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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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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처럼 덥썩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는 놀라며 날 바라봤다.

사람이 앞을 보고 있어도 시야각이 존재하기에
그녀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지만
그것을 무시하며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심리적 기제로
오히려 더 과감하게 내 외투 주머니에
우리의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제 좀 따뜻하네."

내심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띠었는지 기대하며 바라봤지만
가로등의 주홍색 불빛이 그것을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연애 스타일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을 보인다고 판단되면
지금처럼 과감하게 직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판단이 맞든 내 착각이든 저지르는 편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짙게 깔린 어둠이 내 초조함을 가려주길 바라며 물었다.

"우리, 만날래?"

그녀가 어떤 결심을 한 듯 내 외투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난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오빠, 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

경험상 이런 경우 십중팔구 부정적인 내용이 들려왔다.

"응."

"나도 오빠 싫은 건 아닌데, 좋은지도 잘 모르겠어."

"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방금 우리 손 잡고 있었는데, 설레지가 않았어."

청천벽력.
지금껏 숱한 고백을 했고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설렘이 없다는 말이 이렇게 상처가 될 줄 몰랐다.

그녀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우울한 기분으로 누웠다.

'하... 병신. 고백하지 말 걸.'

성인 웹툰에서는 매 화마다 섹스씬이 등장하지만
현실이라는 세계관에서 난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그녀를 대하기가 조금 어색했지만
다시 친구 같은 분위기의 편한 태도로 대했다.

이후 그녀는 훤칠한 교육 강사와 사귀더니,
돌연 예고없이 무단 결근으로 퇴사했다.

퇴근길에 그녀에게 전화하여 이유를 물었다.

어제 그 남자와 싸웠는데,
그녀가 키우던 요크셔테리어의 목덜미를 번쩍 들고,
베란다 밖으로 내밀며 "이 개새끼 죽여버린다!"라고
말한 순간 이별과 퇴사를 결심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예쁜 외모와 남자복이 반비례하는 케이스였다.

직종 특성상 상담직은 이직과 퇴사의 빈도가 잦았다.
결원의 수만큼 금방 신입 기수가 채용됐다.

후배들이 상담 중 모르는 고객문의를 받았을 때,
실시간 코칭을 해주는 역할이 내 업무였다.

후배 기수에서 예쁘장한 남자 아이가 하나 들어왔다.
미소년 아이돌같은 외모에 주먹만한 얼굴이었다.
패션 감각마저 뛰어나, 같은 남자임에도 괜히 눈이 갔다.

'부러운 놈.'

내 동기들은 엄청 예쁜 남자애가 들어왔다며
오늘 후배들을 꼬셔서 다같이 회식을 하자고 했다.

회식 자리에서 내 동기들은 미소년 후배에게
수 많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나이, 거주지 등을 묻다가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저 여잔데요?"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남자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아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고 했다.

내 동기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외모는 내가 본문의 짤방으로 올린 사진과
분위기가 비슷했고,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다.

20대 남성 쇼핑몰의 피팅 모델처럼 옷을 입었고,
흉부의 돌출이 부각되지 않은 체형이라서
보고 있으면서도 새삼 신비했고 막상 여밍아웃을 들으니
남자라면 남자대로, 여자라면 여자대로 예쁜 느낌이었다.

그녀는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학교 다닐 때
자신의 팬클럽도 있었으며, 동성 친구들이 뽀뽀를 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굉장히 불쾌했었다고 했다.

"씨발년들아!"하고 욕을 해도 꺄르르 웃으며
다음 번의 뽀뽀를 기약하는 년들이라고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찡그린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 웃겼다.

그녀가 조금 귀엽게 보였다.

여자들이 많은 직장을 다닌 탓일까.
난 금사빠가 된 느낌이었다.

그 아이는 서든어택을 즐기고 있다기에
나도 대위（◇◇◇）, 킬뎃 50% 아이디가 있다고 말하니
본인은 대장（☆☆☆☆）, 킬뎃 61%라고 했다.

그날부터 퇴근 후, 미소년을 닮은 직속상관과
영등포 시장의 PC방에서 함께 게임을 즐겼다.

하루는 게임 중 배가 고프다며 컵라면을 먹자는 그녀에게
치킨을 사줄테니 나가자고 했다.

치킨과 맥주를 시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늦은 시간이 되었다.

영등포역 전철 막차가 이미 떠난 시간이라,
그녀를 택시정류장에 데려가, 지갑에 있던 3만원을 주었다.

"아니에요, 오빠. 왜 돈을 줘요?"

"나 때문에 전철 놓친 것 같아서 미안해서."

"에이~ 같이 논 건데요, 뭐. 괜찮아요."

"다음에 너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고 주는거야. 받아."

무안해하며 고맙다는 그 아이에게 돈을 건넸고,
그녀가 탄 택시를 보면서 핸드폰을 꺼내들어
택시 번호판을 촬영했다.

촬영한 사진을 그 아이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 세상 위험해서 찍어놨으니까 도착하면 바로 카톡해. 』

그녀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 헐.. 감동! 알았어요!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여~ 』

그렇게 평일의 업무를 마치고 주말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녀와 데이트가 하고 싶어졌다.

학창 시절에는 짝사랑하는 아이를 생각하며
'저 아이도 날 좋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기도가 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됐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도는 행동이었다.

난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 너 혹시 영화는 어떤 장르 좋아해? 』

그녀는 액션, 스릴러를 좋아한다고 했다.

『 그럼 우리 영화 한 편 보고, 서든하러 가자ㅎ 콜? 』

그녀는 좋다고 했다.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호감이 느껴져 용기낼 수 있었고,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저녁에 만나, 심야영화를 봤고,
PC방에서 놀다 나오니 새벽이었다.

그녀가 자취하는 원룸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줬다.

"오빠는 집 어떻게 가게요?"

"택시타고 가야지. 얼른 들어가서 자."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되는데.."

인생을 살며 육성으로 들어본 말 중
비현실적인 멘트 BEST 3 안에 들어가는 말이었다.

물론, 현실이 영화 보다 더 말이 안되는 순간들이 있고
범인들이 믿기 힘든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다지만
유교 사상이 뿌리내린 이 선비의 나라에서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된다라..

1,400만개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능력이 필요한 날이었다.


（（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화가 최종화가 됩니다. ））


[ Post Script ]

Netflix님
내위장속에지우개님
거기112죠님

웃대개념 선물 잘 받았습니다.
글을 통해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추천 한 표가 정말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