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네.”

이 한마디만큼 지금 내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

뭘 하든 승승장구할 거란 허세 가득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벌어 먹고살 정도는 되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야심 차게 개업한 가게가 3번이나 망해버리자 더는 무언갈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형네 내외가 조카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까지 깨서 준 덕에

콘크리트 채 인천 앞마다 밑바닥에 가라앉는 꼴만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사실상 절연을 당했기에 돈 한 푼 없이 길거리에 내몰린 처지였다.

그게 매정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당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라 한다 해도 내겐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아직 내 숨이 붙어있는 건

그냥 죽어버리기에도 너무 미안하고 그냥 살기에도 죄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서였다.

이 꼬라지 임에도 일단은 사람인지라

당장 오늘은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고 어디서 자야 할까? 그런 고민으로

공원 화장실에서 하루. 역 앞 흡연장에서 하루하루 버텨가는 인생.

이제 슬슬 날도 추워지고 있을 곳마저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겨울을 어떻게 버틸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이럴 바엔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죽는 게 나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매우 진지하게 하고 있을 때,

“삼촌!”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 조카 수혁이였다.

내가 그나마 두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건 저 어린애 돈을 뺐어 냈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반가움보다는 미안함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삼촌! 한참 찾았잖아요. 잠은 잘 주무셨어요? 식사는요?

날도 추워지는데 감기는 안 걸리셨어요?”

내가 미울 법도 한데 형네 부부 몰래 가끔 나를 찾아와 주는 수혁이.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저랑 밥 먹으러 가요! 저 어제 용돈 받아서 돈 많아요.”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위로를 건네는 수혁이를 보니 부끄러워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배가 고팠기에 차마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하고 수혁의 뒤를 따랐다.




“알잖아요? 우리 집 부자인 거. 대학 등록금 같은 거 금방 다시 모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저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무조건 장학금 받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힘내요.”

조카가 사주는 햄버거를 허겁지겁 먹으며 위로받는 꼴이 우습긴 해도,

적지 않게 위안이 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죽겠다 싶을 때, 혹은 진짜 죽자 싶을 때마다

수혁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는 이렇게 밥도 챙겨주고 용돈도 나눠주었기에

내가 여태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만약 이 아이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진작에 저세상으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미안하다. 삼촌이라고 하나 있는 거 도움은 못 될망정...

형한테도 미안하고 형수님한테도 미안하고. 또 너한테는 특히나 미안하지.”

몇 년 전 해도 꼬맹이였던 조카가 언제 이리 커서 듬직한 말을 건네는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괜찮다니까요. 그냥 며칠 쉬면서 기운이나 모아요.

그리고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이걸로 어디 방이라도 잡으세요. 요새 너무 추워서 밖에서 자면 큰일 나요!”

오만 원 짜리 몇 장에 만 원짜리 몇 장. 오천 원, 천 원짜리도 야무지게 섞여 있는 걸 보니

가진 용돈의 전부인 듯했다.

내가 양심이 있었다면 이걸 받을 수는 없겠지만

추하게도 난 덜덜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그래도 다는 못 받겠다. 너도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해야지.”

“아니에요. 삼촌.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봐야 다 뺏…. 아니, 그냥 쓸데없는데 쓸 거예요.”

난 수혁의 더듬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잠깐, 다시 얘기해봐. 뺏겨? 누가 학교에서 너 괴롭혀?”

“아니요. 그게 아니고….”

“아니긴. 그러지 말고 삼촌한테 얘기해봐. 무슨 일인데?”

우물쭈물 주저하던 수혁이는 괜스레 눈치를 보다가 누가 들을세라 몸을 낮추어 소곤소곤 말했다.

“사실. 엄마 아빠한테는 얘기하기 좀 그래서 못했는데.

학교에서 좀 일이 있어요.”

어쩌면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수혁이를 독촉했다.



“학생회장인 애가 있는데,

얘가 공부도 잘하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엄청나게 좋아해요.

근데 알고 보면 엄청 악랄한 애 거든요?

선생님들 앞에서는 착한 척 연기하고 뒤에서는 일진같이 하고 다녀요.

몰래 애들 괴롭히고 돈 뺐고.

원래 나한테는 별 관심 없었는데,

우리 집에 돈 많단 얘기를 어디서 들었나 봐요.

