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눈이 소복히 쌓여 얇고 낡은 운동화는 축축이 젖어 들었고,

해진 점퍼와 얇은 바지는 이 칼날 같은 바람을 막아주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이 왜 이곳을 헤매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략 상상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사고로 죽은 남편과 3살 난 딸아이를 따라가고 싶어

죽고 싶다는 욕망과 술에 찌들어 살던 날들.

아마 이번에도 빈속에 술을 들이켜고는 잔뜩 취해서

죽겠다며 혼자 산을 오른 것이겠지.

하지만 술이 깨고 기억이 돌아오니,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몸을 여미고는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슬슬 해마저 떨어지고 있어 길을 찾지 못한다면 정말 이곳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였지만,

정작 죽음이란 녀석이 마중을 나오자 살려달라 애원하는 꼴이었다.

그런 절실함이 닿았는지 여자는 곧 눈바닥에 찍힌 사람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을 따라가면 사람 사는 곳이 나올 것이고,

그럼 몸을 녹이고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여자는 감각이 사라져 가는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이!”

한동안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때,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서 있었다.

대략 60대쯤 되었을까?

슬슬 주름이 쌓여가는 노쇠한 얼굴과 달리 몸만은 건장했다.

“이 추운데 그 꼴로 어딜 돌아다녀? 얼어 죽고 싶어?”

다짜고짜 일갈을 내뱉는 사내의 외침에

여자는 무서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기.. 길을 잃었어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요.”

하지만 터벅터벅 다가온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눈도 오고 해도 떨어지는데 산을 어떻게 내려가! 따라와!”

사내는 겉에 두르고 있던 우의를 벗어 여자에게 던져 주고는 눈길을 헤치고 앞장섰다.

여자는 거친 인상의 사내가 무서웠지만, 우의라도 걸치니 찬바람이나마 막아주었기에 일단 따라가기로 했다.

사내는 금세 여자를 산 한켠에 지어진 작은 판잣집으로 안내했다.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은 얼핏 보기엔 어수룩해 보여도 제법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바로 앞에 밭이나 가마솥 따위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산에 사는 사람 같았다.

“뭐해 들어오지 않고.”

잘해야 두 평쯤 될법한 방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보며 여자는 망설였다.

저기서 저 낯선 사내와 같이 있는다는, 어쩌면 같이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왜? 들어오기 싫어? 그럼 거기서 얼어 죽을래?”

사내의 짜증 섞인 호통을 듣고서야 움찔거리며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온갖 가재도구들이 잔뜩 늘어선 방.

낡은 라디오 하나. 되는대로 뭉쳐놓은 옷가지. 한켠엔 이불들과 손바닥만 한 전기난로.

열악했지만 적어도 산길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사내가 들어와 옷가지를 던져 주자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젖은 옷 벗어 놓고 이걸로 갈아입어. 방안에 물 다 떨어져!”

그러고는 지켜보려는 것 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여..여기서요?”

“그럼! 눈맞으면서 갈아입을래?”

여자는 수치심 이상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러려고 자신을 데려온 것일까 불안해하면서도 지금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친절하지만 무뚝뚝하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음 좋겠지만,

만약 오갈 곳 없는 젊은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 하는 나쁜 사람이라면?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계속된 사내의 성화에 몸을 돌리고는 쭈뼛거리며 젖은 옷을 벗었다.

아직 물기가 남은 여자의 어깨를 본 사내는 빨랫줄에 걸려있는 수건 하나를 꺼내어 던지듯 건네었다.

“닦아. 그냥 입으면 젖어서 감기 걸려.”

여자는 몸이 보이는 게 부끄러워 최대한 웅크리고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시장에서나 볼법한 아줌마 옷이었지만, 깨끗했기에 그런대로 입을 만했다.

혹시 사별한 아내가 입었던 옷일까?

슬쩍 사내를 돌아보자 그는 말없이 난로를 켜서 여자 쪽으로 내밀 뿐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여자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사내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사내는 가만히 앉아 벽에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

사내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 잠시 부산을 떨던 사내는

7시가 되자마자 작은 개다리소반에 상을 차려왔다.

