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두렵고 끔찍한 강대한 마왕이 세상에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대륙을 누비며 악마의 본성대로 인간 세상을 끈질기게 유린했고, 국가는 그 체제를 잃고 세계 각지에서는 차마 벌어져서는 안 될 일들이 만연했다.

그 존재는 너무나 강하여,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마침내 집결하여 마왕 토벌에 나섰다.

강력한 검과 마법,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성직자들의 회복과 정화의 주문이 마왕군의 사방에 비처럼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전설로 불릴 만한 이 강력한 힘들이 한 점으로 모일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마왕의 압도적인 강함 때문이었다.

처절한 전장의 끝에 마왕군은 모두 쓰러졌으나,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용사들은 불사의 저주가 새겨진 마왕을 죽일 수 없었다.

마치 인세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그를, 당시 최고의 대마법사의 힘을 빌려 봉인하기로 결정했다.

마왕은 죽지 못하고 봉인되었고, 세상은 그제야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세상에 깊은 상흔을 남겼던 마왕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서서히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듯했다.

* * *

이곳은 지하 666층.

산산이 부서진 잔해 속에서 용사 케이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육신은 암흑의 광휘에 감싸여 있었고, 깊은 어둠 속에서 솟아나는 강인한 의지가 차가운 바닥을 굳건히 디뎠다.

지하의 냉기가 뼈를 파고드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지닌 사명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지하 666층 던전을 돌파하고, 지상에 군림하는 마왕을 무찔러야 한다…!'


굳어버린 관절을 서서히 풀며 케이른은 앞으로 나아갔다.

지상을 향해 첫 발을 떼자마자, 그는 곧 던전을 지키는 마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성난 이빨을 드러낸 늑대들이 길목을 가로막았다.

케이른이 처음 조우한 것은 회색 워 울프 무리였다.

총 여덟 마리.

이 위협적인 워 울프들은 용사를 발견하자마자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으르르르…. 웡! 웡!"


어쩐지 공격이라기보다 반기는 듯한 울음소리였지만, 케이른은 주먹을 들어 가장 앞선 워 울프의 머리를 세차게 강타했다.

익숙지 않은 주먹질에 어색함을 느꼈다.

용사를 상징하는 성검이 없어서일까?

그는 즉시 머리에 떠오른 마법을 영창했다.


"체인, 다크 애로우!"


어둠으로 직조된 마법 화살이 즉시 생성되어 쏘아져 나갔다.

암흑의 화살들은 워 울프 무리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으며 차가운 바닥에 검은 잔흔을 남겼다.


"끼잉… 낑…"


애처로운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지하 던전에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워 울프들은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게 둔 채로, 케이른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갈 길이 멀어... 이 늑대들은 치명상을 입었으니, 내버려둬도 죽을 거야.'


그는 늑대 무리의 잔해를 뒤로하고 계속 나아가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665층의 회랑으로 들어서자, 벽에 박힌 횃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던전은 줄지어 늘어선 불꽃으로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케이른은 훤해진 길을 활보하며 다음 몬스터가 나타날 것에 대비했다.

길을 따라 쭉 이동하자, 그곳에는 오크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과 칼, 그리고 투박한 방어구로 무장한 오크들은 이미 태세를 갖추고 용사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케이른은 아직 마땅한 무기가 없었기에, 역시 마법을 영창할 준비를 했다.

오크들은 용사를 마주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무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이내 전투 태세를 풀었다.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가 앞으로 나서며 양 팔을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다.


"다크 라이트닝 볼트!"


콰앙!

케이른이 주문을 외우는 것과 동시에 어둠의 구체가 튀어나가, 가장 앞에 있던 대장 오크를 포함한 무리 전체를 순식간에 전멸시켰다.

엄청난 규모의 암흑 전류가 오크들을 휘감으며 '파직파직' 소리를 냈고, 죽은 오크의 시체는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용사는 가볍게 그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크들이 남긴 무기 중 쓸 만한 것을 추려냈다.


"오크의 칼이라... 일단 이거면 되겠어."


케이른은 다시 또, 다음 계단을 올랐다.

