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어나 봐.”

한밤중이었다. 구름을 치우듯 흐릿한 시야를 걷어내자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은 자신의 몸뚱이만 한 베개를 안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왜, 또 악몽이라도 꿨어?”

“아니.”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찬장에서 자꾸 소리가 들려서 잠을 못 자겠어. 난쟁이들이 찾아왔나 봐.”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아들이 부엌 찬장에 난쟁이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찬장 속에는 그릇과 라면 봉지밖에 없다. 혹시 쥐라도 있을까 봐 구석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이상은 없었다. 아무래도 유치원에서 읽은 동화를 현실과 착각하는 듯했다.

“시우야, 난쟁이 같은 건 현실에 없다니깐.” 나는 얼른 잠에 들고 싶어서 얼버무렸다. 몇 시간 뒤에는 출근을 해야 한다.

“아니야, 난쟁이는 진짜 있어. 어제는 같이 인사도 했는걸.”

“그래? 그럼 조용히 좀 해달라고 말하면 되겠네.”

아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되겠다. 엄마, 잘 자.” 그러고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어준 나는 이불을 당겼다. 하지만 한 번 잠에서 깨서 그런지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인형 뽑기를 할 때처럼 의식이 아슬아슬하게 수면 위아래를 떠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아들의 목소리였다.

다만, 다른 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약 30초간 일방적으로 무어라 떠드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찬장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이쯤 되니 께름칙했다.

“엄마, 엄마.” 금방 아들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베개를 품에 안은 채. “난쟁이들이, 미안하지만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소리가 나도 참아달라는데 어떻게 할까?”

“무슨 일을 한다는데?”

“나도 몰라. 엄청 바빠 보였어.”

“그래, 엄마가 한번 가볼게.”

나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대에서 나왔다. 아들은 침대 옆에 서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귀찮지만 난쟁이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굳이 보여줘야 아들이 잠에 들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부엌을 향해 세 발자국을 움직였을 때 나는 멈칫했다. 부엌 찬장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기분 나쁜 소리였다. 쓱싹거리는 게 대리석을 사포로 긁는 것 같기도 하고, 쥐가 나무를 갉아먹는 것 같기도 했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나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난쟁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해봤자 쥐 정도겠지.

묵직한 숨을 내쉰 나는 일단 부엌 전등부터 켰다. 하지만 스위치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나자, 부엌 찬장에서 울리던 쓱싹거리는 소리도 동시에 멈췄다. 마치 빈집털이를 하다 경찰에게 걸린 사람처럼.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눈만 껌뻑였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두 번 심호흡을 하자 금방 감각이 돌아왔다.

“그래, 쥐일 거야, 쥐.” 나는 괜스레 혼잣말을 하고는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이미 잠은 모두 달아났지만, 이 께름칙한 상황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찬장 앞에 다가선 나는 양팔을 들어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고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생각할 틈을 두지 않고 찬장을 양쪽으로 벌컥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뿌연 시야가 점차 맑아졌다.

난쟁이 따위는 없었다.

그릇을 들어보고, 라면 봉지를 옆으로 치워 봐도 난쟁이는 물론 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잠결에 헛것을 들은 걸로 덜컥 겁을 집어먹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찬장을 닫은 나는 등을 돌렸다. 어느새 아들은 내 옆으로 와 있었다.

“봤지? 난쟁이 같은 건 없다니깐.” 내가 말했다.

“어?” 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있었잖아, 난쟁이들.”

“시우야, 밤에 이렇게 장난치면 엄마 피곤해.”

“장난 아니야!” 아들이 외쳤다. “방금 엄마가 라면 치우니까 난쟁이들도 그쪽으로 뛰어갔잖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 아들이 큰소리를 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억지스러운 장난을 이어가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아들의 눈에는 정말 무언가가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여기 봐봐.” 그럼에도 나는 다시 찬장을 벌컥 열었다. 아들이 무엇을 봤든, 일단 그 정체가 난쟁이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줘야 했다.

하지만 그대로 내 숨이 멎었다.

찬장 깊숙한 곳에 정말로 난쟁이가 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쟁이라기보다는 사람 모습에 거의 근접한 관절 인형 같았다. 길이는 약 15cm. 세 명, 아니, 세 개의 인형 모두 억지로 사람을 따라 하고 있다는 불쾌감이 역력했다.

세 개의 인형은 아무 말 없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들에게 생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더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세 개의 인형들은 각각 남편, 나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찔했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인형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이윽고 내 얼굴을 한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듯한 끼기긱 소리를 내며 그것은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곧이어 그늘진 곳에서 벗어난 그것은 다리를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삐그덕거리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 목소리였다.

거기서 내 기억이 도끼로 내려쳐진 것처럼 끊겼다.

눈을 떴을 때는 거실 소파 위였다. 시각은 오전 6시 30분. 커튼의 얇은 틈으로 박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내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잘 때 입은 파자마도 그대로였다.

우선 나는 아들 방부터 확인했다. 다행히도 아들은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우야, 일어나 봐.” 나는 얼른 아들을 깨웠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 했다.

아들은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윽고 눈을 비비며 말했다. “왜……”

“난쟁이들, 난쟁이들은 어떻게 됐어?”

“난쟁이?” 아들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부엌 찬장 속에 있던 난쟁이들 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오늘 새벽에 같이 봤잖아. 네가 한밤중에 난쟁이들이 시끄럽게 군다고 해서 엄마 방으로 왔고.”

“내가?” 아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충격이라도 받아서 기억을 잃은 걸까. 내가 조용히 있자 아들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준우가 그랬는데 산타나 난쟁이 같은 건 실제로 없대. 다 책 속에만 있는 거라던데, 엄마는 어른이면서 그런 것도 몰라?”

“그래.” 나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엄마도 그냥 장난 한번 쳐본 거야.”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그대로 방을 나왔다. 그러고선 부엌으로 가서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찬장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깔끔했다. 그릇과 라면 봉지. 그게 전부였다. 인형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악몽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소파에서 잠에 들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