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화장실 불을 켜고 샤워하러 들어가는데 무언가 거뭇한 것이 바닥을 휙 하고 지나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았지만, 딱히 보이는 건 없어 잠결에 잘못 보았겠거니 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와 몸을 수건으로 닦은 뒤, 닫힌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문과 문틀 사이에 숨어있던 그 것이 호다닥 신발장으로 뛰쳐 나갔다.
소지 만한 사이즈의 그리마（돈벌레） 였다.
7층짜리 오피스텔 꼭대기 층에 살던 터라, 여기서 살았던 2년 동안 집에서 발견한 벌레는 날파리와 모기, 파리 정도가 전부였다.
딱히 집에서 음식을 해먹지도 않거니와 배달음식도 냄새문제 때문에 그날그날 바로 치워 버리는 터라 바퀴같은 벌레가 잘 꼬이지도 않았다.
반년 전 쯤, 옆집에서 에어컨 공사한다고 벽을 뚫고 드릴질을 할때, 바퀴 한마리가 화장실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그날 바로 잡아 변기통에 내려버렸고,
그날 뒤로 파리 이상 크기의 벌레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리마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신발장에서 도도도 기어가던 그것을 향해 알몸 바람으로 냅다 손에 잡히는 신발아무거나 쥐고 휘둘렀지만, 생각 이상의 속도로 기어가던 그것은 현관문과 문 틀 사이로 샤샤샥 들어가 버렸다.
차마 팬티 한장 걸치지 않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가 이웃집 주민에게 내 소중이를 인사시키는 불상사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얼른 위 아래 옷을 대충 줏어입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애써 현관문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갔겠거니, 자기 최면을 걸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저께에서 어제로 넘어가는 새벽.
위의 그 날로부터 10일이 지난 날.
새벽 3시 정도 되었을까? 갑작스러운 요의에 잠에서 깨 소변을 보기위해 화장실에서 변기 커버를 열었는데,
검은 무언가가 재빠르게 변기 오른쪽 아래로 기어가 숨는 것이 아닌가.
비명이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깜짝 놀란 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나버렸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얼른 화장실 문 부터 닫았다.
그리고 그 것을 잡기 위해 샤워기 호스를 잡고 물을 가장 강하게 틀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차마 무서워서 그것이 숨은 방향으로 다가가질 못하고 멀리서 애꿎은 물만 졸졸 뿌릴 뿐이었다.
그러다 어디서 락스가 살충에 효과가 뛰어나다는 글을 예전에 본 기억이 나서,
화장실 청소용으로 비치해두었던 뿌리는 락스를 변기 주변에 마구잡이로 뿌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도 락스에서 배출되는 염소 가스 냄새에 분명히 틈새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의 등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왼손엔 락스 스프레이를, 오른손엔 샤워기에서 물줄기를 쏟아대며 변기 주변을 미친듯이 물과 락스로 훝어댔지만, 그것은 끝끝내 나오질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한 15~20분? 그러다가 결국 포기하고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마음 속 한편으로는, 밀폐된 화장실에 락스에서 배출되는 염소 가스로 가득차면 그 것이 질식한 채로 배를 뒤집고 바닥에 쓰러져있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한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과 보이지않는 사투를 벌이느라, 주 목적인 소변을 보고 나오질 못한 것이다.
심장은 미친듯이 쿵쾅대고 애써 진정시키려 선잠을 들었지만, 더욱 강하게 빗발치는 요의에 한 5시 쯤? 다시 눈을 뜬 것 같다.
소변을 오래참으면 요로결석이 온다고 했던가.
실제로 난 8년 전 쯤에 요로결석을 한번 심하게 걸린적이 있었고, 그 뒤로도 2년, 3년 텀으로 두세번 재발했던 경력이 있기에
병적으로 소변을 참질 못한다. 약간의 요의만 와도 바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아야 하는 성격이 된 것이다.
그런 내가 차마 화장실에 나타난 이름모를 벌레 한마리 때문에 기껏 몇년간 잠잠하던 요로결석이 재발해서 응급실에 실려간다?
이는 쪽팔려서 셀프거세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지 않은가.
결국 난 큰 맘을 먹고 다시 화장실로 2차 정벌을 나섰다.
문을 열자 매케한 락스 냄새가 내 코를 감쌌다.
그러나 그 정도 염소향으로는 벌레와의 결전을 벌이러 온 나의 결의를 이길 수 없었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바닥이 뚫린 화장실 슬리퍼가 아닌 현관에 있던 크록스 신발을 신고 난 다시 한번 샤워기 호스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그것은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화장실 문은 완벽하게 건폐되어있었고, 그것이 화장실을 빠져나갈 공간은 배수구 말고는 없었다.