케이른은 층을 올라갈 때마다 같은 전투를 반복했다.

비록 오크의 칼을 얻었지만, 그는 그것을 휘두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익숙한 암흑 마법을 전개하여 길목을 가로막는 몬스터 무리를 순식간에 정리해 나갔다.

마침내 660층에 오르자, 그곳에는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다.

은백색의 투구를 제외하고는 온몸을 덮은 플레이트 아머를 장비한 중년의 기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케이른은 마법을 외우는 대신, 오히려 반가운 듯 그 늙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 이 흉악한 던전에도 의로운 기사님이 계셨군요."


기사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너... 너는...? 네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용사는 기사의 외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자신을 기억하는 동료라고 생각했다.


"...저와 함께, 지상의 마왕을 무찌르러 갑시다. 우리가 힘을 합쳐야 쓰러뜨릴 수 있어요!"


늙은 기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며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잠시 멈춰 있던 기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마왕을 쓰러뜨린다고 하니... 함께 하겠네."


케이른은 기사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층을 올랐다.

기사는 무겁게 굳은 표정으로 용사의 뒤를 따랐고, 케이른 또한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감을 되새기며 다음 층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649층에 들어서자, 타락한 정령들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용사 일행을 맞이했다.

어둠의 4대 정령들은 기묘한 공명음을 흘리며 케이른에게 다가왔다.

그 미세한 기파는 마치 구슬프면서도 그리운 감정을 표현하는 듯, 짧고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케이른은 망설임 없이 반대 속성을 지닌 물리 공격 마법을 펼쳤다.


"다크 엘레멘탈 스피어!"


콰장창! 콰광!

마법이 폭발하며 정령들의 신체를 꿰뚫고 복도를 암흑 마나로 물들였다.

가지각색의 속성 마법이 난사되었고, 정령들은 무참히 증발하며 사라졌다.

등 뒤에서는 기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용사의 압도적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마법을 잘 쓰시는구려... 마치, 숙련된 마법사처럼..."


용사는 기사의 감상에 명랑하게 대꾸했다.


"마왕군을 상대하다 보니, 가벼운 마법을 익혔을 뿐입니다. 갑시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으니."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고, 층마다 배치된 몬스터들을 주저 없이 섬멸했다.

모든 전투는 용사 혼자서 이루어졌다.

* * *

용사 일행은 마침내 650층에 도달했다.

역시나 보스 몬스터가 길목의 끝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멀리서 그 실루엣을 본 용사, 케이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이 깊은 지하 던전은 10층 단위로 보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는 짧게 동조했다.


"그렇군... 그런 거 같소...."


그들이 점차 가까이 다가가자, 승려복을 입은 사제 보스 몬스터와 마주 서게 되었다.

사제는 다가오는 용사 일행을 응시하며 서서히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곧, 무언가 확신에 찬 증오로 변해 갔다.

사제는 기겁하며 외쳤다.


"너...! 네가 여기에 왔구나! 죽여주마...!!!"


갑작스러운 감정과 함께 내뱉은 사제의 말은 그 끝에서 분노에 찬 포효로 바뀌었다.

마치 일생일대의 최흉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끈적한 살기와 처절함이 필사의 외침이 되어 지하 회랑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케이른은 다급하게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잠깐만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저는 용사입니다! 우리들은 지상으로 나가서, 마왕을 토벌해야 합니다!"


자못 비장하게 외친 용사의 말에 사제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충격에 휩싸였다.


"뭐...? 네가, 용사...?"


그렇게 말하며, 사제는 용사의 등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사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느껴지는 응시.

마치 꿰뚫리는 듯한 기사의 시선에 사제가 충격으로 흔들리는 듯 입을 벌렸다.

사제는 이내 충격을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아... 아! 그럼 그렇지! 용사 일행이셨군요...? 제가... 제가 오해를 했나 봅니다...?"


케이른은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감탄한 듯 말했다.


"역시 말하면 통할 줄 알았습니다. 사제님도 같이 지상의 마왕을 무찌르러 가시죠."


순진한 얼굴로 제안한 용사의 말에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와 함께 용사의 등 뒤에 섰다.

