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9 12:44:56
ⓞ 추천
ⓤ 단축URL
|
23
161
네잎군
|
안녕하십니까. 벌써 시 쓰는 법에 대해 세 번째 게시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거시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서
세밀한 부분으로 들어가는 탑다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 말인 즉슨, 앞서 서술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개괄적인 내용이라면
후술할 내용과, 이 글 이후의 글들은 점진적으로 세밀한 부분을 다룬다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점점 더 난해하고 어려운 내용을 다룬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낯설게 쓰기와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wait&number=8458676）
세상을 구축하는 법을 배웠고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wait&number=8459381）
오늘 다룰 내용은 공간이며, 다음 글은 상징입니다. 일단은 낯설게 쓰기와 세상 구축에 대한 글은 가장 기초적인 영역이며
（혹시 이 글을 처음 접하시고,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면 윗 글을 순서대로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공간을 이해하고 상징에 대해 배우는 것은 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그 이후부터는 어찌보면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상징 이후에는 글을 마저 쓸지, 아니면 다른 가벼운 내용으로 연재를 이어나갈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잡설이 다소 길었습니다. 본 내용 시작하겠습니다.
배운 내용을 다시 언급해볼까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낯설게 쓰는 것이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여러분들은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겠으나, 가장 원론적인 대답이라면
아무래도 공간과 시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뜬금없지만 저는 포덕입니다. 최애 포켓몬은 골덕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시라는 장르 특성상,
아무래도 시간에 대한 부분보다는 공간에 대한 부분이 훨씬 중요합니다.
（시에서 시간성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려면 내용이 너무 길어지고 복잡하니 과감히 생략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자신이 잠을 자고, 일을 하고,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모든 것은
결국 특정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공간의 시학의 시발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명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대표적인 저서
공간의 시학을 들 수 있겠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읽기를 굉장히 추천드리지만, 내용이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가 책 좀 깨나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말 어렵습니다.
사실은 저 역시도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가? 하면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나름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도,
손꼽히게 어려웠으니까요.
그렇지만 시에 대해서는 공간성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고
시를 보다 깊게 쓰기 위해서는 공간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내용을 정말 쉽고 간단하게,
아주 짧게 집어보는 것으로 오늘 글을 대체할 생각입니다. 관심이 가신다면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바슐라르의 책은 정말 어렵지만요.
앞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죠?
그렇다면 시를 쓸 때에도 시적 상황이 일어나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질문이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공간이 중요하다는데, 딱히 공간성이 느껴지지 않는 시도 많은데요?'
맞습니다. 모든 시에 공간성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시를 정말 잘 쓰는 시인들의 시를 단편적으로 읽을 때도,
특정 사건만이 나열되면서 공간이 형성되지 않는 경우도 분명 있거든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시가 존재하고, 모든 시가 비슷한 맥락이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저는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사실 그다지 많다고 하긴 어려운. 웬만한 시인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양입니다.）
시를 읽었습니다. 대략 시집 기준으로는 백 권, 단일 시로는 만 편 정도 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좀 더 읽었을 수도 있고, 덜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문적인 시인의 시에서 공간성이 배제된 경우는 그런데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1. 사실은 공간이 드러나지만,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 경우
2. 시 자체가 일종의 연작시（혹은 시집 전체）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단일 시로는 판단이 어려울 경우
3. 시인이 의도적으로 공간을 배제한 경우
4. 기타
정도가 될 텐데요. 여기서 기타에 해당하는 경우의 시는 그다지 인상 깊던 게 없네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본인이 다소 보다 나은 시를 짓고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의도적으로라도 시에 공간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예시를 통해 알아볼까요.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 김중일
1
내가 어렸을 적, 개나리담장을 걸을 때마다 [누나] 생각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우리가 살던 [파란 대문] 집에서 염색공장까지 한없이 이어지던 개나리담장, [누나]는 그 길을 따라 출근했다가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서 귀가했다 [누나]가 앓아눕던, 어느 개나리꽃 다 진 날의 저녁 나는 [누나]의 검은 샛방으로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어, 노란 머리핀을 훔쳤다 나는 그것을 거웃처럼 뒤엉킨 개나리 마른 가지, 그중 가장 억센 한 가지에 달아주었다
2
사막으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면 어머니는 새 빨랫비누를 모조리 강판에 갈아 마당에 흩뿌리고 대청소를 했다 집 안 구석구석 비누냄새가 만개했고, 편지봉투에는 항상 석 장의 편지지 말고도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알갱이 몇알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래알갱이를 작은 유리병 속에 모으며, 모래시계를 만들었다 사진 속의 아버지가 밟고 선 인피를 펼쳐놓은 듯한 사막, 식물도감에서 본 선인장 그 붉고 선연한 사막의 꽃 생각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어느해 장마, 나는 어두운 교실에서 물에 잠겨 개구멍같이 좁아진 [파란 대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몇년에 걸쳐 모아왔던 모래의 시간이, 말없고 무뚝뚝한 검은 홍수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3
짙은 코발트블루, [파란 대문]의 파랑 속에는 파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주 주인을 바꾸며 겹겹이 다른 색깔로 덧칠되어온 [파란 대문]의 파랑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파랑이었다 그 파랑의 바로 밑에 노을색의 예쁜 빨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어느날, 나는 못으로 미술시간에 배운 대한민국 전도를 대문에 그려넣고 휴전선 이북을 손톱으로 긁어내었다 나는 그 바보 같은 [파란 대문을 사랑했다]] 포클레인에 힘없이 구겨지던, 한 장의 도화지처럼 가냘픈 [[파란 대문을 사랑했다]] 언제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 화단의 꽃보다 많은 잡초와 진딧물이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채송화, 학교에 두고 온 것이 있어 화들짝 돌아서면 [파란 대문]까지 내려와 숨을 고르고 있는 석양
4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자주 국경꽃집이 되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얼굴이 붉어지며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땡볕은 내 등줄기에 후끈거리는 작고 뜨거운 봉창을 내고 도망갔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포클레인에 압사한 대문 앞 버드나무가 제 몸속에 칭칭 감아놓고 있던 나이테를 채찍 대신 꺼내들고, 무섭게 바닥으로 질질 끌며 나를 쫓아오곤 했다. 나는 지금도 자주 국경꽂집이 되곤 하지만 그것은 아침에 발설하면 불길하고 어지러운 꿈자리 같은 것이어서, 아직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그 때마다 내 가슴속의 구근 한 덩이가, 두근거리며 온몸 구석구석 무수히 붉은 꽃을 매단 가지를 뻗어올린다. 나는 자주 한 그루 국경꽃집이 되었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이 시의 상황에 드러나는 공간을 먼저 파악해야합니다.
