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고석재는 방금 나온 방의 문을 닫았다. 이번에도 비어있는 방이었다. 비어있는 병상과 몇 가지 가구들 말고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방이었다. 방들의 이름표가 없어 하나하나 살펴보는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었다.

 ‘연기가 점점 심해지는군.’

 주민규를 두고 온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간호사는 어딘지 신뢰할 수 없었다. 병원 안에서 누군가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강해졌다.

 '빨리 단서를 찾아 주민규와 합류해야 한다.'

 고석재는 복도 끝 방 앞에 도달했다. 여기도 없다면 연기가 더 심한 복도로 가야하는데, 그곳은 너무 위험부담이 큰 곳이었다. 어쩌면 조사를 포기해야할지도 몰랐다. 

 고석재는 복도 끝에 나있는 창문을 보았다. 방범창이 덧대어져 있어서 어떻게 보면 감옥처럼 보였다. 창문 밖은 어둠뿐이었다. 그나마 켜져 있던 불들이 다 꺼진 탓에 보이는 것이라곤 병원 아래쪽에 위치한 건물들의 야경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 밖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군. 벌써 대피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고석재는 곧 생각을 멈췄다. 연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조사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잠금쇠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서서히 열렸다. 

 고석재는 몸을 문 사이로 살짝 넣어 안을 살폈다. 안에는 지금껏 봤던 방과 달랐다. 램프가 켜져 있는 것인지 안은 은은한 주황빛으로 밝았다. 철제 캐비넷이 벽을 따라 2개가 놓여있었는데, 안에는 약병이나 책 따위 등이 놓여있었다. 캐비넷 옆에는 수납장이 있어 여러 명패와 미니어처 등이 놓여있었다.

 고석재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책상에 검은 명패가 보였다.

 ‘병원장 차주호’

 책상 위에는 모니터 하나와 서류 뭉치, 필기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책상 한 모퉁이에 책상용 램프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뒤로 쿠션 가득한 의자 하나가 창가를 향해 돌려져 있었다. 의자의 손 걸이에는 사람손이 보였다. 누군가 앉아있었다.

 고석재는 직감적으로 병원장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못 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종호 사건과 이 병원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그리고 복혼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수인 병원 병원장 되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미동조차 없었다.

 “화재 경보를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여기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고석재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말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공기가 매캐한 연기 냄새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불은 계속 번지고 있을 것이 뻔했다. 오래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병원장과 얘기할 시간은 이곳을 벗어난 뒤에도 충분할 것이었다. 

 “일단 여기에서 나가십시다. 차주호씨.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얘기도 있습니다.”

 고석재의 말소리가 공허하게 떠다녔다. 목덜미에서 팔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머릿속에 안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병원장님이 오늘 이상하게 보이긴 했어요. 찾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불이 번지기 전에 2층 원장실에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녀가 병원장실로 유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병원장이 이미...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주호씨?”

 고석재는 의자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차주호는 천장을 향해 치켜 뜬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 죽어있었다. 얼굴은 전반적으로 보랏빛이 돌고 있었고 목에는 선명하게 붉은 자국이 나있었다. 붉은 자국은 명백하게 손자국처럼 보였다. 

 ‘이건... 살해됐군.’

 살인자의 악력은 범인의 수준이 아니었다. 성인 남성의 목에 명백하게 흔적을 남길 정도라면 살인자의 손아귀 힘은 거의 야수에 가까울 것이었다. 

 고석재의 머릿속에 안지수가 자신을 밀쳐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그녀가 힘이 그리 센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럼 혹시...

 고석재는 차주호의 눈을 감겨 주었다. 피부가 조금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불이 나기 직전에 살해당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만 두 번째로 고인에게 무례를 범하는군.’

 고석재는 숨을 한껏 들이켜 폐 가득 공기를 넣은 채 차주호의 몸을 뒤졌다. 의사 가운과 셔츠 주머니에선 필기구와 뭔지 모를 내용이 적힌 쪽지,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핸드폰은 화면이 잠겨있어서 열어볼 수 없었다. 바지를 뒤지자 지갑과 작은 수첩이 들어있었다. 

 지갑은 얇고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되어있었다. 안을 펼치자 신용카드 1장과 신분증, 5만원 지폐 1장만 들어있었다.

 수첩도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양장 커버로 되어있었으나 자주 손을 대었는지 기름때로 찌든 것이 보였다. 수첩을 열어보자 중간 정도까지 간단하게 쓴 메모들이 보였다. 필체는 깔끔하고 글씨를 또박또박 쓴 덕에 읽는 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마지막 기록이 있는 부분을 펼쳐 읽어보니 기억할 것을 적은 메모인 것 같았다. 

 

[16년 6월 19일]

-주 집사, 약속, 불분명, 필요한 물건, 더 많은 재료, 성공은?

[16년 6월 29일]

-직원 관리 필요, 특히 안 교도 간호사, 동요 주의

 고석재는 안 간호사라고 쓰인 글씨에서 눈길을 멈췄다. 안지수일 것이다. 게다가 '교도'라고 적힌 것을 보니 그녀가 복혼회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읽어나갔다.