늙은 기사와 사제는 말없이 용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무도 셀 수 없었다.

지하 400층.

어느덧, 용사가 지상을 향해 나아가며 늘린 일행의 수는 스무 명이 넘어섰다.

그들은 이따금 용사의 눈길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속삭였다.


"저 놈이 왜 우리를 모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를 봐서..."


"...조용히 하게. 우리의 힘이... 저 용사라고 주장하는 자를 넘어섰을 때..."


용사는 늘 그렇듯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또다시 몬스터를 도륙하고 있었다.

오로지 암흑의 마법으로만.

* * *

지하 360층.

용사는 보스 몬스터의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검을 치켜든 채, 문답무용으로 케이른을 베기 위해 쇄도해오는 존재를 앞에 두고 그는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깐...! 나, 용사라구! 내 말 좀 들어봐!"


두 자루의 성검을 앞세운 쾌속의 검술을 지닌 모험가는 케이른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 네가 용사면, 나는 신이겠지. 죽어라. 마왕."


그 말을 들은 용사는 내면이 정지하는 듯했다.

그리고, 절규했다.


"아니야... 아니야...!"


용사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발언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은,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야아아악!!!"


용사의 손에서 최후의 수단이었던 시간 마법이 펼쳐졌다.


"프리즘!!!"


쌍검을 들고 쇄도해오던 모험가가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지했다.

마치 꿈을 부수기 직전의 표정으로.

용사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는 것에 정신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관통된 화살이 몸통을 비집고, 가슴팍에 튀어나온 것이 보였고,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덮쳐오는 마법과 화살, 신성력이 담긴 공격을 인지한 것과 동시에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용사는 주체할 수 없는 떨림과 함께 돌아보며 외쳤다.


"왜... 왜냐!! 나와 같이 마왕을 토벌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 통렬한 외침을 들은 용사 일행들은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 재수가 없으려니까. 용사 행세는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 마왕 새끼야!"


"...솔직히 그대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어째서 마왕군을 제 손으로 장사 지내는 것이오? 마왕?"


용사는 자신을 조롱하는 동료들의 화살 같은 비난 속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뒈져라, 악귀 놈아!!"


케이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도 몸의 고통보다 먼저, 충격에 정신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마법을 외웠다.


"프리즘."


서른이 넘는 용사 일행이 모두 시간 마법에 갇혀 정지하였다. 케이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행히도... 당신들은 마왕의 세뇌에 물들어, 나를 마왕이라고 울부짖는군...!"


용사는 피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하나하나 들고 있던 칼을 휘둘러 목숨을 끊었다.

서른이 넘는 그들의 맥을 끊으면서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럴 수가... 이토록 숭고한 이들이, 단지 마왕의 정신 마법에 걸려 배반을 하게 만들다니....'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난 용사는 다시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이 정지된 채로 걷고 있자, 이윽고 익숙한 듯이 층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헬 하운드를 타고 있는 지옥의 간수, 악마들이었다.

불길을 몸에 두른 그들은 용사의 앞에 신사적인 포즈로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마왕님... 부디 저희의 목숨을 거두시고, 다시 한번 지상으로 나가서 위엄을 떨치십시오."


그들은 용사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모습은 목을 내밀고 있는 듯했다.

케이른은 그 모습을 보며 역겨움에 치를 떠는 듯 말했다.


"나는 마왕이 아니야!!! 용사라고!!!"


용사는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고개를 조아린 악마들과 헬 하운드의 목을 취했다.

눈앞에서 동료가 당하고 있음에도 조금 몸을 떨 뿐, 고개를 들지 않는 악마들을 보며 용사는 화가 끝까지 차올랐다.


"고개를 들어!! 그리고, 나와 싸워라!!"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지옥의 군세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 * *

용사 케이른은 층을 올라가며 어쩔 수 없이 시간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의 틈이라도 주면, 그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케이른은 스스로를 신뢰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가... 마왕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분명히 지하 끝자락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용사였다는 것을... 기억했단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10층의 보스 몬스터가 눈앞에 섰다.

빛나는 황금 갑주 아래, 전신이 효율적으로 단련된 진짜 용사의 실루엣이었다.

