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늦은 오후, 서울 외곽의 낡은 아파트 단지 앞에 트럭이 멈췄다. 윤수는 운전석에서 내려 트럭 문을 쾅 닫았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는 코트를 여미며 새 집을 올려다보았다. 15층짜리 아파트였다. 회색 콘크리트 외벽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고, 창문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여기가 304동이네…”

윤수는 손에 든 계약서를 확인했다. 304동 1203호. 월세 40만 원. 서울에서 이 가격에 방을 구하기란 기적에 가까웠다. 직장을 잃고 몇 달째 백수로 지내던 그에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조용한 동네”라며 웃었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어색했던 게 떠올랐다.

짐은 많지 않았다. 낡은 매트리스, 작은 책상, 옷 몇 벌이 든 박스 하나. 윤수는 트럭에서 짐을 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잡이가 끊어진 박스를 들자 손바닥에 먼지가 묻어났다. 그는 손을 털며 계단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고장 난 지 오래된 듯, 문에 ‘점검 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12층까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숨이 턱까지 찼다. 복도엔 형광등이 깜빡였고, 벽엔 누런 얼룩이 번져 있었다. 1203호 앞에 섰다. 문은 오래된 철제로, 페인트가 벗겨져 녹이 슬어 있었다. 열쇠를 돌리자 끼익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야, 이게…”

안은 예상보다 깨끗했다. 바닥은 오래된 장판으로 덮여 있었고, 벽지엔 곰팡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작은 거실과 방 하나, 욕실이 전부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맞은편 아파트와 그 뒤의 잿빛 하늘이었다. 윤수는 짐을 내려놓고 매트리스를 깔았다.

“일단 자야지.”

그는 배달 앱을 열어 치킨을 주문했다. 배고픔이 위를 쥐어짜고 있었다. 30분 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배달원이 치킨 박스를 내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윤수는 문을 닫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배달원이 떠나는 발소리가 유난히 빨랐다.

치킨을 먹으며 TV를 켰다. 화면이 깜빡이며 잡음만 나왔다. “안테나 문제인가?” 그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밤이 깊어지며 단지가 어둠에 잠겼다. 불 켜진 집이 하나도 없었다. 윤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잠을 청했다.


새벽 3시. 쿵. 윤수는 잠에서 깼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눈을 비비며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소리가 다시 들렸다. 천장에서였다. 위층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밤에 운동하나?”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무거운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듯했다. 쿵, 쿵, 쿵. 10분쯤 이어지다 멈췄다. 윤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이 들자마자 또 들렸다. 쿵. 이번엔 더 가까웠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게…”

소리가 방 안에서 나는 듯했다. 윤수는 불을 켰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매트리스와 박스뿐.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쿵. 이번엔 문 쪽에서였다.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드는 소리가 들렸다. 휘이이. 윤수는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자 차가운 감각이 손을 찔렀다.

문을 열었다. 복도가 어두웠다. 형광등이 꺼져 있었다. 윤수는 스마트폰 플래시를 켰다. 빛이 복도를 비췄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바닥에 물때가 있었다. 축축한 발자국 같았다. 윤수는 문을 잠갔다.

“착각인가…”

그는 다시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쿵, 쿵.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벽에서였다. 윤수는 벽을 두드렸다. “야! 조용히 좀 해!” 소리가 멈췄다. 그는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윤수는 관리실로 향했다. 단지 입구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자 노인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안경 너머로 눈이 흐릿했다.

“저, 1203호에 사는데요.” 윤수가 말했다. “위층에서 밤새 소리가 나서요.”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위층?” 목소리가 갈라졌다. “1203호 위는 1303호인데… 거긴 빈집이야.”

“빈집이요?” 윤수는 눈을 깜빡였다. “근데 소리가 분명히…”

“착각일 거야.” 노인이 손을 저었다. “이 단지 오래됐어. 소리 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지.” 그는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윤수는 입을 다물고 나왔다.

“빈집이라니…”

그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복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썩은 생선 같은 냄새였다. 윤수는 코를 막고 집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방을 채웠다. 그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단지에 대해 검색했다.

‘304동 폐쇄’, ‘재개발 지연’, ‘주민 이주’. 기사가 몇 개 떴다. 5년 전, 단지가 재개발 계획에 포함됐지만 자금 문제로 중단됐다는 내용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떠났고, 남은 집은 몇 채 안 됐다. 윤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나한테 세를 놓은 거지?”

그날 밤, 소리가 다시 들렸다. 쿵, 쿵, 쿵. 이번엔 더 컸다. 윤수는 벌떡 일어났다. 소리가 천장에서 나는 게 확실했다. 그는 빗자루를 들고 천장을 쳤다. “조용히 해!”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곧 다른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드르륵.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윤수는 숨을 죽였다. 소리가 방 안으로 이동했다. 드르륵. 문 쪽에서 멈췄다. 그는 문을 노려보았다. 문틈으로 그림자가 보였다. 길고 얇은 그림자였다. 윤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구야…?”