몇몇개 언급해보자면, 사막, 개나리담장길, 공장, 우리집, 그리고 국경（이북）이 되겠습니다.
저는 시의 내용을 짧게 간추려 해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혹시 시 전문의 해석을 원하신다면 언제든 설명해드릴 순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의 화자는 가족의 희생으로 인해 자라나고 있는 인물이며,
그 연장선상으로, 나라（가족）의 일부분인 국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공간중에서 왜 하필 국경일까요? 국경의 나라의 가장 구석진 자리 아니겠습니까?
이건 사실 어린 아이의 입장으로 생각해본다면 비교적 쉽게 풀립니다.
당신이 화자의 입장이라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공장에 다니는 누나와, 해외에서 일하는 아버지, 살림을 보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누나는 힘든 공장일을 다니며 얼굴이 누래지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고통은 말할 것 없겠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리니까.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족의 희생으로 살아가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 ㅜㅜ 우리 가족이 나를 위해 희생하니까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야징!'
하고 생각이 드십니까? 효자시네요.
그런데 사실, 이것을 정말 적나라한 현실의 나로 대입해본다면, 과연 이런 감정만 들까요?
부담감과 압박감, 슬픔 등의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마음 한 켠에서는 스멀스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요?
인간은 다 똑같습니다.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의 희생은 너무 값진 것이며 자신은 그 가치를 알고 있고
부끄러워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그와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죠. 어쩌면, 자신만이 느끼는 묘한 소외감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나라에 분명 포함되어있기는 하지만,
나라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국경꽃집'이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막이라는 지형이 가져다 주는 삭막함, 공장이라는 공간,
개나리 담장으로 이루어진 철제문. 우리집. 등
따스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면서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결국 모두 이 공간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제가 쓴 시를 통해 공간성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는 다소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제가 2년 전 시창작론 강의을 들을 때, 주제중 하나가 도시 괴담이었습니다.
2. 제가 다룬 도시 괴담은 12년 12월 21일 지구종말론이었습니다.
（TMI. 시 두 편을 냈는데 나머지 하나는 자유로 귀신이었구요）
3. 윗 집에서는 가정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4. 이 날은 12년 12월 21일. 세상은 종말론으로 들썩합니다.
5. 딸은 '종말의 전조'라는 말이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엇인가 쿵쿵대며 무서운 상황이 연출되기에,
아이는 무엇도 모르면서 이것이 종말인지, 종말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6. 나는 어린 딸에게, '윗집의 여자가 맞고있다'는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종말의 뜻을 이해시킬 자신도 없구요.
7. 그래서 나는, 종말이라는 것은 사실 '아이의 이름이다. 아이가 시끄럽게 하는 소리이다' 하고 대충 때워 넘깁니다.
8. 가정 폭력은 계속 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말이라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다고, 너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종말이처럼 혼난다고 훈육을 겸하기도 하구요.
9. 어쩌면, 내가 윗집의 가정폭력을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윗집 가정'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10. 12년에 태어난 아이는 19년이면 대략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겠죠.
11.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내가 방관했었던 그 가정폭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지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만들었던 종말이가 초등학교에 갔는지, 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때의 고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지를 묻는 내용입니다.
이 시에서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모두입니다.
이 시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은, 아파트가 재건축하기 전, 허름하고 노후한 아파트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1연의 두 행입니다. 아파트가 재개발 되기 전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은, 화자를 포함한 모든 이가 불행합니다.
윗집 여자도 불행하고, 모르는 척 해야하는 나도 불행하고,
컵 떡볶이를 먹던 아이도 불행합니다.
이 상황은 누구의 잘못인가요? 단편적으로는 당연히 폭력을 일삼은 남편이겠으나
조금 더 깊게 고찰한다면 구조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현대사회에서의 이웃간의 단절과 경제적 궁핍의 어려움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것을 허름하고 노후화된 아파트라는 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이 시는 아파트라는 공간성이 비교적 잘 녹아들어간 시라 볼 수 있겠네요.
건물을 다 때려부순 현장에서 나타난 도마뱀과
온화한 집안에서 평온하게 누워있는 도마뱀은 당연히 다른 느낌을 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시에서 공간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내용은 조금 와닿으셨나요?
눈치빠른 분이라면 결국 공간이라는 것이 일종의 비유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아실 겁니다.
그래서 다음 내용은 이와 이어지는, 상징에 대한 부분에 대해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오늘도 작은 과제를 내겠습니다.
시를 써보세요. 마음대로 쓰시되, 공간성이 드러나게끔.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