[16년 7월 25일]

-주 집사 실종, 약속대로, 박 장로 연락, 빠른 해결 필요, 연구는 계속

[16년 7월 30일] 

-주 집사 연락?, 대책 필요, 실험 실패?, 아직

[16년 8월 14일]

-교단 내 입지 관리 필요, 안 간호사 주의 할 것, 권순자 보호자 변화 관찰

[16년 9월 7일]

-병원 정리 완료, 주 집사와 접촉 시도 날짜는?

 고석재는 마지막 기록을 주목했다. 권순자는 안지수가 말했던 '미친 년'인 것 같았다. 불현듯 주민규와 자신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주종호의 집에서 숨겨진 방과 미쳐버린 주민규 이후에 병원에서의 수상한 사람들까지.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고석재는 수첩을 덮었다. 더 자세하게 읽고 싶었지만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할 것 같았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책상을 뒤져 보았으나 대부분 의료나 행정에 관련된 문서들뿐이었다.

 고석재는 시신을 수습하고 싶었지만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대로 방문 쪽으로 돌아섰다. 문 사이로 연기가 조금씩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고석재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니,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손잡이만 돌아갈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고석재가 어깨로 문을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벌어진 틈으로 연기가 더 많이 들어올 뿐이었다. 누군가 밖에서 열지 못 하도록 문 앞에 무언가를 놓아둔 것 같았다.

 ‘젠장, 함정이었나?’

 안지수는 처음부터 자신을 여기로 유도했던 것이다. 안지수가 목을 조른 병원장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그녀가 병원장을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공범이 있을지도 몰랐다.

 ‘민규씨가 위험하다.’

 고석재는 도움닫기를 하여 문과 부딪혀 보았지만 좀 찌그러질 뿐 열리진 않았다. 좀 무리를 하면 열릴 것 같았지만 문틈으로 들어오는 연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탈출하기 전에 질식하겠어.’

 벌어진 틈을 메꿔보려고 했지만 문이 찌그러진 탓에 완전히 닫히지도 않았다. 연기는 점점 차올라 기침을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질식해서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고석재는 옷깃으로 코를 가리고는 사방을 살폈다. 책상 뒤쪽에 나있는 창문이 보였다. 방범창이 덧대어져 있으나 창문의 크기는 성인 남성이 빠져나가기에 충분해 보였다.

 ‘차라리 저길 뚫는다.’

 생각이 채 끝나기 전에 차주호의 시신이 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어금니를 꽉 다문 채 차주호의 시신을 들어 바닥에 눕혔다.

 ‘미안합니다.’

 의자를 들어 그대로 창문에 던졌다. 

-콰장창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었고, 의자는 방범창에 막혀 튕겨져 나왔다. 연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빠르게 빠져 나갔다.

 고석재는 책상을 한쪽 벽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도움닫기를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의자를 다시 집어 들었다. 창문의 반대편 벽에 최대한 붙어 서서는 심호흡을 했다. 아직 연기가 있긴 했지만 숨을 쉴만했다. 

 고석재는 의자를 앞으로 들어 올린 채 창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으아아!”

-텅!

 의자가 방범창을 뚫고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고석재는 창문턱에 걸리며 몸의 절반이 창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고석재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의자를 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몸에 생채기가 났지만 흘러드는 아드레날린 덕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범창이 예상보다 무른 탓에 하마터면 창문 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 

 고석재는 긴장감에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창문 밖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테라스 같은 곳이 보였다. 병원 입구 쪽인 것 같았다. 테라스까지 갈 수 있다면 높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 아래쪽에는 병원 외벽을 따라 장식으로 넣은 벽돌 층이 보였다

 ‘이 정도라면 발을 디딜만하겠어.’

 고석재는 심호흡을 하고서는 창문을 넘어 벽돌에 발을 디뎠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잡혔다.

 ‘부디 바람이 안 불어야 하는데...’

 고석재는 몸과 팔다리를 최대한 벽에 붙인 채 게걸음으로 테라스 쪽으로 다가갔다. 걸음걸음 마다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속도를 낼 순 없었다. 장장 10여분 정도 걸려 테라스까지 갈 수 있었다.

 테라스에 두 발이 닿자 긴장감에 온몸이 휘청 이는 것 같았다. 쉴 틈은 없었다. 테라스에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살폈다. 문틈으로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안 되겠군.’

 고석재는 테라스 아래를 살피자 다행히 구급차가 보였다.

 ‘구급차 위로 뛰어내려도 되겠어.’

 고석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구급차 위로 뛰었다.

-쿵

 구급차의 운전석 쪽 상판 위로 내려앉았다. 뒤이어 땅으로 내려오자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이 먹고 이것도 쉽지 않군.’

 고석재는 곧 일어났다. 자신의 감이 맞는다면, 지금 누구보다 위험한 사람은 주민규였다. 병원장을 살해한 사람은 틀림없이 안지수였다. 그녀는 복혼회의 신도였고, 복혼회가 이 병원에서 무언가 벌이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주민규도 희생양이 될지 몰랐다.

