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의 유통기한




나는 방을 뒤져서 찾아낸 구급상자를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긴 다리를 접고 소파에 앉아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대로 찍어서 SNS에 올리면 보정도 필요 없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지우하고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저렇게 연예인같이 생긴 남자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 있다니. 그 광경도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건 조금 전 남자의 얼굴이 햇빛에 문자 그대로 '탔다'는 거다.

얼굴을 소독해야 하는 건지, 연고를 발라야 하는 건지, 112에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건지.

"아, 아파요?"

아까부터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길래 물어본 거였는데 고개를 든 남자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아아, 이거? 괜찮아. 다 나았어."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내가 가져온 구급상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착한 사람이네, 혜선이는."

"어, 언제 봤다고 이, 이름을..."

"혜선이 원래 말을 더듬어?"

그게 아니라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 유죄 인간. 불쑥 드밀어진 얼굴에 양 볼이 뜨거워졌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얼굴이다.

"지우한테 연락해 볼게요. 받을지 모르겠지만."

"번호 바뀐 거 몰랐어?"

"번호가 바뀌었어요? 몰랐어요. 몇 달 전에 만나고 연락을 안 해서... 저 진짜 안 친해요, 지우랑."

그러면 어쩌지.
나는 필요 없어진 구급상자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일단 돌아가세요. 지우랑 연락되거든 그, 남자 친구가 찾는다고 전해줄게요. 남자 친구 맞죠?"

"남자 친구...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표면적으로요? 그러면 혼인신고라도 했어요?"

"한국에서는 사실혼이라는 게 있어서 몇 년만 함께 살아도 부부라며. 지우랑 나는 그것보다 훨씬 오래 함께했는데... 우리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일 뿐이구나."

비탄에 잠긴 남자주인공처럼 울먹거리는 얼굴마저 잘생겼다. 나는 보고만 있어도 혼을 쏙 빼놓는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를 만난 지 몇분 안 됐지만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나 사귀셨는데요?"

"정확히 세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못해도 50년은 되지 않았을까."

".... 50년이요? 아하하...."

정신이 이상한 남자가 확실했다.
50년을 만났다면 십 대에 만났다고 해도 60살이 넘었을 텐데. 지우는 나랑 고등학교 동창인 이십 대 후반이었다.

전생에서부터 만나셨어요?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놓진 못했다. 집안에는 무섭도록 잘생긴데다 하는짓은 더 무서운 저 남자와 나 단둘뿐이었으니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랐다.

"일단은 돌아가시고 연락을 드릴게요."

"내 번호도 안 물어봤잖아. 거짓말."

"하하, 그랬죠. 물어보려고 했어요. 물어보려고..."

금세 어두워지는 표정을 보며 구급상자 안에 뭐가 있었는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가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더 빨리 집을 수 있을까. 남자의 운동선수처럼 긴 팔이 거미 다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핸드폰을 집는 척하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구급상자를 열어젖혔다.

촤아악-

그와 동시에 거실 커튼이 젖혀지며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창가로 간 남자가 상쾌한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커튼을 잡은 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고 싶어도..."

그가 불이 붙은 채로 미소 지었다.

"내가 낮에는 잘 못 돌아다니거든."

나는 한 손으로 커튼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소파 위의 담요를 끌어당겨 남자의 몸을 덮었다. 그러고는 바닥을 뒹굴었다.

자가 아니고 전세라구요, 이 미친놈아.
계약서에 이사 갈 때는 원상복구 조항이라는 게 있어요.

다행히 발화의 원인인 햇빛을 차단하자 불이 금세 꺼졌다. 품에 안은 담요 안에서 남자의 살갗과 옷이 탄 냄새와 연기가 메케하게 피어올랐다. 구옥 빌라라서 화재감지기가 설치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와. 방금 진짜 빨랐어."

새벽부터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 원흉이 속 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담요 안에서 쌍 따봉을 날리고 있을 것 같았다.

미친놈이다. 그것도 잘생긴... 그새 화상자국이 재생된 말끔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현혹되지 않으리.