그의 앞에 선, 천사의 부름을 받은 듯 성스러운 검사가 차분하게 말을 걸어왔다.


"왔는가? 마왕."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그 부름에 용사는 다급하게 주문을 외쳤다.


"프리즘!!!"


성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뱉었다.


"...그딴 게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덤벼라. 못다 한 결착을 여기서 내주마."


용사는 일순간 정지했다. 정신적 위기감을 느낀 케이른은 숨을 들이쉰 채 내쉴 수가 없었다.


'프리즘이, 안 통해...?'


정신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순식간에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몸을 뒤로 날려 피했다.

용사는 눈앞의 성검사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전설적인 검술을 펼치는 그 자를 보며, 케이른은 생각이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크크... 이렇게도 약해진 모습이라니. 마왕, 너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냐?"


용사... 아니, 마왕은 그 순백의 성검사를 눈앞에 두고 분노를 느꼈다.

자신의 모습이었어야 할 그 용사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화가 끓어올랐다.

* * *

케이른은 금빛 용사를 쓰러뜨렸다.

그는 지하 10층에서 지상으로 향하며 만나는 모든 상위 종족들로 구성된 몬스터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런 그를 붙잡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길을 비켜서며 충성을 맹세하는 말을 쏟아낼 뿐이었다.


'...거짓말이야. 이건 현실이 아니다.'


지하 4층부터는 사천왕들이 케이른을 맞이했다.

여전히 그들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케이른은 들을 수 없었다.

어서 가서, 지상에 있을 흉포하기 그지없을 마왕을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마왕일 테니까.

* * *

케이른은 그토록 갈망하던 지상 1층으로 발을 내디뎠다.

정신이 나간 듯 사방을 둘러보며, 마왕의 존재를 찾기 위해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하나의 사실에 몰입했다.


"...어디야. 마왕 놈아, 네가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보스 몬스터.

매 10층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

진짜 용사들의 마지막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대마법사가 마왕의 모습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때, 용사. 지하 세계를 구원하고, 이 자리에 섰나?"


케이른은 마침내 원하던 말을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 내가 그 용사다! 마왕은 어디에 있지?"


대마법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용사를 마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오랜 세월의 비밀을 읊조리듯, 지극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거대했다.


"...마왕은 너였어. 네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케이른은 이를 악물고 그 말을 반박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야!!! 나는...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 내가 용사라는 것을 기억하고...!"


대마법사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내가 그렇게 기억을 심었지. 바로 그 용사라는 확신이, 깨지지 않을 마왕 봉인의 전부니까."


그 순간, 케이른의 육신에서 거대한 암흑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감춰져 있던, 잊고 있던 마왕의 거대한 육신이 다시금 현실에 재현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고, 그 거대한 크기는 눈앞의 모든 것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순수한 악의 기운이 온 대륙을 휘감으며 악마의 군세가 스스로 무릎 꿇고 복종하게 만드는 위엄을 현실로 체현해냈다.



[[내가... 용사야...]]



마왕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대지를 뒤흔들고 하늘을 진동시켰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대마법사는 그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은 마치 세상을 심판하려는 듯 웅장했다.


"하모니 오브 마나, 루인 오브 그라운드. 디스트럭스 윈드. 메테오 스트라이크...."


대마법사의 주문이 차례대로 거대한 마왕의 육신을 덮쳤다.

거대한 마법 폭풍이 휘몰아쳤고,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마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암흑의 주먹이 대마법사의 왜소한 육신을 향해 덮쳐왔다.

대마법사는 그 시야를 가리는 주먹 아래에서 고요히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는 체념과 함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나의 죽음과 동시에 너는 지하로 되돌아가 봉인 될 거야. 영원히... 이 비극을 반복할지라도, 이것만이 세상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


콰자작!

육편이 비산하며 마왕의 주먹이 대마법사의 존재를 산산이 압착시켰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마왕은 다시금 회귀했다.

* * *

깊은 어둠 속에서 용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번에도 스스로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케이른.

지하 666층의 던전을 꿰뚫고, 지상에 올라가 흉악한 마왕을 토벌하는.

순백의 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