현미 섞인 밥에 배춧국. 겉절이와 묵은김치.

된장 한 종지에 마른 고추 몇 개.

실금이 간 사발 그릇에 보리차까지 떠다 놓은 사내는 수저를 들며 말했다.

“밥 먹자.”

별것 없는 밥상이었지만 안 그래도 허기가 졌던 여자는 그야말로 허겁지겁 밥을 퍼먹었다.

사내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상을 물리니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사내는 여자에 대해 묻지 않았고,

여자는 사내가 무서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 좋은 사람인지 이상한 사람인지 판단하지 못한 여자가 고민하고 있을 때,

사내는 낡은 라디오를 켜서는 뉴스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강추위가 계속되며, 주말까지 폭설이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슬슬 걱정되었다.

어떻게든 오늘 밤만 넘기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눈이 계속 내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용기 내어 사내에게 말했다.

“저... 마을은 언제 내려갈 수 있나요?”

사내는 가만히 시계를 보다가 대답했다.

“마을엔 왜?”

역시나 거칠고 퉁명스러운 말에 여자는 움찔하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저 집에 가야 해서...”

사내는 시계에서 눈을 떼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움찔하며 눈을 피한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사내는

마치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듯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이제 여기가 네 집이다.”

여자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애초부터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죽은 아내를 대신해 자신을 색시 삼기 위해 데려와서는 여기 감금시키려는 것일까?

무서운 생각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내는 겁에 질려 흐느끼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울지마! 슬픈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 지금은 너 혼자고 여기가 네 집이야.

그냥 그거뿐이니까 울 거 없어!”

무서운 호통에 여자는 움찔거리며 입을 틀어막았지만, 눈물이 흘러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사내가 다시 시계로 눈을 돌리자 침묵에 섞인 흐느낌과 함께 산속 판잣집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자 사내는 비로소 움직였다.

“자자. 이불 깔아.”

마침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자 여자는 무릎 꿇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내에게 매달렸다.

“죄송해요... 제발 집에 돌려보내 주세요. 가족들이 저 기다려요. 네? 제발요...”

사내는 그런 여자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는지 복잡한 얼굴을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소리쳤다.

“내 말 못 들었어! 여기가 네 집이고 이제 넌 혼자라고! 가족이니 뭐니 그딴 건 이제 없어! 알아?”

여자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맨발로 소복이 쌓인 눈에 발자국 세 개를 찍기도 전에 사내의 억센 손에 이끌려 다시 방으로 끌려들어 왔다.

살려달라 소리를 질러 보아도 이 산속에서는 들어줄 리 만무했기에

애꿎은 메아리가 되어 눈과 함께 흩어질 뿐이었다.





사내는 여자의 발목에 끈을 달아 자신의 발에 묶었다.

혹여나 자신이 잠이 들더라도 여자가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 함이 분명했다.

사내는 훌쩍이며 방 한구석에 쭈그려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리 와. 잘 시간이니까.”

하지만 여자는 그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후... 종일 산길 헤매고 떨어대느라 몸 상했으니까 얼른 이리 들어와.

거긴 냉골이라 안 돼. 여기 따뜻하니까 내 옆에 누워.”

사내가 끈을 잡아당겼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하...”

고민하던 남자는 이불을 덮고 돌아누웠다.

몸이 차지면 알아서 들어오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나 밤이 깊어지자 여자는 몸에 도는 냉기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들어와. 거기서 그러고 있는다고 뭐가 되는 거 아니니까.”

자고 있지 않았는지 사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여자는 서럽게 울며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사내가 자신의 몸의 손을 댈 것 같아 잔뜩 긴장했지만,

따뜻한 이불속은 피로에 전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새 감겨오는 눈에 여자는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정신없이 자던 여자는 문득 잠에서 깨었다.

누군가 여자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 사내의 손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며 잠이 저 멀리 달아났다.

“아악!!!”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서는 손에 집히는 대로 사내에게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급히 여자의 손을 잡아채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되는대로 집어 던진 물건 중에는 반짇고리함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과 바늘 따위가 널브러진 바닥에는 커다란 가위도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여자는 재빨리 가위를 집어 들고는 사내에게 겨눴다.