 고석재는 병원 출입구로 들어가려했으나 연기로 인해 진입은 불가능해보였다. 눈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응급 센터의 출입구가 보였다. 

 고석재는 걸음을 옮기려다 이상한 시선을 느껴 주변을 살폈다. 주변엔 어둠뿐이었다. 문득 아까 들었던 생각이 다시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병원에서 나온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 거지?’

 고석재는 주변을 다시 살폈으나 조용히 서있는 관목들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그에 따라 스산한 소리가 관목을 따라 들려왔고, 바람결에 맞춰 흔들렸다. 흔들리는 틈 사이에 관목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보였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사람 모양이 있는 것도 같았다. 

 고석재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응급 센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조급해지는 것은 본인이었다. 수첩에 적힌 '실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자신의 직감이 그저 상상이길 바라며 응급 센터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응급 센터로 들어가는 출입문 앞에는 병상 10개 정도가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문을 막은 것 같았다. 

 고석재는 서둘러 병상들을 치웠다. 병상들이 서로 얽히듯 쌓여있는 탓에 체력 소모가 심했다. 병상을 다 치워내자 막혀있던 옅은 연기가 음울한 기운을 품은 채 조금씩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고석재는 문을 밀어 열었다. 미닫이문은 고석재의 뒤에서 앞뒤로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하다 서서히 닫혔다. 응급센터 안은 어두웠다. 고석재가 들어온 출입구의 반대편 벽에는 비상 출구 유도등이 연기로 인해 흐린 초록빛을 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문이 보였다. 병원 안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흐흐흑”

 고석재는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웬 여자가 한 병상 앞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병상에는 누군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는 것 같았다. 이불과 병상 뒤쪽 벽, 커튼에는 피가 분명한 얼룩이 선명히 보였다. 간호사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 미친년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고석재는 병원장의 수첩에 적혀있던 '권순자 보호자'가 생각났다. 이 여자가 권순자일 것이다. 그녀가 왜 '변화 관찰' 대상이었던 것일까? 복혼회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고석재는 시선을 여자에게서 고정 시킨 채 그녀와 최대한 거리를 두며 병원 입구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걷느라 속도를 내지 못 했다. 더군다나 연기는 시시각각 늘어나는 것 같아 조바심마저 들었다.

 고석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자의 등에서 점점 옆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석재는 그녀의 손을 살폈다. 뒤에서 볼 땐 보이지 않던 칼이 보였다. 걸음을 옮기면서 시선도 그녀의 얼굴로 옮겨졌다. 흐느끼는 소리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표정을 보자 흐느끼는 소리가 웃는 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박장대소하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여자가 웃음을 멈췄다. 고석재도 걸음을 멈췄다. 입구까지 몇 걸음 안 남았지만 그런 탓에 그 여자의 앞에 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자는 부릅뜬 눈으로 고석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어머님, 흥분하지 마시고...”

 “끼아아악!”

 고석재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여자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탓이었다.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칼을 들고 오는 모습은 절로 오금이 저리며 제자리에 주저앉게 만들 모습이었다. 

 고석재는 그녀가 그럴 거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침착하게 대응했다. 자신이 객관적으로 상대보다 피지컬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도 침착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

 고석재는 옆에 있는 병상을 잡고 여자 쪽을 향해서 밀었다. 여자는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는지 돌진해오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병상에 들이 받혔다. 퍽 소리와 함께 여자의 허리가 접히며 병상 위로 상반신이 넘어왔다. 

 고석재는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걸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가 발버둥 치기 전까지는.

 놀랍게도 여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벌레가 기어오듯 병상 위를 타고 고석재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칼은 첫 번째 충격에 놓쳐서 맨손이었지만 무차별적으로 고석재를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 자신의 손톱이 부러지고 주먹에 피멍이 드는 데도 난타를 멈추지 않았다. 

 “으앗!”

 고석재는 두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여자를 밀어냈다. 여자는 고석재의 힘에 거의 날다시피 옆에 있는 병상 위로 넘어졌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여자는 금세 일어나더니 고석재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녀의 눈과 코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입에서는 침과 피가 섞인 채 거품을 내고 있었다. 

 “어머님, 진정하시고요... 치료를 먼저...”

 고석재는 그 모습에 절로 뒷걸음쳤다. 여자는 흐느적거리며 움직임도 둔해지고 힘도 약해졌다. 온 몸에 피멍과 피칠갑을 한 모습은 고석재를 흔들리기에 충분했다.

 “그르륵...끄윽...”

 여자는 얼마간 고석재를 쫓아가다가 힘이 다했는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팔은 허우적거리며 무언가 잡는 시늉을 했는데, 고석재는 그 모습을 더 볼 수 없어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고석재의 뒤에서 철퍽하며 여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석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어쩌면 같은 일이 주민규에게도 벌어질 수 있었다.

 고석재는 눈을 떴다. 걸음을 옮겼다. 안지수와 주민규가 내려간 비상계단 쪽이었다. 안지수와 복혼회가 이 병원에서 벌이고 있는 '실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주민규를 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