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간신히 30대에 들어서는 내게 죽음이란 것은 그저 막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막상 시한부가 내려지고 나니, 감정적으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슬프냐 하면 그건 아니었고, 두렵냐 하면 조금 겁나는 것 정도였다.

아무래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란 것에 마주 서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시간...”

문득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필요한 게 시간이라니.

그래도 아직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심적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정신이 온전한 지금, 차분하게 죽음에 대비해야 한다.

대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유서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창함 따윈 없이 조용하고 소소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조금은 우울해진 기분으로 휴대폰을 들어 친구목록을 살펴보았다.

“연락 안 되는 친구. 기억도 잘 안 나는 모임 사람. 옛날 직장 동료.

어릴 때 친했는데 지금은 손절한 애. 얼굴만 아는 대학 동창....”

잡다한 사람을 빼고 나니 편하게 전화할 사람이 손에 꼽는다.

예전엔 넘쳐나던 친구들과 지인들이었는데,

고개만 돌리면 언제든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며 조금씩 뜸해지더니 결국 이런 꼴이었다.

연락처 목록을 천천히 살피며 그들과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씁쓸함 뿐이었다.

우울감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심사숙고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나다. 그래. 오랜만이지? 그냥 안부차 전화했지 뭐.

그래. 내 결혼식 때 잠깐 보고 못 봤잖냐.

요새 잘 지내지? 아 나야 뭐 그렇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어? 아니라니까. 뭐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냐?

그래. 다음에 밥 한번 먹자.

알았어. 이번엔 내가 사야지. 너한테 얻어먹은 게 얼만데.

어. 들어가.”

시답잖은 통화였지만, 감정적으로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이후로 몇몇 사람들에게 더 전화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대부분 받지 않거나 바쁘다며 금세 끊어 버렸다.

“씁. 이왕이면 잘 살지 그랬냐. 이거 장례식 때 몇이나 오겠어?”

괜히 마음 어지러워지기 전에 그만두기로 하고 주저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엄마. 아들. 웬일은 무슨 아들이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뭐 이상한가?

날 추운데 따뜻하게 다니시는 거지? 예. 요새 감기 독해요.

아부지는? 옆에 계셔? 바꿔줘요. 아들이 안부 인사 좀 드린다고.

싫으시대? 괜히 머쓱하니까 그러시네, 또. 그래요. 조만간 들를게.

예. 몸조심하고 계셔.”

괜히 통화가 길어졌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부모님과 즐거웠던 시간 역시 떠올리려 했지만,

우습게도 생각나는 것은 속 썩이고 말 안 듣던 못난 과거의 내 모습들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역시 못난 아들인지라 죽기 직전에 와서야 후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철없던 예전의 나를 욕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가장 힘든 일이 남아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아내.

못난 나를 만나 한창 이쁠 나이에 고생하며 내 옆을 지켜준 내 아내.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억지로 한 결혼인데

그런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버리다니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길바닥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수는 없었다.

나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딱히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어떻게 위로할지 떠오르길 바라면서.





“당신 왔어? 병원 간 건 어떻게 되었어?”
아내가 설거지하다 말고 날 돌아보며 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늘어난 티셔츠와 헤진 츄리닝.

직장 생활하며 집안일 대부분을 도맡아 하는 아내는

오늘따라 더욱 피곤에 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저릿한 감정이 가슴 한켠을 찌르고 지나갔지만,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몸살 같은 거래. 일단 지켜보면 나아질 거야.”

아내에게 한 거짓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내가 아닌 아내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약 챙겨 먹어. 요새 감기 독하다던데.”

걱정어린 그 말에 뭐라고 따뜻하게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목이 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웅얼거린 뒤에야 간신히 시답잖은 말을 뱉어내었다.

“당신 너무 예쁘네.”

아내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뭐야? 갑자기? 왜 평소같이 않게 징그럽게 그래?”

말은 그리했지만 피곤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내가 당신 미모에 확 반했잖아.

기억나지? 우리 연애할 때 내가 당신 얼마나 예뻐했는지.”

아내 역시 그때가 떠오른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단했지. 진짜 바보천치였어. 옆에 딱 붙어서 눈을 떼질 않았으니까.

어우. 지금은 생각만 해도 오글거리는데 그땐 어떻게 참았나 몰라?

그때 당신은 진짜 나한테 목숨을 걸었었어.”

아내의 말대로였다.

프러포즈를 하는 날. 난 진심을 담아 아내에게 말했었다.

‘난 정말 널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열 번이고 백번이고.’

어쩌면 그날이 우리 부부의 최고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 각오를 생각하니 슬픔과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들어가서 씻고 낮잠이라도 푹 자. 그래야 빨리 낫지.”

자상한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동하며 각오를 다졌다.

특별한 무언가를 해주기보단 예전 그때 그 마음으로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자.

그게 나와 아내 둘 다 행복해지는 길일 테니까.






열흘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부모님도 뵙고 오고,

아내와도 평범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이대로 평생 평화롭게 살고 싶었지만 그래도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나 병원 좀 다녀올게.”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걱정스레 대답했다.

“왜? 또 감기 기운 있어?”

“그렇게 심한 건 아니고. 주사나 맞고 오려고.”

“같이 갈까?”