1차 대치때는 용기가 없어 다가가지 못했지만, 요로결석의 공포와 인간 존엄성에 상처 회복을 위한 결연의 의지로 난 샤워기 호스를 들고 그것이 숨었던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순간, 드디어 그것이 변기 밖으로 빠르게 기어 나왔다.
그것은, 역시나 그리마였다.
10일전 처음 볼땐 분명히 소지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그 때, 마주한 그것의 크기는 내 중지 크기 이상이었다.
생각보다 큰 크기에 조금 당황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난 그것을 화장실 배수구 방향으로 유도하면서 샤워기의 물을 힘차게 뿌려댔다.
그것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다.
학계에 보고된 사항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물에젖어 매끈하다못해 미끈한 대리석 바닥을 그것은 자신의 다리로 애써 버티며 오히려 물이 분사되는 방향으로 역주행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쓰는 지성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을 뿌리는 손은 오른손 한손이면 충분했다.
내 왼손에는 예의 락스 스프레이가 진작에 쥐어져있었고, 난 그것을 향해 물과 함께 락스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지만, 프로게이머 이성은（현 흑운장）의 닉네임이 firebathero 인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저그전에서 파이어뱃을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디파일러를 상대로 양손에서 화염방사를 뿜어대는 파이어뱃 마냥, 난 한손에는 물을 반대손으론 락스를디파일러의 현신이라고도 보여지는 성인남성 중지 크기의 그리마를 향해 마구 분사했다.
그것은 락스가 닿자 아주 고통스러운듯이 몸을 비틀며 조금씩 배수구를 향해 쓸려갔다.
결국 의식을 잃은 듯한 그것은 배수구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크기가 컸던 그것은 배수구 채수구멍 아래로 들어가질 못했다.
공학적 용어를 조금 사용하자면, 그것의 diameter가 채수구멍의 pore size보다 더 커서 filtering이 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순간 짓이겨서 억지로 넣어볼까는 생각도 했지만, 그 예전 공포게시판의 환상괴담님의 글이었나? 여튼 그 글처럼, 벌레가 죽기전에 싸지른 알에서 수백마리의 새끼벌레가 배수구에서 부화하여 어미의 복수를 하는 상상을 해버렸다.
락스스프레이는 다시 원래있던 자리에 내려두고, 혹시라도 정신차리고 덤벼들까봐, 오른손은 계속 물을 쏘아대면서 왼손으로 변기청소용 솔을 집어 의식을 잃은 그것의 사체를 찍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변기에 넣어 물을 내림으로써 2차 정벌은 끝이났다.
무사히 그것을 처리한 안도감이었을까.
분명 요의를 느껴 방문한 화장실이었지만, 어느새 그 욕구는 변의로 변해있었고 난 모처럼 새벽의 쾌변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것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장실에서 은은하게 락스냄새도 나는 것이 특히 변기 주변은 내 얼굴이 비칠정도로 아주 깨끗해져있었다.
10일 전에 애써 눌러놓았지만, 한편으로는 집 어딘가에서 몰래 공생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그것의 말로를 내 손으로 직접 이루고 나니
마치 어머니의 복수를 이룬 피터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하면서 침대에서 모처럼의 꿀같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가 10일전에 본 그것과 그날에 본 그것의 크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1. 만약 그 두 개체가 다른 개체라면? 내 집안 어딘가 제 3, 4의 그리마가 돌아다니고 있는 거라면?
그런데 이 가설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리마는 겉보기에 징그러워서 그렇지 실제로는 익충이라고 하질 않는가.
2. 만약 그 두 개체가 같은 개체라면?
10일전에 분명 새끼손가락만 했던 그것이 10일만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가운데 손가락만해졌다면?
그것은 10일동안 내 집안에서 뭘 먹고 자란 것일까.
내 집엔 앞서 말했듯이 음식물찌꺼기가 1도 없다. 냉장고 안에도 물 말고는 흔한 김치 하나 없는 집이다.
그것은 주로 바퀴벌레와 같은 다른 벌레를 먹이로 삼는다고 한다.
그것이 10일동안 살을 피둥피둥 찌울정도의 벌레가 내가 보이지 않는 우리집 어딘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난, 10일이 아닌 2년 남짓되는 기간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온 것이 아닐까?
오늘 밤 편하게 잠에 들긴 그른것 같다.
（세스코가 가정집도 방문해 주려나...）
5
131,538
자르반3세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