막 돈 빌려 달라고 했어요.

난 안 주려고 했는데 자꾸 협박하고 겁주고…. 어차피 선생님이 자기 믿으니까 뭐든 해도 된다면서.

말 안 들으면 대학도 못 가게 뭉개버린다고….

그래서 용돈 거의 다 뺏기고 그랬어요….”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착하고 속 깊은 수혁이를 괴롭히다니.

원체 심성이 착한지라 집안에 혹 누가 갈까 싶어 어디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 새끼 이름이 뭐야? 삼촌한테 말해봐.”

“안 돼요. 삼촌! 걔네 아빠가 엄청 높은 사람이래요. 괜히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괜찮으니까 누군지나 말해.”

계속 다그치자 수혁이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요. 말해줄게요. 대신 부모님께도 비밀이고 아무것도 하면 안 돼요.

건드리면 안 되는 애예요. 걔는. 알겠죠?

차진혁. 학생회장 차진혁이에요. 삼촌. 난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서 기어코 가진 돈 전부를 내게 전해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 돈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애 코 묻은 돈으로 연명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초에 수혁이 없었으면 어딘가에서 비루하게 객사할 팔자였다.

평생 형네 부부와 수혁이에게 빚을 갚지 못한 채,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로 추하게 연명을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이미 모든 걸 잃어버린 몸. 형네 가족에게 민폐만 끼친 죽일 놈이다.

이제 와서 눈치 볼게 뭐 있고, 주저할 게 뭐 있을까?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

아니 빚을 떠나서 수혁이가 고통받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수혁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난 내 조카를 잘 안다.

어지간하게 힘들어서는 티도 내질 않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어린 시절 지옥 같은 괴롭힘을 당해본 기억이 있기에 더욱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시엔 정말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하는 고민을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혁이가 나 같은 꼴을 당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 학생회장이라는 놈. 그놈을 혼내고 타이른다?

선생님께 말하고 대안을 찾는다?

아니. 그런 어설픈 것 따윈 어림도 없다.

철저히 짓밟고 괴롭힌 다음 다시는 멀쩡히 두 눈 뜨고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혼쭐을 내줘야 한다.

문득 어린 시절 날 괴롭히던 그 지긋지긋한 놈의 얼굴이 그 학생회장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난 지금 이 모양 이 꼴인데 그놈도 멀쩡히 잘살고 있겠지.

그게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나고 억울했다.

이 역시 그 차진혁이라는 놈을 그냥 놔둘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 지금 내가 무서울 게 있어? 아니 하나도 없어.

내가 죽는 게 무서워? 감옥 가는 건? 아니지.

내가 주저할 이유가 있나?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근데 그놈은? 그 개새끼는 찢어 죽일 놈이잖아?

내가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할 일. 이미 한없이 망가지고 볼품없어진 내 인생 전부 내던져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 삼촌 진짜….”

수혁이 차진혁의 사망 소식을 들은 건 그날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원한이 가득했는지 범인은 진혁을 납치해 모진 고문을 하고는 결국 고통스럽게 목숨을 빼앗았다.

경찰은 아직 범인을 특정하지 못하였으나 수혁만은 누가 범인인지 확신했다.

“삼촌은 진짜…. 정말…. 너무 쉬워서 문제야. 그러니까 그렇게 사기도 당하고 사업도 말아먹고 하지.”

수혁은 개운하다는 듯 몸을 흔들어 보이고는 죽은 차진혁에게 말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지? 부모 백 믿고 나한테 깝치면 진짜 죽여버린다고.

어디서 선생 마냥 훈계질이야 훈계질이 뒤질라고.”

선생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수혁에게

분위기 흐리지 마라. 애들 괴롭히지 마라. 라며 끊임없이 거슬리게 하던 학생회장.

수혁은 마음만 같아선 애들 시켜서 조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놈도 부모 백이 제법인지라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결국 버리는 카드를 이용해 눈엣가시 같은 놈을 치워버렸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나저나. 아이고 우리 삼촌. 잘해 줬어. 고작 몇만 원에 사람까지 죽여주고.

뭐 됐어. 멍청한 삼촌한테는 차라리 감옥이 더 편할 수도 있으니까.

면회는 안 갑니다. 나도 이제 당신 모르니까.”

한껏 기지개를 켠 수혁은 내일 학교 분위기를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