"대체 정체가 뭐예요?"

"여기 인간들은 뱀파이어나 흡혈귀라고 부르던데."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음, 그럼 한 번 더?"

또 뭘 보여주고 믿으라고 할지 공포가 앞섰다.
나는 군데군데 타들어 가 구멍이 난 바짓단을 붙들며 그를 말렸다.

"알겠으니까 그만하시고 좀 씻으세요. 그 쪽한테서 훈제 냄새나요."

훈제 냄새라는 표현이 충격이었는지 남자는 순순히 씻으러 들어갔다. 서랍을 뒤져 전 남자 친구가 두고 간 티셔츠와 바지를 찾아 문 앞에 두었다. 물걸레로 난장판이 된 거실을 한바탕 닦아내고 방향제를 뿌려 환기했다. 다행히 불탄 건 남자 쪽이었는지 바닥이며 벽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햇빛에 불타는 사람이라니...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지우에게 연이어 전화를 걸었다. 남자의 말대로 번호가 바뀐 건지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무의미한 신호음만 이어졌다. 카톡을 켜서 지우와의 대화방을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 지우야, 널 찾는 손님이 왔는데 네 남자 친구 같거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무서워. 제발 연락 좀 줄래? 자기가 뱀파이어래. 안 믿으니까 막 몸에 불을 질러. 정확히는 불 지른 게 아니고 자연발화 현상을 보여준 거긴 한데, 나 너무 무섭거든?

두서없이 써 내려간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남자가 젖은 머리를 털면서 나타났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정상인 같았다. 아주 잘생긴, 막 훔쳐보고 번호 따고 싶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쫓아낼 수도,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한 이 불청객을 어쩌면 좋을까.
마땅히 대접할 게 없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어 거실로 돌아왔다.

불과 몇 분 전에 자연발화 현상이 가능한가? 라는 이론에 해답을 몸소 보여준 남자와 맥주캔을 기울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우랑 그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싸울 때도 있었고 감정이 상해서 몇 주 떨어져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연락은 됐었어. 근데 이번에는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거든. 벌써 삼 개월이 넘었어."

"그... 지우랑 50년쯤 만나셨다고 했나요? 그럼, 실례지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50년을 만나다니. 겉으로 보기엔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내가 말했지만 혀끝이 굳을 만큼 낯선 문장이다.

"내 나이? 백...삼십 년? 사십 년? 쯤 됐던 것 같은데."

멍하니 자신의 나이를 셈하던 남자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렇게 복잡한 건 지우가 다 해줬었는데. 엉엉, 나는 지우 없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야.

자기 나이를 세는 게 복잡한 일이라니. 게다가 울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 한숨을 들은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지우가 내 첫사랑이란 말이야....흑...."

여든살에 첫사랑이라니 그것도 경이롭다면 경이로우시네요.
평범한 사람들은 삶을 정리할 나이였다. 요즘은 백 세 시대라곤 하지만 여든까지 살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안줏거리로 내온 라면을 부수다가 문득 유통기한이 보였다. 다음 주까지네, 유통기한이 다 된 라면은 맛이 없다던데 진짜인가. 술안주로 부셔서 먹어버리면 확인할 길이 없었다. 궁금했는데.

130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나이다. 인간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은 불가능한 숫자.
자연발화 하는 모습을 봐 놓고도 거짓말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숫자였다. 인간에게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으면 지나도 한참 지났을 숫자.

사랑의 유통기한도 아니고 인간의 유통기한에 대해 고민하게 될 줄이야.

그때 바닥에 놓인 핸드폰이 짧은 진동을 흘렸다. 메시지 발신인은 바로 지우였다.

'민폐 끼쳐서 미안. 왜 거기 가서 그러고 있대... 나는 이제 잊고 새 인생 살라고 전해줘. 너무 오래 만나기도 했고... 너한테는 진짜 미안해.'

"지우야??"

후다닥 달려온 남자가 내 어깨너머로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메시지를 보고 말았다.

'나도 이제 인간하고 만나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