면, 온 사방에서 아저씨 물어뜯겠죠?

이후에 뭐 경찰 연행되어서 그럼 그 여자애 어디 있냐?

어쨌냐 하면서 심문당하고.

뉴스에서는 난리 나서 다 욕하고 어쩌고 하겠죠?

그때부터 아저씨는 한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다 묵비권.

당연히 제 얘기를 하면 그 순간 여자애는 죽는 거고.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걸로도 그럴 수 있게 철저히 준비했으니까,

어설프게 수작질 부리지 말란 거야.

아무튼 그렇게 아저씨가 입 다물고, 또 뭐 여자애 추적도 안 되니까 수사는 지지부진 할거고.

여론만 지랄 나서 저 새끼 죽이네 어쩌네.

내가 그럴 줄 알았네.

저저 악마 새끼 가죽을 벗겨버리네!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것들 다 받으면서 딱 3달을 버티면.

내가 여자애 풀어줍니다.

그때 가서 뭐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네 어쩌네 하려면 하시고.

날 신고 하고 싶으시면 그때야 뭐 맘대로 하시는데,

그래봐야 한번 나락 간 이미지 회복은 안 될걸요?

원래 개인은 똑똑해도 단체는 멍청하거든.

음모론 어쩌고 해서 어쨌건 아저씨가 범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생길 거고,

인생 순탄치 않을 거야.

오히려 당신 추앙하던 사람들이 제일 가까이서 물어뜯을걸요?

왜? 그 인간들도 또 연기를 해야 하거든.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마땅하게 쌍욕을 퍼부어주는 정의로운 사람 연기.

그래 봐야 전부 다 스트레스 풀라고 욕해대는 멍청이들이지만,

어디 한번 그거 버텨보라고.

내가 장담하는데 아저씨 1년 안에 목매단다.

세상을 상대로 돌팔매질 당하는 게 어떤지는 내가 존나게. 아주 조~온나게 잘 알거든.”

수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석현은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수혁의 말대로 해야 할까?

도의상은 그게 맞다.

지금 상황에서 그 여자애 안전을 보장할 방법은 순순히 수혁의 말을 듣는 것뿐이다.

우선 당장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지라도.

시간이 지나. 정말 수혁이 약속을 지켜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면.

그때 다시금 나서서 모든 오해를 풀면 된다.

처음엔 욕하던 사람들도 진실만 안다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정말 그러할까?

떠오르는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날 여학생과 사람들을 구한 것.

그것은 정말 순수한 선의였으며 그래야 했다 믿었기에 행한 것이었다.

물론, 이후 사람들의 치켜세움 덕에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도,

자부심을 가졌던 것도 맞다.

이걸 버리고 역적이 될 수 있을까?

뒤늦게 진실이 밝혀진다 한들 사람들이 과연 고스란히 믿어줄까?

역시 확신 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해명해도 그저 나쁜 생각으로 선의 인척 연기를 한 가짜 영웅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터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석현을 보며 수혁이 이어서 말했다.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내일까지 아저씨 자수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전 그 애를 죽일 거예요.

그다음은.... 아니 다음은 없어. 그게 끝이야.

그냥 나는 여기 온 적이 없던 거고. 아저씨도 날 본적이 없는 거야.

나중에 여자애 실종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 아저씨는 이제 연기 들어가야지.

‘아 불쌍해라.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낸 그 아이가 무사해야 될 텐데. 흑흑.

납치범 개새끼!’

아저씨는 여전히 영웅이고. 세상은 바뀐 게 없어.

그냥 그때 불구덩이에서 죽었어야 할 애 하나만 사라질 뿐이야.

알죠? 걔는 그냥 좀 더 산 거야. 그저 죽는 게 좀 연기된 거지. 좋잖아요?

뭐가 더 좋은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거 같은데?”

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대답 안 해도 돼요. 내일쯤 되면 알 테니까. 그럼 갑니다.”




수혁은 영상 재생을 멈추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싸구려 소형카메라였기에 화질은 별로였지만 석현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 그리고 대화 등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잘 찍혔는데 아깝네.”

중얼거린 수혁은 그대로 영상을 삭제해 버리고는 시선을 티브이로 옮겼다.

티브이에서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석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수많은 채널에서 석현의 이야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딱 수혁이 예상한 대로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석현이 저걸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아마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약속은 지켜요. 여자애는 살려줄 거야.

근데 내가 당신은 못 살려주지.

내가 당신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데.

그거 알아요? 나도 연기라면 존나게 잘하거든.”

수혁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설치된 카메라 앞에 섰다.

잠시 눈을 감고 몰입한 수혁은 녹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완벽한 연기를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전…. 그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무서워 움직일 수 없었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가시 돋친 비난이 무서워

밖에 나가지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절 찾아온 것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황석현 아저씨입니다.

아저씨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명성으로 절 보호해 주겠다고.

그러니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전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저를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칼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 말대로 아이를 납치해 왔고 아저씨의 협박과 폭행을 도왔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저의 양심이. 그리고 마음이 도저히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이고 묻어버리란 아저씨 말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납치된 그 아이는 방금 풀어줬으니 금세 발견될 것입니다.

끔찍한 일을 겪은 그 불쌍한 아이와 부모님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이제부터 전 제 목숨으로써 속죄를 하려 합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수혁은 그대로 의자를 밟고 올라가 미리 준비해둔 올가미에 목을 걸었다.

‘잘 있어라. 엿 같은 새끼들아.’

속으로 중얼거린 수혁은 그대로 의자를 걷어찼다.

컥컥거리며 발버둥 치는 수혁의 눈에선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