그림자가 흔들렸다. 드르륵.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윤수는 문으로 다가갔다. 손이 떨렸다. 문을 열자 복도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냄새가 강해졌다. 썩은 냄새였다. 윤수는 문을 잠갔다.


며칠이 지났다. 소리는 매일 밤 들렸다. 쿵, 쿵, 드르륵. 규칙적이던 소리가 점점 불규칙해졌다. 윤수는 잠을 못 잤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그는 관리실에 다시 갔다.

“1303호가 빈집이 아니에요.” 윤수가 말했다. “소리가 계속 나요.”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말했잖아, 착각이라고.” 그는 서랍에서 열쇠를 꺼냈다. “가서 확인해 봐. 1303호 열쇠야.”

윤수는 열쇠를 받아 들었다. 손이 차가웠다. 그는 1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더 어두웠다. 형광등이 아예 꺼져 있었다. 1303호 앞에 섰다. 문은 1203호와 똑같았다. 열쇠를 돌리자 끼익 소리가 났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창문은 깨져 있었다. 바람이 스며들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윤수는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냄새가 났다. 썩은 냄새였다. 욕실에서 나는 듯했다.

욕실 문을 열었다. 타일이 까맣게 변색돼 있었다. 배수구에서 물때가 올라왔다. 윤수는 코를 막았다. “뭐야, 이게…” 그때, 쿵. 소리가 났다. 욕실 천장에서였다. 윤수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얼룩이 있었다. 검고 축축한 얼룩이었다.

드르륵.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윤수는 몸을 돌렸다. 복도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는 문으로 뛰었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발자국이 있었다. 축축한 발자국이 1303호에서 계단으로 이어졌다.

윤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켰다. 단지에서 일어난 사건을 검색했다. 오래된 기사가 하나 떴다. ‘304동 1303호 주민 실종’. 10년 전, 1303호에 살던 남자가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흔적을 찾지 못했다.

“뭐야, 이게…”

그날 밤,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쿵, 쿵. 천장이 아니라 벽에서였다. 드르륵. 문에서였다. 윤수는 문을 노려보았다. 문틈으로 그림자가 보였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사람 같았다. 아니, 사람 같지 않았다. 길고 얇은 팔다리가 문틈으로 흔들렸다.


윤수는 문을 쾅쾅 쳤다. “꺼져!”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드르륵.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문이 흔들렸다. 윤수는 문을 손으로 눌렀다. 손이 차가웠다. 문 너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쉬익, 쉬익.

“도와줘…”

윤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문이 쾅 열렸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냄새가 방을 채웠다. 썩은 냄새였다. 윤수는 배낭을 챙겨 밖으로 뛰었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따라왔다. 탁, 탁, 탁.

계단을 내려갔다. 발이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무릎이 찢어지며 피가 났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1층에 닿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열어!” 그는 문을 쳤다. 소리가 가까워졌다. 탁, 탁. 윤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안 돼…”

그는 문을 부쉈다. 유리가 깨지며 손이 피투성이가 됐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단지는 어두웠다. 불 켜진 집이 없었다. 윤수는 달렸다. 발소리가 따라왔다. 탁, 탁, 탁. 그는 멈춰 섰다. 숨이 막혔다. 앞에 그림자가 있었다.

길고 얇은 팔다리, 얼굴 없는 형체였다. 입이 쩍 벌어졌다. “도와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윤수는 귀를 막았다. 형체가 다가왔다. 손이 목을 감쌌다.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6. 진실의 끝
윤수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방 안이었다. 1203호였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윤수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림자가 있었다.

“너… 뭐야…?”

형체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없었다. 입만 있었다. “도와줘…” 윤수는 문을 닫았다. 문이 흔들렸다. 쿵, 쿵. 그는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윤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 ‘엄마’가 떴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도와줘…” 목소리가 전화에서 나왔다. 윤수는 전화를 떨어뜨렸다. 화면이 깜빡이며 꺼졌다.

문이 쾅 열렸다. 형체가 들어왔다. 윤수는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 끝에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에 그가 비쳤다. 아니, 그가 아니었다. 얼굴이 없었다. 윤수는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안 돼…”

형체가 다가왔다. 손이 목을 감쌌다. 윤수는 숨이 막혔다. 눈앞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도와줘…”*였다.



304동은 조용했다. 1203호는 다시 빈집이 됐다. 관리실 노인은 신문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또 사라졌군…” 단지는 어둠에 잠겼다. 바람 사이로 낮은 소리가 울렸다.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