“아니야.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푹 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난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그리곤 천천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나섰다.

최대한 느릿한 걸음을 옮겼지만, 너무도 순식간에 도착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기로 하고

한칸 한칸 오를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순간, 또 후회되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슬프게도 20대의 반도 보내지 못하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한숨을 내쉬며 굳게 의지를 다지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쪽에는 이제 가족보다 더 익숙한 얼굴의 험상궂은 사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일 지났네.

오늘까지 돈 못 갚으면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내가 분명 똑똑히 말한 걸로 아는데 어째 보아하니 빈손이네?”

예전이었다면 벌벌 떨었겠지만, 지금의 난 완전히 각오가 선 상태였다.

“죄송하단 말은 못 하겠네요. 애초에 제가 빌린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이자도 아니니까.

그런 큰돈은 갚을 여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사채업자는 웃으면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우리 고객님 눈빛이 아주 강렬하네. 생닭이라도 씹어먹을 패기가 느껴져.

친구 보증 잘못 서서 끌려온 그 멍청하고 순진한 양반이 그새 기가 엄청 세졌네.

근데 아저씨. 이 바닥은 말이야.

그렇게 개같이 구르면서 남의 시체에서 피 뽑아먹고 살아남은 인간들이 넘치는 곳이야.

대충 눈에 힘주고 패기 부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근데 그렇게 배 째라고 나오면? 진짜 배때지 갈라서 통나무로 만들어버리는 게 이 바닥인 거야.”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 다짐했지만, 사채업자가 꺼내든 사시미칼을 보니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마... 마음대로 하세요. 눈을 뽑아버리든 심장을 꺼내 가든. 이미 각오 했습니다.”

당당해 보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허어... 이양반 보게... 뒤지고 싶다는데 죽여줘야지.

눈 꼭 감고 계쇼. 절대 뜨지 말고. 바로 모가지 따버릴라니까.”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와 동시에 목에 차가운 칼의 느낌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뜨지 말라니까!”

소리치듯 외친 사채업자는 목에 닿아있는 칼을 확 하고 그어버렸다.

“으아아악!!”

그대로 주저앉으며 목을 감싸 쥐었지만, 무슨 일인지 피도,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채업자는 비웃음 서린 얼굴로 뒤집어 잡은 칼을 들어 보였다.

“칼등이야. 칼등. 쫄기는 병신새끼가.

어이. 내가 너 같은 찌질이 한두 번 본줄 알아?

어디서 어쭙잖게 센 척이야 센 척은.

뭣보다 보잘 것 없는 니 몸뚱이 팔아봐야 우리만 손해야.

알아? 네 병신같은 몸뚱이는 가치가 없다고.

몸으로 갚고 싶으면 당신 말고 당신 와이프 데려와야지.

젊은 여자는 그만큼 쓸모가 많으니까. 알겠어?”

“이 개새끼가!”

사채업자가 아내를 언급하자 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딜 어떻게 얻어맞았는지도 모른 채 바닥을 뒹구는 처지였다.

“자, 우리도 기다려줄 만큼 기다려줬으니까. 선택해. 돈 갚든가 아내 데려오든가.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든 갚을 테니 네 가족한테는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며?

그래서 우리가 지금껏 인도적으로 너희 부모한테 전화 협박도 안 했고,

너희 집 쫓아가서 뒤집어 놓지도 않았잖아 맞지?

그러니까 너도 네가 한 말 책임져.”

싸늘한 사채업자의 말에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냥 날 죽여! 고문하든 팔아먹든 좋으니까 나만 죽이고 끝내!”

“아이씨 말귀 존나게 못 알아듣네. 네 목숨은 너한테나 소중하지, 우리한텐 가치가 없다고.

그러니까 내놓을 거면, 가치 있는 네 와이프 몸뚱이나 내놓으라고.

네가 못 내놓겠으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거고.”

사채업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 여보세요. 김성준씨 아내분 되시죠? 아 다른 게 아니라 김성준씨한테 좀 문제가 생겨서.

아니 뭐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이쪽으로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네. 제가 주소 불러드릴게요.”

소리쳐 말려보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정장 차림 사내들에 의해 입이 막혀 버린 뒤였다.

전화를 끊은 사채업자는 웃으며 얘기했다.

“금방 오겠대. 아주 그냥 열녀야 열녀. 너 같이 찌질한 놈이 어떻게 이렇게 참하고 좋은 여자를 꼬셨나 몰라.

그래도 기뻐해. 네 와이프만 넘겨주면 넌 산다니까?

죽으려고 작정했다지만 솔직히 무서웠잖아 그치?

그러니까 네 아내가 너 살리고 죽었다 생각하고 그냥 새로 얻은 목숨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

그렇게만 하면 우리 다시 볼 일 없어.

경찰에 신고하면... 뭐 너뿐 아니라 네 가족, 지인까지

모조리 찾아서 죽여버릴 테니까 피차 피곤한 짓거리 하지 말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포와 괴로움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이미지들 사이로 다시금 프러포즈의 그 날이 떠올랐다.

‘난 정말 널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열 번이고 백번이고.’

내 말에 그녀는 눈물 어린 얼굴로 화답했었다.

그때 아내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며 날 괴롭히고 있었다.

‘나도 당신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