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아앗 무서워....."

어렸을 때였다. 그때 우린 외할머니 집에 살고 있었다. 외할머니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앞집과 함께 쓰는 외부 공동 화장실 뿐...
우리 이모 중에 가장 어렸던 막내 이모도 같이 살았었다.
그 이모는 비가 오는 날 밤이면 우리들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까지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게 빨간 휴지 파란 휴지다.
그땐 많은 가정이 재래식.. 일명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그래서 밤이 으슥한 날 홀로 화장실을 가면 으스스 부는 바람에도 흠칫 놀라고는 했었다.
정말 뭔가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공포감에, 엄마 아빠 대신 할머니를 깨워 화장실 보초를 서게 하기도 했었다.

"할머니 밖에 있지? 가면 안돼~~"

아무튼 이 빨간 휴지 파란 휴지의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랬던 것 같다.
한참 볼 일을 보는데 똥간 아래에서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는 것.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그리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쑥 손이 튀어나와 아래로 잡아 당긴다나 뭐라나...

그때 우리집 앞에 살던 나와 동갑내기였던 친구가 이렇게 물었었다.

"빨간 휴지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때 이모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그럼 빨간 휴지를 주겠지."
"그럼 안 잡아가요?"
"그건 몰라."
"에이 뭐야. 그럼 왜 물어봐요? 어차피 다 잡아갈거면."
"그건 니가 직접 물어봐라"

내 친구는 좀 겁이 없는 녀석이기는 했는데, 이모의 이야기에도 전혀 겁 먹지 않았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한 번 물어볼거야 진짜..."
"야. 그러지마. 귀신이 진짜 잡아가면 어쩌려고."
"너도 한 번 선택해봐. 잡아가나 안 잡아가나..."
"그럼 넌 뭐라고 대답할건데?"
"난... 빨간 휴지!"

친구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몇개 월 뒤 우린 먼 동네로 이사를 갔고 그 친구와도 헤어져, 연락이 끊겼다.

그 후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화장실 귀신 이야기에 겁먹었던 꼬꼬마인 나도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년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었던 막내 이모도 환갑을 넘긴 할머니가 되었다.
그 이모의 환갑 잔치때 옛날 그 화장실 귀신 이야기가 나왔고 우린 모처럼만에 추억에 잠겨 크게 웃었다.
그때 문득 그 집 맞은편에 살던 그 겁없던 친구가 생각났다. 이사 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궁금해졌다.
며칠 뒤 늦은 시각 퇴근 길에 난 옛날의 우리집을 찾아가봤다.

놀랍게도 동네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옛날식 단독 주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높은 빌라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우리집만은 그대로였다. 옛날 모습을 똑같이 간직한채...
오직 그 집만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와... 뭐야. 옛날 그대로네.）

난 그 집 앞으로 갔고, 그때 문이 삐걱 하며 저절로 열렸다.
그 후,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그 푸세식 화장실 앞으로 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난 화장실 문을 열고 그 냄새나는 곳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

정말 그랬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난 너무 놀라 온 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갑자기 화장실 아래에서 불쑥 손 하나가 튀어 올라왓다.
그 손은 내 발목을 꽉 움켜쥐었고 강하게 아래로 잡아 당겼다.

"아앗!"

난 비명소리를 내 질렀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똥통 속에 빠진 뒤였고, 난 살고자 미친듯이 허우적거렸다.
그때 다시 한 번 기겁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말했지? 선택을 해보라고...."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
분명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였지만 그때는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 난 겨우 똥통을 기어 올라왔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도망치듯 그 집을 뛰쳐나왔고, 119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후 난 정신을 잃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난 내가 겪은 간밤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똥통에 빠졌다구요?"
"네..."
"선생님은 하수구에 빠지셨는데요?"
"하수구요? 아닙니다. 분명 그 집 재래식 화장실 똥통에서 누가 절 잡아 당겼다니까요."
"그 빌라에 재래식 화장실은 없습니다."
"빌라가 아니라 옛날 제가 살던 단독주택 화장실요.."
"거긴 빌라촌이라 단독 주택은 한 채도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가봤다. 그리고 난 경악하고 말았다.
정말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간밤의 그곳은 우뚝우뚝 솟은 빌라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간밤에 봤던 내가 살았던 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대체 내가 본 그건 뭐였을까? 내가 헛것을 봤나?
난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술을 마시기는 했는데...

그 후 두 번 다시 그곳을 가지 않았다.
몇개월 뒤, 막내 이모가 우리집으로 놀러왔다.
이모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술 먹고 하수구에 빠졌다며? 옛날 우리 동네까지 찾아가서는...?"
"이모 그게 아니라... 진짜 이상했다니까."

난 이모에게 그날 내가 겪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었다.
이모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야,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해.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아 취한게 아니었다고....거기 진짜 이상해."

이모는 그냥 웃기만 하며 여전히 믿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맞어. 옛날에 거기서 진혁이 개도 없어졌잖아."
"진혁이? 그게 누군데?"
"너 기억 안나? 너랑 맨날 붙어서 같이 놀던 네 친구."

이모의 말에 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집 맞은편에 살던 녀석. 빨간휴지 파란휴지 귀신에게 겁없이 대답해 줄거라던
그 꼬마 최진혁!
그런데 이모의 다음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가 이가간 후 몇개월 뒤, 최진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

"그래서... 나중에라도 찾았데?"
"몰라. 우리도 얼마 있다가 이사갔잖아. 근데 얼핏 듣기로는 끝내 못 찾았다더라."

그날 밤 난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제서야 난 겨우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날 내가 빠진 그 똥통에서 내게 말을 걸었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바로 내가 잊고 있었던 그 옛날 내 친구 진혁이었다.

며칠 뒤 난 다시 그 동네로 갔고, 오래된 복덕방에 들러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맞아 옛날에 저기 저 빌라 자리에 그 집 애가 하룻밤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어. 그때 말 많았지. 애 부모가 죽이고 숨긴거다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정말 못 찾았나요?"
"찾긴 찾았지. 똥통에서...."
"네?"
"화장실 거기 빠져서 죽어 있었어. 아 맞다. 그 집 큰 애가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어. 궁금하면 가서 물어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 후 난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진혁이 큰 형을 통해 진혁이가 잠든 납골당을 찾아갔다.
납골당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어린 진혁이를 보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한참 뒤 돌아서 나오는 내게 진혁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

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빨간 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