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았다. 모든 게 텅 빈 상태로, 호흡하는 것은 오직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유리창 속 그녀,

​내 마음은 이미 몸에서 비켜나와 사선에 섰다.

그리곤 그녀와 나를 양 끝에 두고 회전한다.

영화 같은 순간, 얼마나 기다렸을지 가늠할 수 없다.

이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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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네 이건 구제발굴에서 발견된 겁니다."

온전한 유골... 대부분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예 뭐... 자 다음은 신공항 만들 때 지반개량에 사용된 심층 혼합 장비입니다! 이게 핵심인데요. 이걸 이른바 DMM이라고 하는데..."

공학도 돼지, 서울대 나온 공학도 돼지, 떠든다.

오 일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노동자 김계환 씨의 사망을 두고 정치권이 격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 금년... 시공 도중 현장에서 일하던... 김제환, 아 김... 계환 씨가 사망했습니다. 당사는 이에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그를 기려 기념비를 건립하겠습니다."

격양된 말투로 [하지만 당시 상황은 시공에 도저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소 김계환 씨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혹시 시공 강행의 배후를 안다면 말해주십시오!）]

"..."

나도 거기 있었다.

"...오늘도 한 사람이 죽었어요. 저기 깔려서..."

손이 부르르 떨리는데

[네. 김제환 씨는 어떤 분이셨죠? （최 회장 관해서는 정말 모릅니까!）]

[......짧게 답변 부탁드립니다.]

[...3초 나옵니다. 이거, 3초.]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파인 눈가에 진 그늘, 그 어두컴컴한 그늘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초면의 섬뜩함, 그러나 그 이미지는 계속해서 머리를 두들겼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녀를 향해.

유심히 쳐다보았다. 모든 걸 훑었다. 그녀의 어두운 구석들 하나 하나... 구멍난 눈과 입과 갈비와 메마른 모든 것들...

문득 그게 움직였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긁힌 자국이 듬성 난 안전 모자를 벗고 다가간, 깜박였, 갖다댈, 차오르는 것들... 흐르는 땀들... 잔뜩 적신 머리...

그녀에겐 내게 없는 게 있었고 내겐 그녀에게 없는 게 있었다. 아무렴 괜찮았다. 이미 모든 것이 흘러 내렸다, 그녀의 검은 미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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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교의 이... 자, 경 자... 희 자... 교수님 계십니까."

"네?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이 자, 경... 아 이경희 교수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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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건 고고학이 아닙니다."

"교수님... 잠시만요. 그,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툭.​

세상은 그의 사랑을 응원하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걸 바꿔야 한다.

​이제 그는 도서관에 간다. 일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간다.

​고고학개론...

​술도 끊었다. 모든 게 이것뿐이다.

​주말에는 그녀에게 간다. 이제그녀의몸에대해더자세히알고있다.

​그녀의 애나멜 서린 치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구멍 뚫린 대퇴골을 이해한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또 사선으로 빠져나온다.

​그러는 사이 또 사람 하나가 죽었다.

​떨어졌다. 그가 작업했던 바로 거기에서.

​외후두골이 튀어나온 채 죽을 거라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하얀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알몸을 보는 듯.... 순간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리고

​그러나 살아 있는 최 회장이 문제지 죽어 있는 그가 문제가 아니다.

플래시는 이곳을 비추지 않고

​그는 가루가 되어서 어딘가 뿌려질 거다.

​무리들은 또 한 번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그를 기릴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조개 껍데기요? ...그기 와 필요합니까?"

​"어쨌든 남을 거 아닙니까... 잡다 보면 남을 거 아니에요..."

​"아이 거 참..."

이제 일도 그만둔다.

운동을 한다.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튀어나온 뼈는 싫다.

이것도 관리해야 한다.

"그... 에이취에이취... 디..."

"HDD요?"

"아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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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요즘 거랑 가격 차이 별로 안 나요. 저렴한 제품 소개해드릴까요?"

"아 그런 게 아니고 중고나 이런 게 필요해요. 옛날 거... 데이터 남아 있으면 더 좋구요."

"아... 수집 이런 거 좋아하시나 봐요. 찾아 보면 시리얼 포트나 뭐 그런 것도 있긴 할 텐데...

...박물관이라도 차리시려고요?"

박물관, 박물관에 간다. 하지만 그것은 실은 기념관이다.

서울대 돼지 뚱땡이 공학도를 위한 곳이다. 그녀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아니 최 회장을 위한 곳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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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많이 주실 수 있습니까..."

"나이도 드신 분이 아직 건강한가 봐요, 허허." 너털웃음, 일전에 청계천에서 본 적 있는, 성가신, "요즘은 컴퓨타로 보던데 왠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컴퓨터 바꿀 때 이런 걸 그대로 냅두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당연히 지워야지 뭐..." "그럼 됐습니다."

[고전 국산 명작 10테라]

매일 거울을 보며 흰 모습을 상상한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여기는 박정희 때부터 그린벨트였어요. 아래 동굴 때문에 지반이 약해요. 도저히... 개발이 안 될 거에요... 근데 여길 사려고요? ...뭐 정보라도 있습니까?"

쓴 표정, "그러지 말고 알려줘요. 왜요, 뭐 있어요?"

"그냥 한 번 궁금해서요."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응? 귀띔이라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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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판다. 패각을 깐다. 촘촘히, 바닥면에.

2단계, 자갈과 모래를 긁어모은다.

3단계, 다시 패각을 깐다. 깊이가 꽤 깊다.

4단계, SSD와 CD 드라이브와 잠금해제된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신상을 적은 글들과 몰래 가져온 설계도면과 CRT 모니터와

그동안 잃어버린 이름들과

모든 걸 담는다.

5단계, 칼을 꺼낸다.

칼은 붉은 점액 속으로 미끄러져
내장을 갉아 놓는다.

그러나 뼈를 파고들 순 없다.

이제 기다려야 한다. 가늠도 안 되는 먼 시간을...

몸은 거뭇거뭇한 그곳으로 빨려들어가는데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