“제발 그만 좀 해! 왜 자꾸 고집을 부려! 다 잊어버리라고 다 괜찮아 질 거라고 했잖아!

여기서 나랑 둘이 살면 돼. 집이니 가족이니 그런 거 다 잊어버리라고 하잖아!

이제 여기가 집이고 내가 가족이라고!”

사내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자는 단호했다.

“싫어! 나 집에 갈 거야! 죽는 한이 있어도 집으로 갈 거야!”

가위로 끈을 자르려는 여자에게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거 내려놔!”

“꺅!!”

하지만 여자가 겁에 질려 내민 가위가 사내의 옆구리에 푹 틀어박히고 말았다.

“커흑...”

사내가 몸에 꽂힌 가위를 틀어잡고 숨을 헐떡이는 동안,

여자는 다급히 발에 묶인 끈을 풀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발도 없이 맨발에 얇고 헐렁한 옷뿐이었지만,

이곳에서 사내의 노리개로 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게 여자는 눈길에 맨발자국을 남기며 새벽 동이 트는 산길을 뛰어 내려갔다.







“어떻게 됐대?”

옷가게 김씨가 돌아오자 방앗간 최씨가 물었다.

“하이고. 참.... 하늘도 무심하지....”

“아니 똑똑히 말을 해. 뭐가 어찌 되었길래.”

길게 탄식을 내뱉으며 뜸을 들이는 김씨가 말했다.

“둘 다 돌아갔다 하네. 장씨는 배가 찔려서 가고.

딸내미는 눈밭에서 얼어 죽고.”

“허허...”

최씨 역시 길게 탄식을 뱉어내었다.

김씨는 말을 이었다.

“하이고... 나이도 적지 않은 양반이 말 만한 딸내미 데리고 예까지 내려와서는

그 판잣집에 웅크리고 살겠다기에 참 기구하다 싶었는데.

서방에 자식새끼 잃고 머릿속이 성치 않은 딸이 그만 또 발작을 한 모양이야.

그 무뚝뚝한 양반이 딸내미 먹을 반찬 하나, 입을 옷가지 하나 고를 때도 얼마나 신중했나?

그래봐야 이따위 시장 옷가게. 다 할매옷 뿐이었네만, 그 딸내미는 그리도 좋아했다네?

정신만 멀쩡하면 그리 맘씨 고운 딸인데...”

최씨 역시 한숨을 쉬며 거들었다.

“기구해. 기구하다마다. 하여튼 그놈의 차가 문제야.

서방이나 시키지 뭣 하려고 운전대 잡아서는 하루아침에 서방 떠나보내고 갓난이 떠나보내고.

그놈의 보상금인지 뭔지로 서방 재산에 애비 재산까지 싹 털어냈잖어?

응? 진짜 싹 다 날리고. 손바닥만 한 시골 땅 하나만 간신히 남았지 않나?

그뿐이야? 골을 다쳐 가지고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울며불며 죽겠다 하고.

꼭 치매걸린 노인네 마냥 애비도 못알아보고.

내새끼 어딨냐? 서방 어딨냐? 하면서 시장 뛰어 다니는거 온 동네 사람이 다 아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뛰어나간 딸내미 찾느라 장씨가 얼마나 노고가 많았어?

그렇게 불효를 저지르더니만 결국엔 애비까지 보내고 그리 가네.”

거칠게 말하는 최씨를 김씨가 말렸다.

“어허! 이 사람이. 어째 말을 그렇게 해?”

김씨는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나도 속상하니까 그러지.

장씨 그 양반, 의사가 딸한테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했다고

백날 시계만 들여다보면서 딸내미 챙기는 거 최씨도 봤을 거 아냐.

하여간 생긴 건 소도둑같이 생긴 양반이 서툴러서 그렇지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어.”

둘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장씨 부녀를 생각했다.

“아무튼 장례는 꼭 가자고. 친인척 하나 없을 건데 우리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김씨의 말에 최씨는 고개를 끄덕이곤 중얼거렸다.

“허.. 거참.. 어찌 이리 기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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